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하늘이 무너질 듯 절망하고 힘든 날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한 두번은 아닌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지나갔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심각한 상황도 아니였던 것 같다.

항상 현실만이 힘들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 지나고 나니 다 그랬었지."  그렇게 공감했다.

좋은 글을 올려 본다

 

언젠가 우리를 얽매는 의무라고 여긴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면 웃음이 날 거야.

우리를 가둔 감옥은 가짜거든. 우리가 만들어 놓고 바보같이 경비원 노릇을 한 거지.

 

인생에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그곳에 없기'때문이야.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 모든 시간 동안 다른 데 있지.

야심 속에, 고통 속에,  청구서 더미 속에, 촉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채 말이야.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

 

인생에서 엄청난 절망을 겪고 나면 경이로운 반전이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잖아.

우리가 폭풍을 잘 견디기만 한다면 말이야.

 

이틀이나 굶은 여덟 살짜리 아이라면 햄버거 세 개쯤은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있을거야.

그런데도 자기 자신보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이게 진정한 헌신이자 희생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감동적이었지.

그 아이가 자기 어머니께 햄버거를 들고 가는 모습을 지켜봤어.

그 어머니도 아마 오랫동안 굶었겠지. 아이가 어머니를 보고 밝게 웃더군.

그 어머니도 아이에게 환하게 웃어줬어.

아이가 어머니에게 먹을 걸 가져다 드리는 걸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마도 폴, 너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내 주위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있다 해도 몇 명 안 되겠지'하는 생각 말이야.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시간을 갖고 지혜롭게 바라보면 불만스럽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결국 우리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고

모두 더 잘되려고 일어난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현명한 자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제대로 알고 피한다

 

남들 눈에는 기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긴장을 푼다는 건 가장 감미롭고 우아한 행동이야!.

왜냐하면 그건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와 근심거리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자기 삶의 주연배우이자 흥에 겨운 관객이 된다는 뜻이니까!....

그러면 인생은 놀이가 되는 거야.

일을 하면서도 책임감이 아무리 우리의 어깨를 짓눌러도 우리는 즐기며 사는 거지.

긴장을 풀면 마법처럼 그 무게가 가벼워지거든.

 

우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 앞에서 누구나 혼자거든.

빅토르 위고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지옥의 다른 이름은 고독'이라잖아.

 

주어진 상황을 즐기는 것이 네게 주어진 의무이자 사명이라는 신호가 아닐까?

우리 생각보다 훨씬 현명하고 섬세한 소설가인 삶은 우리가 자신을 갈고닦고 계발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할 곳에 있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자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지금 상황을 즐기는 거지....

 

망설이지 말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꿈구는 삶을 살고, 다투고 멀어진 사람과 화해하고,

오랜 시간 동안 계획했지만 몇 번이나 미루어 왔던 여행을 떠나야 해.

정리하자면 절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인간의 삶에는 위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노력에 쏟아 붓기로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궁지에 처한 상황은 신에게는 기회다.

사람이 절망의 심연에 빠져 인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사토리가 찾아 온다(사토리는 입류과, 깨달음, 계시와 같은 말)

 

 

책을 읽다보면 너무나 소중한 글들이 있다.

혼자서 읽기엔 아까운 글들....

아래 내용은 밑줄친 글 중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옮겨온 것이다.

 

바람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하는 긴장감, 그 노력을 사공에게 부여하고 '언젠가 바람은 불어 온다'라는 강한 신념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커다란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했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으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운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도 아니고 숙명론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알때 자기를 초월한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합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도처에서 어쨌든 오늘을 산다, 내일을 산다, 라는 것에 급급하여 어떻게 살까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 자체가 현대의 테마가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오감을 갈고 닦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크게 기뻐하고 깊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크게 웃고 크게 눈물을 흘리면 됩니다.

깊이 슬퍼하는 사람일수록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많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수록 크게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로 우울하고, 깊이 고민하고, 또 절망하는데, 그것 또한 인간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크게 웃고 크게 울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감정의 자유로운 진폭인 것입니다.

깊이 절망하는 인간만이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지독하게 고민하고 지독하게 번민하는 인간만이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웃는 건 좋지만 우는 건 좋지 않은 일로, 한 노모는 자기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라를 위해 잘 죽었습니다"라며 조용히 미소 짓고,

"내년 봄에 야스쿠니 신사 벚꽃 나무 아래서 만납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군국의 어머니를 다룬 미담으로 신문의 큰 표제가 되어 칭송받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런 풍조는 전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 중요한 것을 보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쭉 지내온 것이 최근 전후 60년이 아닐까합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한쪽 면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중시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일본인은 결정적으로 절망하는 데 서툰 국민이다. 또 타자를 미워하는 데 서툰 민족으로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이다"

절망하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 그리고 무언가를 증오하거나 통렬하게 반성하는 데도 능숙하지 않다.

 

유연한 마음은 죽음과 대결하여 그것을 부정하면서 생겨나진 않습니다.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삶을 응시하고, 그것을 맞아들이는 가운데 생겨나는 법입니다.

위기 속에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사실 이런 유연한 마음이 아닐까요.

강하게 버티는 것만이 살아가는 기술인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무거운 책이 있을까?

색인을 뺀 423 페이지중에서 50여 페이지를 읽고 포기한 유일한 책.

