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지위에 오르더라도 보통은 자신이 성취한 것을 느긋하게 음미하지 못한다.

주위에는 항상 더 많이 이룬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스무 번째 대학 동창회에 나갔을 때 동급생끼리 앉다 보니 나는 여자 동창 여덟 명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서로 얼굴만 알던 사이였지만 우리는 이내 대학 2년을 얼마나 우울하게 보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들 자신만 빼고 남들은 모두 잘 해나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속사정을 들으니 겉으로 보였던 것과 정반대였다.

우리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고백했다.

 

나이든 부부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은 언제나 깊은 울림을 준다.

편안한 애정과 조화를 이루는 그들의 걸음걸이, 침묵 가운게 깃든 다정한 몸짓에 나는 시선이 끌린다.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함께 있는 기쁨을 음미하며 몸짓으로 축하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온다 -수도사 데이미드 스테인들 라스트-

 

감사하는 마음은 비교에서 나온다.

감사란 여러가지 형태로 겪을 수 있는 운명을 자각할 때 생겨난다.

운명이 바뀌면 소중한 것들을 거의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의식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계속 관심을 두고 혜아려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수록 이러한 자각은 더욱 커진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부모가 중환자실로 실려간 후에야 그분들이 천하무적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난다.

그 순간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고작 몇 시간 혹은 몇 주밖에 그 관계가 지속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부모와 자식 모두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더 잘 본다.

 

겉으로 보이는 무모님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 보려면 죽음이라는 먼 거리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서 나서야 부모님이 결코 전능하지 않다는 것, 쉽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 역시 사랑받고 있다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자식들이 젊어서 많은 것을 시도하는 동안 부모님들은 많은 무력감을 느꼈다.

자식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타이르고, 자식들이 내비치는 건방진 태도에 할 말을 잃으면서도, 자식들이 위험한 일에 빠지면 오직 그 걱정만 하셨다.

 

부모님의 결점을 똑같은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보면서 우리 자신이 부족함도 너그러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시행착오를 했듯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없다.

실수를 바로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훌륭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슬픔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다만 슬픔을 견디는 요령이 생기고 그 리듬에 응하는 지혜를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크고 강렬한 슬픔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럴 때 실컷 울고 나면 슬픔이 물러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슬픔은 그렇게 물러나서 기다리고 있다가 필요할 때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만물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지니면 마음이 더욱 평온해지고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가는 죽게 될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의사가 숲에서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나 환자가 죽음에 위협을 받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곰에게 죽거나 종양으로 사망하거나 생명이 끝나는 것은 다 같은 자연의 순리다.

세상 아름다움과 자연 섭리에서 평화를 찾는 방법은 삶과 죽음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일도 포함된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지닌 한계를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가장 비겁한 부류일 수 있다.

자신의 본래 모습에 대한 비난을 돌아볼줄 아는 사람은 결국 뿌리 깊고 흔들리지 않는 자심감을 얻는다.

 

젊었을 때에는 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다니는 노부부를 보면 그들의 자유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후에는 자유에도 이중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유롭게 여행을 하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불안함을 감수해야 한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체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짧은 붓질이 어지럽게 난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과 같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데 급급하다 보면 인생에 대해 잘 모르고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의도적으로 물러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습관은 반드시 길러야 한다.

젊을 때는 경솔함에 지배되기 쉽고 자신의 생각을 즉각 토해내야 직성이 풀린다.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좋아 보이는 일을 마룬다는 것은 왠지 소심하거나 노인네처럼 고루하고 답답하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기본 태도다.

 

존경하는 사람들의 삶을 겉으로만 보면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그 자리로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대부분 사람이 계획보다는 느낌에 따라 많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경험으로 강해지고 싶다면 난관을 돌아가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

 

내면이 성장하면 삶은 더욱 속도를 내며 발전한다.

지금까지 걸어 온 좁은 길은 뛰어 넘게 된다. 우리가 하는 기대는 물론이고 기억에 관련해서도 더욱 유연해진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불안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를 정면 돌파하고 자신을 송두리채 흔들 열정을 지녀야 인생 후반에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을 바꾸는 통찰력을 윈한다고 해서 갑자기 불러낼 수는 없다.

통찰력은 수십 년간 노력하여 조금씩 커지면서 서서히 우리를 변화시킨다.

살다 보면 내면에서 여러가지 힘이 섞이고 커져서 어느 순간 놀라울 정도로 의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성장은 오랜 세월 짓눌러온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힘이다. 그만큼 파급력도 강하다. 그대는 그 일이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의아해질 뿐이다.

