이 책은 죽어라 일하는데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은 당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하며, 한 끼 밥값도 안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농부, 광부, 어부, 공장 노동자들과 생각보다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들과 우리를 이어주는 대기업 덕분이다.

식품, 의류, 전자, 제약, 자동차 등 각 분야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들은 이들에게서 사들인 원료로 상품을 만들어 우리에게 판매한다.

대기업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대기업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도 그들이 만든 물건을 구입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감압 정지는 심해 다이버들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안전 수칙이다. 공기통에는 질소와 산소가 섞여 있다.

이 두가지 기체가 폐를 통해 혈액으로 흡수된다. 산소는 잠수를 하는 동안 소진되지만, 질소는 몸속을 돌아다니다가 폐로 돌아가 이산화탄소와 함께 배출된다.

수심 30미터까지 내려갔을 때 우리가 마시는 공기는 어마어마하게 압축되어 있다. 문제는 질소가 몸속을 돌아다니다가 폐로 가기까지 1~2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질소가 미처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물위로 올라가면 남아있는 질소가 팽창하면서 동맥에 작은 기포를 만든다.

이것이 혈관을 막아 감압병(잠수병)의 원인이 된다. 불구가 되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다.

 

콜레부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젊은이가 4000명이 넘었다.

그나마 콜레부스는 운이 좋은 편이다. 다이빙 때문에 매년 50명이 목숨을 잃는다.

 

2010년 봄, 폭스콘이 국제적인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 달 사이에 이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 16명이 투신자살했다.

몇 명은 근무 중에 공장 창문에서 뛰어 내렸고, 다른 이들은 자신의 침실에서 뛰어내렸다.

공장 밖에 서 있는 동안 나를 단번에 놀라게 한 것은 노동자들의 나이였다.

대개가 10대 후반으로, 서양 같으면 이제 대학에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나이였다.................

서양 소비자들에게는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폭스콘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애플, 노키아, 델, HP,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니텐도 등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제품이다.

 

애플의 수익률이 27퍼센트인 데 비해 폭스콘의 이익률은 단 4퍼센트에 그친다.

공급망에서 절약한 거액을 소매상인 서양 기업이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폭스콘의 공장 한 곳에서만 40만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공장의 규모도 엄청나서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이동하는 데 자동차로 30분이 넘게 걸린다.

 

공산주의 꼬리표는 아직 달고 있지만 중국은 극심한 개인주의 사회다.

그러고 보면 노동 조건과 관련해 자국이 덜 공산주의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에 더해 노동자보다 경영주의 이익을 더 지지하는 정부가 통치하는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이니다.

사장들이 영향력있는 정치인들에게 수표 하나만 써 주면 모든 귀찮은 일이 손쉽게 해결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정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국은 정부가 진정 원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이루고마는 나라다. 그래서 이런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노동자들은 대응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압박이 거세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장이 휴식을 허락해 주는 경우는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울 때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래 여기 사람들은 담배를 안 피웠는데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부터 피우게 됐어요. 담배를 피워야 더 많이 쉴 수 있으니까요."

갓 심은 고무나무가 다 자라려면 7년이 걸리는데, 그때가 되어야 라텍스를 채취해 자동차 타이어나 운동화를 만들 수 있다.

당시 루이펑의 고무농장도 라텍스를 채취할 수 있는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1만헥타르에 달하는 전체 농장이 생산력을 갖춰 전면 가동되려면 5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중국 정치인들은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중국관료들은 중국의 발전 단계를 미루어 볼 때 아직은 이런 윤리적 측면을 우선시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윤리 문제는 풍족한 서양 국가나 감당할 수 있는 사치이다. 서양인들은 제국주의로 약탈한 자원을 이미 누릴 대로 누렸다.그런데 중국은 왜 안된다는 것인가?'

그들은 제국 건설에 따른 인류의 희생을 반복하려 하고 있다.

중국만 탓할 일은 아니다. 선진국 주요 기업들도 공모자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중국의 작업환경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코너, 나 무서워요."

"나도 무서워요"

난 다시 웃었다. 물론 나도 무섭다. 내가 소리치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렸다.

"이 망할 책 쓰려다가 내가 죽겠어요."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그 당시 계속 켜져 있던 녹음기로 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공포에 질린 내 목소리를 들으니, 그 컴컴하고 비좁고 위험한 터널을 희미한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더 깊숙이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곳까지 들어간 이유였다.

그것은 내앞에서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던 보니페이스 같은 사람이 습관처럼 느껴야 했던 것이지만,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채 땅속 깊숙이,

이 축축하고 더러운 사형장으로 매일같이 나아가면서 아마 더는 느끼지 않게 되었을 감정이었다.

