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천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해서 완전히 달라진다.

 

습관은 어느날 문득 다짐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몸에 익으면 바로 자신만의 습관이 되는 것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익숙한 경구는 습관에 관해서도 진리인 것이다.

 

맑은 방울 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는 것이다.

소리가 날 때마다 나 자신을 경계하고 잘못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물건이니 너희들도 차고 다녔으면 좋겠다. -조식-

 

속으로 밝은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절조가 드러나는 것은 의(義)다.

 

내가 정점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망가지는 지름길입니다.

 

링컨은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종이에 그 구절들을 옮겨 적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만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후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했다. -정조-

 

나날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안창호는 '나날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평생을 살아갔다.

안창호의 진면목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용어는 바로 '점진'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되었던 에밀 졸라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바쁜 일과였지만 그는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그는 촛불을 켜놓고 몇 시간씩 글을 썼다.

훗날 그는 낮에도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고백했다. 밤에 글 쓰는 오랜 버릇이 몸에 익은 탓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착실히 글을 써나갔지만 소설가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공들여 쓴 소설들을 여러 출판사에 투고해 보아도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출판할 수 없다는 거절뿐이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소설을 썼고 수많은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투고를 거듭했다.....

 

동심이란 진심이다.

만약 동심을 불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불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

만약 동심을 잃어버리면 곧 진심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진심을 잃어버리면 곧 참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 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손가락을 얕보아서는 안된다. 악기와 늘 접촉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손가락이다 -스트라빈스키-

 

사람에게는 완벽함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일을 잘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사람들을 믿고 존중하며 그들이 유용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절영지회는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거나 남을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나는 막 전개되려는 삶 앞에서 독자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르 코르뷔지-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맞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사기-

 

그가 생각하기에 단 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온갖 잡생각에 빠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란 존재의 특성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를 줄 모르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큰 폐단이다.

천하의 의리가 무궁한데 어찌 나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황-

 

 

 

<서문>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 만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

 

<<인생>>이라는 작품은 개인과 운명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감동적인 우정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증오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그의 운명은 서로 상대방을 포기할 방법이 없고, 서로 원망할 이우도 없다.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은 읅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함께 가고, 죽을 때는 빗물과 진흙 속으로 함께 녹아든다.

아울러 <<인생>>은 사람이 어떻에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중국 속담에 '머리카락 하나에 십만 근을 달아도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한다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작가는 아침 저녁으로 대하는 현실을 표현해야 한다.

그는 종종 그 일이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무섭게 달려드는 진실은 대개 추악하고 음험한 것을 하소연해오기 때문이다.

왜 이상한 것은 죄다 여기에 있는지.

추악한 사물이란 사물은 다 내 옆에 있고, 아름다운 것은 머나먼 바다 끝에서 가물거리는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우애와 동정심은 늘 정서의 형태로 다가오지만, 그와 상반되는 사실들은 오히려 손만 뻗으면 바로 만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시인이 말한 것처럼"인류는 지나치게 많은 지실은 감당해낼 수 없다."

 

나는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의 분노가 점차 사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우리 쉬씨 집안 조상들은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그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었고, 닭이 자라서 거위가 되었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었고, 양이 다시 소가 되었단다. 우리 쉬씨 집안은 그렇게 발전해왔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스쳐갔다네. 아버지는 잠시 가만히 계시다가 다시 말을 이으셨어.

"내 손에서 쉬씨 집안의 소는 양으로 변했고, 양은 또 거위로 변했다.

네 대에 이르러서는 거위가 닭이 되었다가, 이제 닭도 없어졌구나."

 

"나도 생각지 못했네. 예전에는 가장 두려운 일이 우리 내외가 죽으면 평샤는 어떻게 하나 하는 거였는데, 자네가 평샤를 데려간 뒤로는 우리가 마음을 놓았다네.

거기에 아이까지 생겼다니 더 좋은 일이지.

평샤도 이제 죽은 뒤에 거두어줄 사람이 생겼으니 말일세."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

푸구이 : 주인공으로 지주 아들이였으나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자기가 소유했던 땅의 소작인으로 살아간다.

            모든 식구들이 죽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자전 : 푸구이의 아내로 성안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났으나 결혼 후 평사(딸)와 유칭(아들)을 두었으며 구루병에 걸려 거동이 힘들어지고

         평사와 유칭이 죽은 후 세상을 떠난다.

평샤 : 어릴적에 열이 오른 후 말을 못하게 되었고, 커서 머리가 기울어진 얼시와 결혼하였으나 아들 쿠건을 낳다가 사망함

유칭 : 학교 다니던 중 헌혈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피를 너무 뽑아서 죽게 됨

얼시 : 평샤가 죽은 후, 사고로 사망

쿠건 : 얼시가 사망한 후 푸구이와 같이 살다가 콩을 많이 먹어 체해서 사망

 

 

 

너무 바빠서 항상 쫓기는 것 같을 때

고민 때문에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불 때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아 힘들 때

미래가 캄캄하고 불안하기만 할 때

 

우리 잠시 멈추어요.

단 1분 만이라도 잠시 멈추어요.

삶을 현재에 정지시켜 놓고

잠시 깊게 숨을 내쉬어요.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지금 몸은 어떤 느낌인가요?

지금 하늘은 어떤 모습인가요?

