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제일 중요하다.

 

삶은 돌연한 사건과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우리는 훗날 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그 모든 일들이 특별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데 겸손보다 좋은 것은 없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라는 것을.

 

우리 각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극히 개인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얻는 영광 대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성취를 통해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즐거움이 점차 자신만을 위해 연주하는 즐거움으로 치환된 것이다.

 

홀로 파리에서 지내고 있는 말테는

한 상점의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다가 한가롭게 앉아 천하태평하게 무의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말테는 이런 인물들에 매료된다.

"아무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얼핏 보면 장사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안을 들여다보니 주인은 앉아서, 그냥 앉아서 만사태평으로 책을 읽고 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장사 따위는 개의치 않으면서....

아, 저렇게 살아도 만족할 수만 있다면 이따금 쇼윈도에 물건이 잔뜩 진열된 가게 하나를 사서

이십 년 동안 개 한 마리와 함께 거기에 앉아 있고 싶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취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비범함이다.

우리가 맺는 관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관습, 연대 역시 관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성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철르 주거나 용기를 주는 것들,

말하자면 다른 이들의 누에는 보이지 않는 사소하고 평범한 사건들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한다.

우리의 개성 또한 우리의 상상력으로 실행되는 이미지의 수집과 조합의 산물이다.

 

지루하고 단순한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의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고,

그는 그저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며,

이는 그의 기쁨과 성취감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대개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걸어온 길만이 우리를 규정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진짜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는 데 급급했어요.

 

본능적인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화려한 대저택을 소유하면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진실은 본질적이든 피상적이든 항상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한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타인을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으면 자신의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소설 속에서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소설에는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고, 그저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며,

이는 기쁨과 성취감의 원천이 된다.

 

인간의 본성은 실패보다 승리를 더 견디기 어려워 한다.

심지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심각한 패배를 겪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

자작나무의 어린 새순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렇게 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나'를 원망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비교하며 이루지 못한 것에 더 애석한 감정을 드러낸다.

필립스는 살아보지 못한 삶이 왜 우리를 피해가며, 그 삶은 왜 절대로 실현되지 않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존재하지 않는 삶,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나'는 왜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

 

실패 역시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자기 과시와 덧없는 영광을 포기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했고,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깨달음을 주는 글이 많다.

모두에게 일독하기를 권한다.

 

"우리는 언제나 살아갈 준비를 할 뿐 정작 삶을 살지는 않는다."

 

행복에는 절대 극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행복의 극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환희의 극치를 찾아 해매는 이들에게는 기운이 빠지는 소리다. 모든 게 덧없어질 테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대부분은 인위적 현실보다 일상의 현실을 선호한다.

 

삶은 진자운동을 한다.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저멀리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인생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해매고 있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다."

소설 <이방인>에서 카뮈가 이렇게 말한 건 바로 이 점을 다른 각도에서 언급한 것이다.

삶의 의미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을 생각함으로써 스스로가 만든 삶의 의미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우리는 우선 존재하고 그다음에 자신을 창조한다.

이는 내 토스터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한정된 이 세상에서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기꺼이 목숨을 바칠 대상이 무엇인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창조할 책임을 방기하고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인데 내 운명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탓할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서로를 충분히 믿기 때문에 함께 어리석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배꼽 빠지게 웃어대다 보면 잠시 기간이 멈추고 즐거움으로 무아지경이 된 상태에서

'영원한 현재'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혼자 있으면 평화로움과 더불어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가 많다.

여름날 작은 집 뒤쪽에 훌쩍 자라난 풀과 야생화들을 눈앞에 두고 홀로 앉아 있노라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마저도 떠들썩한 잔치처럼 느껴진다.

 

어떤 깊은 생각도, 심지어 어떤 얕은 생각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노라고.

 

나 자신에 대해 축하할 일이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며 그 축복은 보통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속에서는 그 느낌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고독만큼 좋은 동반자를 찾아낸 적이 없다."

 

사람들 사이를 옮겨다니며 상냥하고 즐겁게 수다를 떨지만 개인적이고 심각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사교 모임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모임에서는 누군가와 친밀해질 일말의 가능성조차 찾을 수 없다.

 

"나는 고독 속에서 산다.