 

갑자기 또 다른 공포가 몰려왔다. 바위가 벽에서 떨어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몹시 불편해졌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곡괭이로 내려칠  때의 요란한 소리 때문에 어지럽고 거북했다. 여기에서 일하려면 이런 공포에 둔감해져야 한다.

이곳 사람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음의 공포를 한쪽 구석에 제쳐 둔 채 이곳에서 곡괭이질을 한다.

그들은 이 일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삶은 가혹하다. 그들이 꾸려갈 수 있는 유일한 생계는 정글의 창자 깊숙한 곳에 존재했다.

폭풍이 경고없이 불어닥쳐 순식간에 물을 쏟아내고 산사태를 일으켜 이들을 산 채로 묻어 버릴 수 있는 이곳에.

나는 보니페이스가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바위를 깍아 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서둘러 나왔다.

 

"내다 팔 작물을 가지고 시장으로 가다 보면 탈레반, 경찰, 도적들이 우리를 세웁니다. 통행료를 내라는 거죠.

그러면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양귀비를 기르는 게 더 낫죠. 양귀비는 살 사람이 직접 찾아오니까요."

 

글은 엉킨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해주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또 , 이 생각을 저 생각으로 옮기는 능청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

글쓰기가 논리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운다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키스를 했다.

이제 자신에 대해 생각하려는데 문득 3분 후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다.

28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헛되이 느껴졌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자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탄환을 총에 장전하는 소리가 났고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바로 그 순간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는 황제의 특별 사면령을 가지고 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5분 중에서-

 

글쓰기를 문학적 글쓰기로 생각하다 보니 글쓰기가 어렵게만 보였다.

문학적 글쓰기와 실용적 글쓰기를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좋은 글이 되려면 창의적인 생각과 참신한 표현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생각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이나 다양한 시작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 나타난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메모광인 것을 보아도 적는 일은 험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메모는 글쓰기 훈련으로 매우 좋은 방법이다. 글쓰기 원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메모한 원재료를 잘 연결하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러면 왜 메모를 해야할까. 글은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상황에서 글이 나온다.

감동의 순간을 재현하기가 어렵다. 아이디어가 스칠 때 메모하지 않으면 제대로 기억이 안 된다.

 

기억하는 뇌는 머리에 있지만 기록하는 뇌는 손에 있다.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

 

질문하지 않으면 호기심이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창의력이 실종된다.

 

글쓰기의 비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 송나라 정치가이자 문필가인 구양수의 삼다가 있다.

삼다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한다는 것으로, 이후 천년동안 글쓰기의 바이블로 통하고 있다.

 

사색의 시간은 생각을 다듬는 시간이다.

따라서 글쓰기 전에는 묵상이나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은 진화하며, 이에 따라 사고력과 창의력 역시 진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넘어져보는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리얼리티입니다. 그런 인생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삶입니다.

 

웅덩이에 갇힌 시간도 내 삶의 귀중한 일부임을 인정할 것.

그 처한 곳에서도 삶을 누릴 것. 포박된 삶의 고통과 갑갑함을 기꺼이 껴안고 삶을 지속할 것.

즉 내가 처한 그 웅덩이 안에서도 내 삶이 진행되게 할 것.

당장 진전이 없을지라도 돌이켜 그 시간이 내게 귀한 경험이 되었던 때였음을 회상할 수 있게 처신할 것.

하루하루가 아픈 나날일지라도 때를 기다려 오늘을 열고 닫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 것.

그 자리에서 썩어 주변과 함께 악취를 만들지 말 것.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힘차게 여행을 떠날 것.

마치 웅덩이에 고였다가 새로운 물이 밀고 들어올 때 힘차게 바다로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물처럼.

 

저 나무 한 그루에게서 또 배웠습니다. 배롱나무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지상부 전체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으나, 땅속의 뿌리만은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추위가 계속되던 날, 나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몇년을 일궈온 자신의 것 대부분을 버려야 했습니다.

뜰을 온통 붉게 물들여 벌과 새를 부르며 자신의 하늘을 열고자 했던 꿈을 지닌 배롱나무에게 삶이란 그렇게 치열한 것이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자신의 뿌리에 숨겨 놓은 꿈만은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 속에는 버려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버리되 뿌리를 지킬 수 있다면, 떨구되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다시 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 나가는 국면으로 접어들 때건 험난한 국면으로 접어들 때건 가장 중요한 전략은 그 상황으로 내가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무들은 겨울이 오면 그 시절에 맞춰 자신을 정돈합니다. 낙엽을 만드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반면 여름이 오면 나무들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제게 허락된 하늘을 향해 힘차게 자신의 잎과 가지를 뻗어나갑니다.

