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 신경을 썼던 것은 다만 세 가지 기본 상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첫째, 작품 크기의 대각선 또는 그 1.5배만큼 떨어져서 본 것, 둘째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스다듬듯이 바라본 것,

셋째,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 본 것 뿐입니다.

 

과학자들도 사물을 보는 것은 눈이지만 그 눈은 오직 우리의 마음 길이 가는 곳만 신경을 집중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옛 그림을 진짜로 잘 보려면 옛 사람의 마음으로 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려진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폭 속에는 여러 형상이 갖가지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요컨대 이 모든 것 또한 한 사람, 즉 화가의 마음이 자연과 인생에 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묘사해 낸 것에 지니자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회화 감상이란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담아 그려 낸 그림을,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으로 읽어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성어중誠於中이면 형어외刑於外라'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은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도 있는데 '소위성기의자所謂誠基意者는 무자기야毋自欺也'라고 합니다.

즉 '그 뜻을 성실하게 갖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가장 중시했던 글귀가 바로 이 '무자기毋自欺' 즉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문화는 꽃이다.

사상의 뿌리, 정치, 제도의 줄기, 경제, 사회의 건강한 수액이 가지 끝까지 고루 펼쳐진 다음에야 비로소 문화라는 귀한 꽃은 핀다.

지금 한국 문화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듯 싶으나 내실을 살펴보면 주체성의 혼란, 방법론의 혼미로 우리 정서와 유리된 거친 들판의 가시밭길을 헤매고 있다.

法古創新이라야 한다.

문화는 선인들의 과거를 성실하게 배워 발전적 미래를 이어가는 재창조 과정이다.

문화의 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김홍도 시대에 못지 않은 훌륭한 사회를 이룰 때에만 피어난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워져야 한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사마천의 사기열전2 읽기를 마쳤다.

그 양에 압도되고 거기에 나오는 사람의 수는 어찌도 많던지....

거기다가 역사책 보듯이 누가 뭘했다는 열거식의 내용에 또 한번 괴로워했다.

정말 고생 좀 했다. 단숨에 읽어낼 수 없어서 몇 번을 나누어 읽어야했다.

어떤 때는 50페이지를 읽고나서 머리가 하애지면 몇 주간은 눈조차 가지 않았고, 그렇게 꾸역꾸역 시간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했다.

간간이 다른 책들을 읽으며 머리를 추스리고 진행되다 보니, 3,4개월 정도가 소모되어서야 이 책읽기는 끝이 났다.

세상에 오래된 책은 한 번 쯤은 읽어 보아야 한다.

그 책속에서 사람사는 줄기를 찾아낼 수 있다. 

거기서 얻어진 것을 통해 안정된 가치와 방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멈추지 말아야할 행위 중의 하나가 독서이다.

독서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감각을 더욱 조밀하게 해준다.

삶에서 발생하는 내용은 달라지지 않지만, 삶을 더욱 풍성하게 느낀다는 것....

느끼고 음미하는 정도가 다르면 인생의 깊이도 달라진다.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기 죽음을 귀중히 여긴다.

저 비첩이나 천한 사람이 분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다.

 

한번 죽고 한번 사는데 사귀는 정을 알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으로써 사귀는 모습을 알며, 한번 귀했다가 한번 천해짐으로써 사귀는 참된 정을 알게 된다

 

상덕은 덕을 의식하지 않음으로 덕을 지니게 되고,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덕을 지니지 못한다.

법령이 늘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진실로 옳구나!. 이러한 말들이여.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백성의 맑고 탁함을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옛날 진에는 천하의 법망이 치밀했으나,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나 극도에 이르러 법에 저촉시키려는 관리와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백성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관리들은 불을 그대로 둔 채 끊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힘써 농사짓는 것이 풍년을 만나는 것만 못하고, 정성껏 섬기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추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다. 여자만이 미색으로 잘 보이는 게 아니라 벼슬살이하는 관리도 이렇게 하는 일이 있었다.

 

"예기"는 인간의 행동을 절도있게 하고, "약경"은 인간의 마음을 조화롭게 하며, "서경"은 사실을 말하고, "시경"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하며,

"역경"은 천지의 기묘한 변화를 알 수 있게 해 주고, "춘추"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큰 뜻을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천하에 재해가 없으면 비록 성인이 있다 해도 그 재능을 펼 데가 없으며, 윗 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고 뜻을 모으면 비록 어진 사람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 없다'라고 했소. 그래서 '때가 다르면 일도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오. 그렇다고는 하나 어떻게 제 몸을 닦는 일에 힘쓰지 않겠소? "시경"에서도 이렇게 노래했소.