 

조용히 앉아 내면을 돌아보는 것은 덧없음에 대한 대담한 대답이며, 시간을 움켜쥐어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한 가지 소망을 이루고 나면 다른 소망도 이루고 싶어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이 느껴지면 늘 해오던 믿을만한 방법대신 모험을 꿈꾼다.

오늘내일로 미루던 상태를 끝내고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선언한다.

잠겨 있던 자신의 성향대로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하겠노라 준비하는 것이다.

 

위험은 삶의 필수 요소이다.

위험을 잘 이용하면 그만큼 성장하니까 말이다.

변화에는 두려움이 따르고, 나이가 들면 상실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점은 두려워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줄 아는 것은 아마도 최고의 능력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수명만큼 소통스러운 사건의 전후 관계를 살피는 범위가 넓어진다.

 

인생을 살다보면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점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언젠가 죽어가는 친구를 밤새 간병하다 잠깐 쉬려고 병원 밖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오후의 화려함에 놀랐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생업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걸으면서도 길 위로쏟아지는 햇살과 나의 건강하고 활기찬 보폭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상실감이 엄청난 활력소를 주기도 한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을 누리자꾸나.

친절하고 너그럽고 착하게 살자고. 이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 해야 할 기본이란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 조촐한 세상을 즐겨라.

좋은 음식과 따뜻한 미소와 꽃이 만발한 과일나무와 왈츠를.

 

 

 

 

우리의 두 눈은 얼굴에서 코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두 눈이 보는 것은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이러한 두 눈의 상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곳은 뇌 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양쪽 눈을 공간상에서 같은 지점을 향해 겨냥하면, 각 눈에서 얻어진 정보가 뇌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윤곽이 뚜렷하고, 상세하고, 풍부한 깊이감을 느끼면서 볼 수 있다.

 

어떤 사물을 보려면, 그 사물에 맞고 튕겨 나오는  광선이 눈에 들어가서 안구 뒤쪽까지 이동해 망막에 맺혀야 한다.

망막에서는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들이 빛을 감지해서 이 정보를 다른 망막 세포들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뇌의 더 깊은 곳에 있는 뉴런들로 전달한다.

 

우리가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뇌의 각 부분에 있는 회로는 평생에 걸쳐 변화한다.

뇌영상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과학을 통해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두 눈에서 오는 입력을 하나의 그림으로 융합하듯이, 수많은 감각기관에서 오는 모든 입력을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세계상으로 통합한다.

 

또한 신생아들은 다양한 거리에서 눈의 초점을 맞출 능력이 없다. 대신, 약 20센티미터 거리, 즉 자신을 돌보는 엄마의 얼굴을 보기에 알맞은 거리에서만 잘 본다.

하지만 신생아들에게도 타고난 지각 기술들이 있다. 태어난 지 9분밖에 안된 아기들도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영아들은 눈을 모아서 가까운 사물을 보기 시작하고, 다음으로 눈을 벌려서 먼 곳에 있는 사물을 본다.

대략 12주정도까지 이런 이향운동 능력이 발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좀 더 뚜렷하게 보기 위해 눈의 중심오목이 성숙되고,

먼 곳과 가가운 곳 둘 다를 보기 위해 수정체의 초점을 맞추는 능력이 발달한다.

 

아기들은 어느 쪽 입체도에 대해서도 선호를 보이지 않다가 약 4개월이 되자 3차원으로 보이는 입체도를 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눈을 모으는 능력, 두 상을 한데 융합하는 능력, 입체적 깊이를 이해하는 능력이 모두 대략 같은 시기에 발달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융합 능력이 떨어지고 사시가 되는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시는 분만 시에 외상을 입었거나, 갓난아기 때 고열이 났거나, 두 눈이 궤도에서 위치를 약간 벗어났거나, 여러 개의 눈 근육 강도에 약간의 불균형이 생겼거나,

시각 발달이 비정상적으로 진행된 결과일 수 있다.

 

입체시와 운동시차가 깊이를 지각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므로, 사시나 기타 양안시 장애가 있는 영아들은 빈역한 단서들을 가지고 깊이감과 공간감을 발달시킨다.

이 아이들은 명암이나 원근과 같은, 깊이에 대한 '단안 단서'들에 많이 의존한다. 그 결과 많은 내사시 아기들이 장남감 쥐기나 젖병 붙들기와 같은 행동을 숙달하는 데

더디고,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는 좀 더 자란 아이들은 심지어 걸음걸이와 자세에서 이상을 보일 수 도 있다.