지금 숲에 드리운 푸르름의 힘찬 기운을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나무처럼 새로운 국면의 실체를 자각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지혜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바람 불고 눈 내리며 추워진 시간의 협곡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안으로 깊어가는 시간을 보냅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겨울눈을 지키며 오로지 침묵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숲은 내게 간결함을 위해 먼저 멈추고 침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내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씨앗과 새롭게 움튼 눈을 응시하도록 가르칩니다.

새롭게 성장할 때를 기다리되 협곡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나무들은 나목이 되어 자신을 지켜냅니다. 겨울엔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더 이상 소비도, 생산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목은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시도를 멈춥니다.

당연히 소비도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하고요. 간결해지는 것이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만 버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에는 그렇게 버티는 것만이 큰 희망이고 수행인 시기가 있습니다.

 

삶의 나이

                       박노해<<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우리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 삶의 나이라오.

 여의주: 익으면 열매가 벌어짐

 관상용 호박

 

관상용 호박

법에 따라 형벌을 집행하자 군주가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자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형을 집행하지 못하는 것은 인仁이고, 형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이다.

선왕이 법을 우선하고 눈물에 따르지 않은 것은 인만으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군주는 그가 하고자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다. 군주가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면, 신하는 그 의도에 따라 잘 보이려고 스스로를 꾸밀 것이다.

군주는 자신의 속 뜻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그 속 마음을 보이면, 신하는 남과 다른 의견을 표시하려고 할 것이다.

군주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취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하는 즉시 본심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지략이나 지혜를 감추면 신하들은 스스로 신중하게 처신할 것이다.

 

자반의 하인인 곡양이 술을 바친 것은 자반에게 적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곡양이 충심으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인데 도리어 그것이 그를 죽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충성을 행하는 것이 도리어 더 큰 충성을 해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안으로 마음이 굳건하므로 표준으로 삼을 만하며, 밖으로는 예의가 바르므로 큰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또 욕심이 적으므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고, 신의가 두터우니 이웃 나라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패왕을 보좌할 사람이 갖춰야 할 조건입니다.

 

군주의 이로움은 능력있는 자를 얻어 벼슬자리를 등용하는 데에 있고, 신하의 이로움은 무능하면서도 임무를 얻어내는 것에 있다.

군주의 이로움이 일 잘하는 사람을 얻어 작위와 봉록을 주는 데에 있다면, 신하의 이로움은 공이 없으면서도 부귀를 차지하는 것에 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설득하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려 내가 말하는 것을 그에게 맞출 수 있는냐 하는 점에 있다.

 

일이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성공하고 말이 새나가면 실패한다.

 

유세할 때에 힘써야 할 점은 상대방이 자랑스러워 하는 점은 칭찬해 주고, 부끄러워하는 부분은 감싸줘야 한다는 것이다.

 

유세의 대의는 상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며, 말투도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자신의 지혜와 말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의 재난은 사람을 믿는 데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에게 지배받게 된다.

신하는 군주와 골육의 친분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세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하된 자는 군주의 마음을 엿보고 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데, 군주는 그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교만하게 처신하니,

이것이 세상에 군주를 협박하고 시해하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증오하는 자를 방비하지만, 재앙은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무릇 덕이란 무위함으로써 모여진 것이고,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며, 사고하지 않는 가운데 평온해지고, 수단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고정된다.

 

최상의 덕은 덕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덕이 있게 된다.

 

일부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음으로써 고요한 상태에 이르려고 하는 자는 의지가 항상 고요함을 잊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고요한 상태가 되려는 데에 속박되는 것이다.

 

고요한 상태란 그 의지가 속박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요한 상태가 된 사람의 행하지 않음이란 행하지 않음을 항상 마음에 매어두지 않는 것이다.

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써 일정함이 있게 하면 고요해진다. 고요해지면 덕이 흥성할 것이다.

 

최상의 덕은 행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며, 모든 의로움을 꾸미는 것으로,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를 만들고,

귀함과 천함,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분별하는 수단이다.

마음속으로만 흠모해서는 상대방이 깨닫지 못하므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진실로 낮추어 절을 함으로써 그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란 밖으로 드러나는 절도로 속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 예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을 잃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을 잃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를 잃고, 의를 잃은 뒤에 예를 잃게 된다."

 

덕을 쌓은 후에 정신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고요해진 이후에 조화로운 기운이 많아지고, 조화로운 기운이 많아진 후에 생각이 꼭 들어 맞게 되고,

생각이 꼭 들어 맞은 이후에 만물을 제어할 수 있으며, 만물을 제어할 수 있으면 싸움에세 적을 쉽게 이길 수 있고, 싸움에서 적을 쉽게 이길 수 있으면,

언변으로 세상을 제압할 수 있다.

 벌천포 해수욕장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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