젊었을 때는 고통스러웠으나 나이 들어서는 달콤하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오간다. 그뿐이다. 시작 같은 건 없다.

하루하루는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합쳐진다. 지루하게도 길고 단조롭게.

 

우리 모두는 이 작은 세상 안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갈망하지만 얻을 수는 없다.

 

찾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일상성에 잠겨버리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상성'은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이 개념은 날마다 반복되는 행동과 역할에 매몰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삶에서 겪는 상실은 끔찍하다.

그러나 어쨌든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한다.

 

가장 암울한 순간에 놓여 있다 해도 나의 딸이나 손녀딸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큰 의미다.

그렇게 활력 넘치고 아름다운 생명이 어떻게 사소하고 별 것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지켜온 '완강한 의심'을 누그러뜨릴 준비가 언제나 돼 있다.

 

바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영원성이다.

모든 기본 구성요소가 빅뱅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왔으며 시간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우주가 지금까지 겪어온 변화, 작게 보면 지구에서의 인류역사와 진화는 이 요소들을 각 시기마다

끊임없이 다르게 조합하고 재조합한 결과일 뿐이다.

이는 '내가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경이로운 한 방을 날린다.

이 영원성의 일부라는 데서 나는 숭고한 편안함을 느낀다.

 

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원이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무시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 몫이다.

우리의 시야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끝이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미래에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지금 이순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다른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하고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에 완벽하게 충실해야 영원을 얻을 수 있으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뭔가 성스러운 구석이 있다.

 

극한 상황에 놓인 포로처럼 삶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삶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자유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곧 긍정적으로 느낄 만한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프랑클의 말에는

기본적이고 단순하지만 깊은 뜻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양방향으로 통한다.

긍정적으로 느낄만한 무언가를 찾는 일은 삶에 의미를 준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아라.

언제나 마음을 써서 행동하라.

현재를 살아라.

 

"현재를 살아야 한다. 모든 파도에 몸을 실어라.

매 순간에서 영원을 발견하라.

바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섬에 서서 육지쪽만 바라본다.

육지 같은 건 없다. 이 삶 말고 다른 삶은 없다.

 

그렇다면 현재를 산다는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의 삶에, 아니 삶 자체에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공포감이 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지금 여기의 삶이야말로 삶의 궁극이라는 사실을 안다.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

 

삶의 의미란 언제든 바뀔 것이다. 또다시.

그리고 모든 건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의 명암을 알 수 있는 책이다.

 

AI에서멀티모달은 텍스트,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정보를

함께 처리하거나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챗GPT는 텍스트만을 입력받고 출력했지만 그다음에 나온  GPT-4는 이미지도 입출력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온 클로드, 제미나이, 라마 등의 인공 지능도 모두 멀티모달입니다.

 

2024년 1월 구글 딥마인드팀이 스탠퍼드대학과 협업해 만든 알로하라는 로봇을 발표했습니다.

이 로봇은 모방학습을 합니다... 

평균 50차례 시범을 보이면 85~90퍼센트의 확률로 그 동작을 해내는 데 성공한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이 로봇을 오픈소스로 공개했습니다. 이 로봇의 제작비는 3만 2000달러에 불과합니다.

부품 설계도, 소스 코드, 부품을 살 수 있는 곳까지 모두 공개했습니다.

누구든 이 로봇을 만들 수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놀라운 점은 이뿐이 아닙니다. 이 로봇은 전이학습을 합니다.

다른 로봇이 익힌 동작을 따로 배울 필요 없이 바로 전달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024년 4월 18일 세계 최고의 휴머노이드 로봇 제조사인 보스턴 다이나믹스가 올 뉴 아틀라스를 발표합니다...

보스톤 다이나믹스는 2020년 말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한 곳입니다...

지금까지 예를 든 휴머노이드 어느 것도 사람이 알고리즘을 짜지 않습니다.

AI를 써서 강화학습 혹은 모방학습, 전이학습으로 스스로 배워나가는 로봇들입니다.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몸을 가진 AI'라고 부릅니다.

'몸을 가진'이 무슨 뜻일까요?

인공지능이 제대로 '지능'이 되기 위해서는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AI과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야 세계에 관한 모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델은 '외부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다'는 것에 관한 지각을 합니다.

 

로드니 부룩스

1. 지능은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발현된다.