유아기 때 입체시가 없어지면, 결국 극도로 거리 감각이나 공간 감각이 약해진다.

물론 나를 맨 처음 파사넬라 선생에게 데려갔을 때 나의 부모님은 이런 내용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부모님이 아는 것이라고는 당신들에게 도무지 똗바로 머물지 않는 몹시 신경질적인 두 살짜리 애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우리는 글자를 볼 때 시력검사에서처럼 한쪽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보므로, 눈을 조화롭게 움직여 단어들의줄을 건너다녀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어들로부터 의미를 추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 전부가 좋은 시각과 연관되고 우리 학습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 대부분이 글을 읽을 때, 양 눙이 언제나 지면에서 정확하게 똑같은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읽는 시간의 반절 정도는 오른쪽 눈은 왼쪽 눈에 보이는 글자에서 오른쪽으로 한두 글자 옆을 겨냥하고 있다.

이것이 읽는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두 눈에서 오는 상들이 뇌에서 융합되기 때문이다. 두 눈에서 오는 정보가 협력해서 뇌에서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학습장애로 오진되었으나, 실은 시각적 장애가 문제였던 아이들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시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책을 읽을 때 단어들이 지면에서 뛰어 돌아다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글자들이 둘로 보이거나 희미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확신을 갑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능력은 보는 능력과 긴밀하게 묶여 있다.

우리에게 나무를 오르기 위한 팔다리와 사물을 조작하기 위한 손가락이 없다면, 그토록 복잡한 시각계나 뇌는 결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바다 사촌인 피낭동물도 유생일 때는 정착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엄쳐서 다니기에 눈이 있다.

일단 알맞은 해저 바위를 만나면, 그 유생은 자기 몸을 바위에 붙이고 활동적으로 헤엄쳐 다니던 놈에서 가만히 먹이를 걸러먹는 놈으로 변신한다.

이 시점에 유생의 눈과 뇌는 퇴화한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훌륭한 시각계와 뇌는 거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사물을 잡기 위해 목표물을 향해 먼저 눈을 돌린 다음,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팔을 뻗는다.

눈의 움직임이 먼저 예측을 한 다음 머리, 몸 팔다리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것이다.

 

우리가 몸보다 눈을 먼저 움직이는 이유는 사물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보려면 그것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세계를 감각으로 느낀 다음 반응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과 운동은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으로 느끼는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는 세계를 자세히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움직이려는 행위와 움직임 그 자체가 우리의 눈, 귀, 손가락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지각과 운동은 서로 끊임없이 쌍방향으로 대화하는 가운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깨달음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매우 단순하지만 그러면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우리의 머리를 때린다.

 

백미러를 조정하려고 위를 쳐다보자, 앞 유리창에서 거울이 나를 향해 튀어 나와 앞에 떠 있었다.

나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내내 간헐적으로 또 순간적으로 전혀 예기치 않게 입체시를 보았고, 이는 절대 경이와 기쁨의 순간들을 가져다주었다.

가장 평범한 사물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커다란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나를 향해 뻗어 나왔으며, 수도꼭지의 곡선은 그 어는 것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사물들이 나를 향해 곧장 튀어나오는 느낌은 새롭고 신기했다.

 

3차원 사물들이 상을 던지는 우리의 망막은 세포들이 평평한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깊이 단서들의 조합을 이용해서 이 2차원 상들로부터 3차원 세계상을 구축한다.

입체시를 가진 우리는 두 망막에 맺히는 상의 위치를 비교하여 생생한 3차원 감을 구축한다

 

예를 들어, 사시인 아기는 처음 눈이 어긋난 지 3개월 안에 수술을 해서 안정된 방식으로 눈을 똑바로 정렬한다면, 가장 효과가 높을 것이다.

 

사시인 아기가 두 살 이후에 수술을 받을 경우, 입체시가  발달하는 아기는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영아 사시 환자들의 38~50퍼센트와 한 살 이후에 사시가 된 환자들의 70퍼센트가 검안 시훈련치료를 통해 입체시를 획득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과 어른들을 치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단순히 지시를 따르기만 해도 크게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어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를 주의깊게 생각할 때 가장 효과가 좋다.