뮤지컬에 문외한인 사람이 이 책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변경을 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등장하는 많은 사람과 오페레타의 곡들, 곡과 극을 쓴사람들의 상이점,

,그 각각의 얽힌 사연들,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 이것을 쫓아가다가 지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니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음의 기회를 빌어 완독할 것을 다짐하면서 간단히 옮긴이의 글을 소개한다.

 

 "옮긴이 의 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 노래와 극이 합쳐진 악극 또는 음악극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음악극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숙한 장르가 아닌 것 같고, 실제로 사람들이 음악극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른바 고급 예술로 분류되는 오폐라를 빼 놓고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흔히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대중적 음악극을 접하는 기회는 음반이 아니라면, 뮤지컬 영화 또는

큰 성공을 거두어 세계 공연에 나선 블록버스터 뮤지컬 공연 정도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극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겠지만, 서양의 경우에는 음악극 전통의 중심에 음악 극장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음악 극장들이 여러 층의 관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수준의 음악극을 공연하면서, 관객들을 객석에 잡아두기 위해 노력하고 변모해온 것이 서양 음악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수십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극장과는 다른 새로운 매체, 즉 영화나 텔레비젼과 경쟁 또는 협력하는 것이 또 서양 음악극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 극장은 영상 매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현장감을 극대화 하거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영상 매체와는

구별되는 소수 집단의 상대적 친밀성을 강화하거나,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앤드루 램의 <150년 뮤지컬의 역사>는 이런 서양의 대중적 음악극의 1840년대 이후 150년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때로는 읽다만 소설의 남은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랜다."

이 소설을 이번 주 3일에 걸쳐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사소함에서 뭔가를 기대해 보는 것.

이것이 일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

 

"이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책 제목부터 뭔가가 있어 보인다.

인터넷에서 읽을 책을 찾다가 발견한 책이다.

 

이 책은 리처드라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어느날 몸이 갑자기 아파오고 병원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그는 예전의 외톨이 생활에서, 접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와 관계 형성이 되는 확장으로 변한다.

빵을 굽는 사람에게 자신의 멋진 차를 운전할 기회를 주고, 집을 나온 아줌마에게 잠자리, 차를 마련해 주고,

웅덩이에 빠진 말을 구해주고, 차 트렁크에 납치된 여자를 구해주고 모든 일들이 활동적으로 진행된다.

그에게는 이혼한 마누라가 있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먼 길을 거쳐 찾아온다.

그동안 무심했던 마음과 갈등이 해소되고, 어느 순간 이혼한 아내도 찾아와 세사람은 같이 있는 시간도 갖는다.

그리고 어느날 비가 많이 와서 그는 식탁위에 의지하게 되고 그 식탁은 바다로 떠내려간다.

식탁 위에 있는 그의 위로 헬리콥터가 날아들지만 잠시 기다리라는 얘기를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 이후는 의문으로 마무리 된다.

갑자기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난다.

 

이 책은 나의 인생을 구한 것일까?

아니면 책 주인공 리처드의 인생을 구한 것일까?

섬세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의문이 든다.

시간을 두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결론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소설에 나오는 몇 가지 내용을 옮긴 것이다.

 

"당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핑크 레이디인가요?"

"간호사예요. 이십 년 전에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했어요. 두 번째 직업이죠."

"왜 돌아왔죠?"

"남편이 죽었는데 솔직히 밤에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요.

잠도 오지 않고, 그러다가 생각했죠. 밤에 일하면 어떨까. 그러면 집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정신병원에 들어갈 일도 없겠지 하고요."

 

"내가 이런 전화를 하는 건 우리 사이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고, 한 번도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은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법이야.

촌스러운 소리인 줄은 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

 

오후에는 비가 내린다. 계절에 맞지 않는 폭우이다.

하늘이 시커멓고, 온통 어두워서 그들은 촛불을 켜고 명상을 한다. 그리고 앉는다.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다.

리처드는 앉은 채 잠이 든다.

그러다가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퍼뜩 깨어난다.

 

언덕을 오르다보니 수영하는 여자의 집에 '판매' 표시가 붙어 있다.

그는 남 몰래 기뻐한다. 잘 됐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오겠구나. 새로운 뮤즈가.

 

"그저 당신에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내 인생을 다시 열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난 해방된 느낌이에요. 구원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느닷없이 농산물 코너에 나타나서 날 돌봐줬고, 보답도 바라지 않았어요.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마음 써주지 않았어요. 마음 쓰는 건 내가 하는 일이었죠!."

이것이 리처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미친 모자장수의 찻잔'을 타고 논다.

"그래서 왜 날 데려가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로 갈지 몰랐다."

"내가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걸 몰랐어요?"

"자식을 둬본 적이 없었잖니."

"하지만 아빠도 한때는 아이였쟎아요. 아버지도 있고 어린 시절도 있었잖아요."

심문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떨어져나가고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뺑뺑 돌리려는 것 같다.

리처드는 생각한다. 좋아 그렇게 하렴. 난 그래도 싸지.

그들은 한 번도 나눠보지 못한 대화를 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도망칠 순 없어. 누구에게나 역사가 있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왜 널 필요로 하니? 돌봐줄 자식이 없대?"

"때로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해줄 수도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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