2.실제 환경의 복잡성을 반영

3.학습의 효율성

 

AI과학자들은 할루시네이션(아주 멀쩡히 거질말하는 것을 뜻함)이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은, 사용자 입력을 받는 텍스트 기반 어플리케이션 또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공격자는 악성 코드나 텍스트를 삽입하여 시스템의 동작을 조작하거나 무단 억세스 권한을 얻거나

기타 보안 문제를 일으킵니다.

 

프롬프트 인젝션은 쉽게 말해 교묘한 요구를 입력해서 인공지능이 규칙 밖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게리 마커스의 다섯가지 걱정

1.극단주의자들이 어마어마한 허위 정보를 생성해 민주주의와 공론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2.환각은 잘못된 의료 정보를 생성할 것이다.

3.콘텐츠 팜들이 광고 클릭을 위래 사실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내용을 생성할 것이다.

4.챗봇은 일부 사용자들에게 감정적인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

5.남용으로 인해 웹 포럼과 피어리뷰 사이트를 붕괴시킬 것이다.

 

테그마크 교수는 서아프리카의 검은코뿔소를 예로 듭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지능이 인류를 멸종시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사악해지거나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능해지고 목표가 우리와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의 모든 개방형 목표를 가진 초지능은 자신을 보존하고 그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해 자원을 축적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하찮은 부작용으로 멸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는 일부 주장은 완전히 우스꽝스럽습니다. 인공지능으로 구동되는 열추적 미사일에 쫓기고 있는데

'인공지능은 의식을 가질 수 없다', '인공 지능은 목표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심할 수 있을까요?

열대우림에 사는 오랑우탕이, 지능이 높은 생명체는 더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말을 들으면 안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공지능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에 안심할 수 있을까요?

공장에서 사육되는 소나 불쌍한 오랑우탕처럼, 인간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면 과연 이를

기술적인 '진보'로 간주해야 할까요?

 

옥스포드대학교의 컴퓨터 과학자 일리아 슈마일로프 등이 쓴 <재귀적 생성 데이터로 훈련한 인공지능 모델의 붕괴>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생성한 데이터로 훈련한 인공지능은 마치 종의 근친교배와도 같이 붕괴해버립니다.

생성 모델은 자신이 생성한 데이터로 훈련을 거듭할수록 점차 원본 데이터의 분포를 잃어가게 되는데 특히

분포의 꼬리 부분, 즉 빈도가 낮은 부분을 쉽게 잃게 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드문 특징들을 잊기 시작하다가,

나중이 되면 인공지능이 만든 것들이 본래 데이터와는 비슷하지도 않게 됩니다.

대를 거듭할수록 오차가 점점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웹은 이미 인공자능이 생성한 저품질의 콘텐츠로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상위 검색 결과의 10퍼센트 이상을 이미 AI가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으로 가는 트래픽을 구글이 AI 개요로 또 가로채버립니다.

이 사이트들이 다 망하면 구글은 어디서 검색을 해오려는 것일까요?

두 번째 책을 출판하다.

 

아들이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입대를 기념으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해 둔 버킷 리스트를 들여다보니, 그림 그리기가 우선순위에서 높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잘 그릴 자신은 없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원 없이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아들이 군 제대를 할 때쯤이면 그래도 뭔가는 이룰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성인을 위한 그림 그리기 교실을 찾아보았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6개월 정도 된 그림 교실이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에 2시간씩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반 스케치로 시작했고, 차츰 연필화, 유화로 다양하게 그렸다.
그리고 두려움은 있지만 그림 그리기를 배우면서 무료 그림 사이트와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고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시도해 보니, 동영상을 보고 따라 그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는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따라 그리기는 수채화, 오일 파스텔화, 펜화, 색연필화로 다양하게 그렸고, 재료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재미가 붙으니 어떤 때는 퇴근하여 여러 장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 그리기는 거의 3년을 이어졌다.
이직하면서 그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그림 그리기는 중단되었다.
퇴근 후 조금씩 시간을 내어, 모아진 그림을 그려진 날짜에 따라 묶어 책을 완성하였다.
처음엔 그림만 넣었으나 허전해 보여, 모아 온 짧은 글을 추가하여 정리하였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활력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림 그리기 이후의 모험은 무엇일까? 나에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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