당신의 습관과 당신이 늘 세계와 협상해 온 방식을 바꾸려면 엄청난 각성과 집중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이런 강도 높은 집중을 계속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우리가 세계에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얻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법을 알게 되면, 새로운 습관이 낡은 습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결정적 시기는 행동과 관련된 자극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강한 자극에 반응해서 뇌가 발달하는 발달단계를 포괄한다.

매우 어린 신경계는 어떤 자극이든간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더 선택적이 된다.

따라서 성인의 뇌에서 재배선이 일어나려면 능동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성서학문과 성서학문을 유도해내고 또 필연적으로 성서학문의 꼴을 형성시킨 정치적 맥락의 연결고리들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대개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보다는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필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할 것이며, 그들은 그러한 분석을 정치적인 동기를 가진 것으로, 또는 역사학에서의 해체나 수정주의같은 일시적인 유행현상 정도로,

또는 성성연구의 객관성에 대한 포력적인 공격으로 비난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예들은 과거를 구성하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라는 사실, 특히 이스라엘의 과거를 구성하는 일이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많은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근대학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치.종교.이데올로기.사회가 결정적인 모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모든 과거의 구성은 현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자주 인용되는 격언은 고대로부터 우리에게 전수되어 내려온 과거의 표상에 적용시킬 수 있듯이 오늘날의 역사가들의 저작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구약성서는 하나의 역사택이다"라는 폰 라트의 선언은 이 분야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탐구하거나 신학부.신학대학.신학교, 심지어는 종교학과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원초적인 본능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표상 속에서 고대사회와 근대사회의 차이가 표출되는 방식은 통상 '신화'로 보느냐 '역사'로 보느냐 하는 이분법에 의해 좌우된다.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역사가가 아무리 자기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편파적인 텍스트를 가지고 작업을 할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편파적인 텍스트를 생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지각이 중요하고, 과거에 대한 지각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우리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땅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땅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반트' '중동' '근동'같은 명칭들은 그 세계에 대한 유럽중심적 개념을 드러낸다.

앤더슨은 지도가 유럽의 식민지 영토를 개념화하고 통제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성서연구는 일종의 강탈행위에 연루된다. 그러한 행위는 시온주의자들이 그 당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을 몰아냄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동반자를 얻은 셈이다.

역사없는 민족, 또는 성서연구의 담론에 의해서 역사를 박탈당한 민족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아무 상관도 없게 되며, 결국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현재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 즉 이스라엘이라는 근대국가가 '비어 있는' '불모의' 땅을 일구어 꽃을 피웠다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이해와 복잡하게 엮여 있다.

 

언어의 선택, 즉 그땅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권력 조작의 한 부분이다. 그 조작 속에서, 당에 대한 관계가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이 모델은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은 강탈행위가 아니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비어 있는 땅, 또는 적어도 거주자가 없는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주장한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인이 난폭한 민족이었고, 존재하고자 하는 원시적인 에너지와 냉혹한 의지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일신교 신앙의 미래를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가나안인을 죽인 것은 두 민족의 완벽한 혼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했다면 필연적으로 야훼 신앙의 기준들은 회북이 불가능할 정도롤 저급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신제적 성격의 의례, 뱀과 육감적인 나신으로 상징되는 다산 숭배, 그리고 천박한 신화를 가진 가나안인은, 목축 생활의 소박함과 정결함, 고상한 일신교 신앙, 엄한 윤리규범을 가진 이스라엘인으로 대체되었다."(Albright 1957:280-1)

20세기 성서학의 위대한 우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팔레스타인 토착주민에 대한 살해를 이렇게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뻔번스러운 인종주의를 토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내가 아는 한 성서학자들이 올브라이트의 저작을 평가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을 뿐더러 본평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나안인이 비도덕적이고 육욕적이라는 올브라이트의 묘사는 '타자'를 합리적 지성을 갖춘 서양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적 표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 행전" 프롤로그에서 그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위해서 땅을 확보하게 된 가나안 정복은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해석되었다.

그 땅은 이스라엘의 다양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일종의 자연권처럼 귀속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가기서는 하느님과 관련하여 재산의 의미와 의무의 의미라는 특수한 이해가 생겨났다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땅은 미래에 없어질 수도 있다"(Wright 1960:8-9)

그 땅에 대한 토착 팔레스타인 주민의 권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권리, 그들의 못소리, 그들의 역사는 고대 이스라엘을 냉정하게 탐구하는 가운데 배제되고 있다. 정복은 없고 선물만 있으며, 그것은 강탈이 아니라 하느님이 양도한 재산이다.