궁궐에서 종을 치면 소리는 밖까지 들린다.

깊은 못에서 학이 울면 소리는 하늘까지 들린다.

 

말을 감정할 때에는 여윈 것 때문에 실수하고, 선비를 감정할 때에는 가난 때문에 잘못 본다.

 

아름다운 말은 남에게 팔 만하고 고귀한 행실은 자기를 남보다 빼어나게 한다.

군자는 서로 좋은 말을 보내고 소인은 서로 재물을 보낸다.

 

백성이란 일이 이루어진 뒤에 함께 누릴 수 있을 뿐 함께 일을 시작할 생각은 못한다.

 

도란 높을수록 더욱 편하지만 권세는 높을수록 더욱 위태롭다. 혁혁한 권세를 가진 자리에 있으면 몸을 망치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점을 쳐서 정확하지 않은 일이 있어도 복채를 빼앗기는 일은 없지만, 임금을 위해 꾀한 일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몸둘 곳이 없다.

서로간의 거리는 멀어 머리에 쓰는 관과 발에 신는 신의 차이만큼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무명은 만물의 처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늘과 땅은 멃고 크며 만물은 너무 많아 안전한 곳도 있고 위험한 곳도 있어 어디에 있어야 할 지 모른다.

 

한 집안을 이끌어 가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볼 수 있고, 자식들이 있을 곳에 있으면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닥친 때가 불리하면 어찌 그 현명함을 쓸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어질어 바뀌지 않는 법칙이 있지만, 선비도 가끔은 어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밝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밝은 귀에도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은 아무리 현명해도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면서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릴 수는 없다.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또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재산을 가지고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

 

대체로 일반 백성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해주고, 만 배 많으면 그 하인이 된다.

 

 

너를 죽일 수 없는 것이 결국 너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

 

어째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사소해 보이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커다란 마음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은 갑작스럽게 큰 고통에 직면했을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결국에는 하나로 수렴되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작별 인사를 나눌 틈조차 주지 않을 만큼 박정하다면, 지금 급히 만나야 할 얼굴 하나가 있었다.

나는 울면서 남편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기 데려다 줘. 보고 싶어. 우리 아기 ......"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라는 것을.

 

피곤하면 어디든 앉아 쉬고 가는 게 인생이라는 지혜를 조금은 깨달은 것도 같은 나이 서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줄도 아는 나이.

 

시련을 극복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도모했던 일들이 무너져 내리거나 뜻하지 않은 운명과 마주쳤을 때,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단 한마디를 떠올려보라. 그 한마디가 삶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늘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똑똑한 사람의 오류가 뭔지 안다. 그래서 착실하고 무던한 바보가 되기로 했다....

이제야 '나는 잘 모르겠어'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자유를 가져다주는지 알 것 같다. 병원에 누워 또 한 걸음 나아간 나의 각성.

'맞아.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곳곳에 빈틈이 있어야 하는거야.'........ 빈틈은 지친 마음이 들어가서 쉴 자리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만 운명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나는 내 꿈을 이루고 나면 사랑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질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기까지는 엄마 품 같은 햇빛이 늘 필요한 거였다. 내가 틀렸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맞는 말이었다. 믿음이란 오로지 순도 100퍼센트일 뿐이다.

조금 덜 믿거나 아주 조금만 의심해도 사라지는 게 믿음이기에 그저 '믿느냐, 안 믿느냐'뿐인 것이다.

 

세상에는 끝끝내 감추고만 싶은 진심도 있는 것이다. 특히 남자들의 진심은....

이제는 안다. 남자란 존재가 그런 걸 겸염쩍고 쑥스러워한다는 것을.

 

사람과 죽음이 엇갈리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순간순간 어려운 선택을 하다 보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경계가 평소와는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게 되면 누구나 아껴둔 식량처럼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하나씩 하나씩 음미하게 된다.

그런 음미를 통해 추억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삶의 또 다른 지혜를 얻는 것이다.

 

섬에 있는 시댁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거실 소파에서나, 침대에서나 언제든 바다의 아름다운 변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반면 주방과 서재는 산 쪽을 접하고 있어서 창문만 열면 늘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이나 두려움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어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창피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두려움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성공'을 위해 써야 한다고 믿는다면 누구든 한 번쯤은 그런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다. 돌이켜보면 한 권의 책에 온전히 하루를 바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을 찾기도 쉽지 않은데, 한참 동안 그걸 완전히 잊은 채 살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무서운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지나왔다.

나는 위인이나 성자는 아니지만, 이제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 것 같다.

삶이라는 길에는 무수한 아픔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그 시련들은 삶에 대한 대가로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만 하는 것들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사람마다 각각의 할당량에 차이가 있을 뿐.