 

멈추면 비로소 보여요.

 

내 생각이

내 아픔이

내 관계가

 

멈추면서 그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것들에 휩슬려 살아야 했던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잘 보여요.

 

그리고 멈추면 내 주변이 또 비로소 보여요.

나를 항상 도와주는 가족과 동료들의 얼굴들

매일 지나치지만 볼 수 없었던 거리의 풍경들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았던 상대방의 이야기들

 

내가 지금 하는 것을 잠시 쉬면

내 안팎의 전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요.

삶 속의 지혜는 이처럼 내가 뭔가를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멈춘 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들을

그냥 조용히 알아채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드러나는 것들을 계속해서 알아채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알게 돼요.

마음 안에는 항상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한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관조자가 또 있다는 사실을요.

태초의 고요로 마음 안을 그저 바라보는 분이 있다는 것을요.

있는 그대로를 보며 즉시 아는 그분이 곧 지혜라는 것을요.

 

그 관조자와 친해지세요.

그분이 내 마음속 어디에 계시고, 또 어떻게 생기셨는지,

평소에 알던 것을 가지고 상상하려 하지 말고

침묵 속에서 모든 생각이나 상을 다 내려놓고

기도와 명상과 참선을 통해 관조하는 그분을 보려고 하세요.

 

태초의 고요 속에서

얼굴 없는 그분의 얼굴을 봤을 때

이미 온전한 본래 나를 만난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당과 정부는 물론이고 많은 노동 단체와 시민 단체들은 한국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체계회된 논의를 충분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단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제시되는 구호 수준이상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한 법률, 제도, 정책 등에 관한 논의들은 대단히 미흡하다 -역자서문-

 

서비스 섹터가 많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지만, 그 일자리들이 모두 양질의 일자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가능한 한 우리는사람들이 가장 임금이 작은 일자리에 갇히지 않고, 상승 이동할 수 있는 깋쇠를 가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표는 전통적인 수동적 재분배보다는 훈련과 재훈련 사업과 같은 사회적 투자에 우선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배제는 빈곤만이 아니라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가게, 교통, 좋은 교육과 직업 기회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이웃들과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배제된 많은 사람들은 복지 의존성이라는 부정적인 순환 고리에 갇힌 복지국가 자체의 희생자들이다.

 

불평하는 사람은 어떤 클럽에도 가입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불평하는 마르크스주의 경향은 실제로 정통 민주주의 정치 영역에서 이룰 수 있는 어던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웃거나 무시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극좌의 고전적인 행동이며 극좌의 역사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좌파들도 그러한 견해에 동조를 한다.

다수의 좌파는 시민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시민들보다는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끈질기게 좌파의 사고를 지배해 온 권위주의적 특성이다.

 

이상주의는 외부에서 들여다 볼 때 더 쉽게 유지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좌파의 일부는 좌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보다 우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더 행복해 한다.

그것은 우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적이 더 쉽게 공격되고 이념적 통합성이 더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불평만 하는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굴복한 사람들은 더 온건한 좌파들의 기억상실증보다 더 심한 기억상실증을 지닌다.

그들은 1989년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냉전 이데올로기적 입장들이 아직도 유지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경제를 경영하는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죽었다.

 

모든 서구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정당에 대한 분명하고 지속적인 헌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는 좌파의 기본적인 가치인 연대적이고 포용적인 사회에 대한 믿음,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노력과 약자의 보호를 유지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는 강력한 공적 제도와 발전된 복지 국가와 결합된 적극적인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주장한다.

 

빈곤으로부터의 최선의 보호는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이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일에 강조점을 주었다.

 

많은 좌파들은 범죄를 불평등과 빈곤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범죄와 박탈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재산 범죄와 같은 어떤 범죄들은 풍요와 함께 증가한다.

 

좋은 사회는 국가, 경제, 시민 사회 혹은 시민 문화라는 3개의 주된 사회가 균형 상태에 있는 사회이다.

 

빈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박탈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박탈이 개인들의 자율성에 미치는 결과이다.

인생이 원하지 않는 빈곤으로 시들해지는 사람들은 청빈하게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핵심적인 것은 정확하게 자율 혹은 선택의 요소들이다.

 

기회의 평등에 대한 강조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재분배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부와 소득이 세대간에 재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 사는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이전시키기 때문에 한 세대에서 증가된 기회의 불평등은 다른 세대에서 기회의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

다른 것은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 사람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잘 살 때 뒤쳐진 사람들에게 사회적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충만한 삶을 살 기회가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찰의 원칙을 만들 수 있다.: 사회적 보호가 없이는 업적주의도 없다.

 

철도가 민간업자에게 넘겨질 수 있지만, 정부는 민간 철도회사가 공공재를 제공하면서 망하게 할 수 없다.

국가가 계속해서 위험을 짊어지고, 시민들과 주주들도 위험을 짊어질 것을 기대한다.

완전한 시장원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실질적인 경쟁은 핵심 철도 사업 부분에서는 불가능하다.

 

조셉 스티클리츠가 지적한 것처럼, 부유한 나라이거나 가난한 나라이거나 정부나 국가가 대단히 중앙 집중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나라들에서

효과적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사례는 없다.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경쟁은 서로 다른 것으로 또한 독립적인 것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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