 

성서연구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학자들의 비전을 형성시켰던 갖가지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요인들에 크게 영향을 받아 다양한 판본의 과거를 구성해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지리학을 발명해 왔다는 사실이 이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4대 강국은 시온주의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옳든 그르든 간에, 선하든 악하든 간에 시온주의는 고대의 그 땅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70만 아랍인의 욕망과 편견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오랜 전통에, 현재의 요구에, 미래의 희망에 뿌리박고 있다."(Khalidi 1971:208)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특히 한 국가의 창조를 다루는 역사에 관한 한 진실이다.

장소에 대한 집착, 즉 그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의 주장은 어떤 반대요구도 배제한다. 성서연구는 세계적 강국의 반영로 격상된 이스라엘 국가가 지배하는 과거를 상상하면서 그 과거에 대해 그 이외의 가능한 구성을 배제함으로써 '역사적 권리' 주장의 정당성을 힘들이지 않고 거들어 준다.

 

이스라엘의 왕정이라는 신기루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실체로서, 과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현재를 정당화하여,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규정하고 지배해 왔다.

 

이스라엘은 약간 문명화되었거나 알파벳을 익힌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형식을 갖춘' 역사저작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 덕분이라는 깜짝 놀랄 주장을 독자들은 만나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문명의 목표가 국가 만들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다른 고대 근동 문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문화이다.

우리는 이 다른 문명들 속에 거대한 기념비적 유물들, 시각예술 그리고 폭넓은 문학작품을 남긴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처럼 강을 끼고 발달한 대문명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뇌가 몹시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처리하고자 할때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사람의 뇌나 평범한 여든 살 노인의 뇌나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은 뇌의 '전전두피질'이라는 부위가 관장한다.

피질이란 뇌의 바깥 부분을 덮는 물질, 즉 외피를 가리킨다. 두께는 0.25센티미터로 껍데기처럼 뇌를 감싸고 있다.

이것은 이마 바로 뒤에 있는데, 전체 피질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진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발달한 뇌의 주요 부위인 이것의 부피는 기껏해야 나머지 뇌 부분의 4~5퍼센트 정도다.

전전두피질이 작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나 에스프레소처럼 콤팩트하면서도 큰 가치를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전두피질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런 목표도 세울 수 없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에 가서  우유 한 병을 사야겠다는 단순한 계획조차도 세울 수 없게 된다......

어디 그뿐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자동차에 치인다 해도 병원에 가서 처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창의적인 사고 역시 불가능해진다.

설령 누군가에 의해 병원에 옮겨져 운 좋게 치료를 받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해도 가족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얘기해줄 수 없게 된다.

전전두피질이란 한마디로, 의식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생물학적 공간이다.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조종되듯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통해서 사고하면서 문제와 장애물을 헤쳐나가는 뇌의 핵심이다..................

안스텐 박사는 전전두피질에 우리가 어느 시점에 품었던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

외부 자극이나 특정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 저장되는 창고가 바로 전전두피질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안스텐 박사는 전전두피질을 통해 우리 스스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해', '결정', '환기', '기억', '억제'라는 이 다섯가지 기능이 의식적인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기능들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계획과 문제 해결, 의사 소통의 다양한 과제를 수행한다

 

복잡한 개념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머릿속에서 처리하기가 훨씬 쉽다.

 

의식적인 사고 과정은 한 번에 한 가지씩 진행돼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춘기를 지나면서 점점 더 자신의 내면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된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 느닷없이 툭 떠오르기도 하고 강아지가 여기저기 킁킁대고 돌아다니듯이 자신의 마음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주의력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이유는 신경계가 매 순간 잠시라도 쉬지 않고 뇌에 만들어진 수십억 개의 연결회로를 처리하고, 재배치하고, 재연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문용어로는 '환경적 신경 활동'이라고 한다.

쉬고 있는 뇌도 전기 활동을 관찰해보면 마치 곳곳에서 1초에 몇 차례씩 전기 폭풍의 번개가 치는 지구를 우주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사고와 이미지가 마치 물결 치듯이 의식이라는 수면으로 떠오른다.

 

정신 분열증은 사람들이 억누르거나 손쉽게 무시해버리는, 즉 당장의 과제와 상관없는 신호들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을 때 나타난다.

 

자기 조절이란 어떤 의미에서 한정된 자원이다.

실험결과, 자기 조절력을 한 번 보여준 사람은 그 이후의 과제에서 그 능력이 감소하고 말았다.