눈 앞의 어려움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대처 방법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한사코 회피하려고 한다면 시련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반면 그것을 온전히 치러야 할 삶의 대가로 받아들인다면, 시련이 아니라 일종의 시험이 된다.

나는 오늘도 아프고 내일도 아플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지만 뚜렷한 신념이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대부분 자신이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기회를 넘겨버리고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만큼 각오가 확고하다면, 어느 누구도 그걸 말릴 수는 없다.

 

인생은 혼자 외로운 길을 걸어가도록 정해져 있으며, 누구나 어둠 속에서 고독한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인 것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진정 용기있는 사람은 비참한 인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외면하지 않는다."

슬프지만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제는 알 것 같다. 인생은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지만 또한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비참하다. 누구나 화려한 시기를 거쳐 언젠가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대개의 경우 전성기는 기쁘지만, 종말은 슬프다.

 

한때는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고, 그게 너무 억울해서 세상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세상에는 나보다 더 가슴이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좋은 삶이었고, 이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후회없이, 화내지 않고 떠날 수 있어 참 좋다."

 

"어떤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속에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난다는 것을."

 

 

 

책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공부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부를 하려면 생각을 해야한다. 생각을 하려면 언어를 거쳐야 한다. 언어는 생각의 통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 공부는 문장을 얻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라는 문장을 얻으면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면을 살펴보라'는 문장을 얻으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게 된다.

마찬가지 이치로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려면 다른 문장을 얻어야 한다. 다른 문장을 얻으려면 인문학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현상 속에 숨겨진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시야가 확대되고 생활의 관점을 바꿀 수 있다. 태도와 방식이 달라진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려면 주기적으로 열정을 되살려주는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보다 숭고한 비젼을 볼 수 있게 하며,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을 끌어올려 준다.

 

사람은 머리속으로만 생각한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메모다.

메모는 기억을 보장해 주고 지식을 체계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테는 "배운 것을 기록해놓지 않으면 지식은 있을 수 없다"라는 말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르게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철학의 힘이다.

 

인간은 이유없이 이 땅에 던져진 존재이기에 본질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은 규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래가 완전히 열려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기투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 미래의 자신을 위해 자신을 던져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은 자기계발을 통해 민들어지는 존재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묵직함이란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말한다. 단순한 일상도 철학적 사유를 담으려 하고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

묵직한 인생은 배울 것이 있고 가치있게 보인다. 하지만 재미있지는 않다.

가벼운 삶은 진지함이 좀 부족해 보인다. 인생을 즉흥적이고 순간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크게 배울 점은 없다. 하지만 무척 즐겁고 유쾌하다. 인생을 즐길 줄 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훌륭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없어도, 도덕적이지 않아도, 다소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느꼈다.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가끔은 그것이 더 인간적일 수 있단 것을 알게 되자 좀 가벼워졌다.

 

지금 이십 대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질테니까.

하지만 이쪽을 선택하든 저쪽을 택하든 어떻게든 인생은 살아질 것이고 마흔 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삶의 길이 달라지는 중요한 결정들이었지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중요한 결정처럼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무겁게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두 번 살 수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으로 끝이다. 두 선택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추구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뿐.

그런 점에서 인생을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알 수도 없는 선택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될 일이다.

그편이 인생을 즐기는 적절한 태도라고 믿는다.

 

그의 말 속에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인간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영원히 사는 것은 현재의 가치를 무너뜨린다. 영원한 삶에게 지금은 소중하지 않다. 당연히 삶 전체도 소중하지 않다.

언젠가 죽을 운명이므로 지금이 소중하고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우리의 마음은 사물을 보는 방법을 결정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보고자 하는 면만을 보게 한다.

깨달음이란 이런 마음의 작용을 아는 것이고, 수행이란 그런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은 부정적인 마음을 전제로 한다. 부정이 없다면 긍정도 있을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어떤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의도적으로 소외시켰던 부정적인 마음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를 일이다. 더 좋은 것을 가지는 것보다 아예 가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이 선이 추구하는 삶이다.

 

진리란 그런 것이다.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진리다. 인간과 그 삶 또한 그 진리 속에 있다.

 

욕망의 크기가 클수록 삶은 힘겨워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은 우리에게 늘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매일 생각하면서 올바른 행동과 태도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다.

삶이 나아게 던지는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과제를 수행하며 책임을 떠맡는 것이 인생이다.

 

늘 인생이 나에게 해줄 것만 기대하던 유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인생이 요구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갈등과 번민은 사라지고 안개가 걷힌 듯 맑고 큰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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