그는 뭔가를 자제할 때마다 그다음 충동은 더욱 참기어렵다고 주장한다.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매력적인 여성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는 것처럼 당신이 뭔가를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이미 당신의 뇌가 수백만 개의 회로를

연결해 이런 결정을 내린 직후다. 이 시점 직후의 0.2초라는 시간은 행동을 취할 준비는 돼 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이 0.2초의 간격도 특정한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는 방해가 될지 모르는 뭔가를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내하면 당신은 뇌가 보내온 신호들 사이에 끼어들 능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온각 신경활동을 수행하면서 뇌는 동시에 온갖 미친 아이디어를 마음으로 보낸다. 하지만 당신은 어떤 충동을 실행에 옮길지 선택하는 능력, 즉 '거부권'이 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과정인 뇌의 신호와 욕망 그리고 행동을 따로 인식하지 않은 채 뇌에서 신호가 들어오는 즉시 행동에 옮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동물적인 행동이다

 

일단 행동에 옮기고 나면 강력한 고리가 활성화되므로 그 행동을 멈추기가 더 어려워진다.

 

모터와 같이 정신적인 행위 역시도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체적인 추진력이 만들어진다.

의자에서 일어나기로 결심하면 그에 필요한 근육을 미록해 이 운동행위와 관련있는 부위가 활성화된다.....

일단 이 과정이 시작된 후에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면

처음에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그러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보다 훨씬 막강한 거부권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방해요소를 억제하려면 충동을 행동에 옮기기 전에 그 행동을 일찍, 재빨리, 자주 거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스트레스가 없어야 과제를 더 잘 수행할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침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데만 해도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를 '긍정적 스트레스'라고 한다. 긍정적인 스트레스는 주의력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다시 말해 기저핵이 당신을 조종한다......

여름휴가 도중에 잡혀 있는 전화회의를 잊어버리기 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요한 업무를 기억해야 할 능력은 당신이 다사로운 햇살과 칵테일 한 잔을 즐기는 동안 스르르 녹아버린다. 긴장을 너무 풀어버린 탓에 말이다.

 

두려움과 위급성은 집중도를 높이는 데 때때로 확실히 도움이 된다.

 

머리가 복잡해서 잘 돌아가지 않으면 아이디어를 종이에 옮겨 보라.

복잡한 아이디어를 머리에서 그집어내면 한결 생각하기가 수월해진다.

즉 당신의 무대가 그만큼의 정보를 수용하지 않아도 되므로 전체적인 활동량이 줄어들 것이다.

 

행복할수록 통찰력을 더 잘 발휘하는 반면, 불안감이 높아질수록 그 반대가 된다. 이는 미세한 신호를 인지하는 능력과도 관계가 된다.

이는 미세한 신호를 포착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소리를 잘 들어야 하는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운 것이다.

 

통찰력이 나오는 순간에는 뇌에서 감마대가 폭발하듯 증가한다. 감마파는 가장 빠른 뇌파로 한 무리의 뉴런이 초당 40회씩 일제히 켜진다.

감마파는 뇌의 여러 부위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깊은 명상에 잠겨 잇으면 감마파가 많이 나온다.

학습장애가 있는 사람은 감마파가 정상인보다 더 적으며, 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예 감마파가 나오지 않는다.

 

마음 챙기기란 우리가 반응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여백이 생겨서 다양한 대안을 살피고 나서 그중 가장 적당한 것을 고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 균형이 있고 정교하게 집중하면 이전에는 몰랐던 경로의 차이를 파악해서 조절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집중하면 뇌의 기능과 나아가 구조도 바꿀 수 있다."

 

누군가를 적으로 여기면 지능마저 떨어질 수 있다.

누군가를 적으로 간주하면 그 사람의 아이디어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런 태도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까지도 말이다.

 

자신과 싸움을 하면 남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지위감이 올라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남과 당신의 발전이나 위기를 고류하면 관계감도 높아질 것이다.

 

통찰력은 세부 사항에 집착하지 말고 더 포괄적이고 폭넓게 생각할 때 튀어나온다. 뇌가 통찰력을 발휘하려면 고요한 상태여야 한다.

즉, 전기적 활동이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미세한 신호를 잘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착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다. 불안하면 사람들의 시야는 좁아지고 뇌의 잡음이 더 심해진다.

그러므로 불안을 줄이고 긍정적인 감정을 늘리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다시 말해 비호감에서 호감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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