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많은 삶에 있어 그걸 인정하고 이겨가는 지침서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우리는 삶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번뇌 그 어떤 것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쓴 글에 심취되어 밤을 지세울 수 없다면 그 글은 결코 다른 누군가의 밤을 지새우게 할 수 없다.'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슬픔의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는 30년 전 처음 소개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된 점이 많았다.

 

고통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이라 할지라도.

 

아침이 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날 시간이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지만 그렇게 할 열의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삶이 무겁게 느겨진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이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겹게 느껴진다.

마음이 침울하며, 자꾸만 뭔가를 뺏기는 기분이 든다.

 

생각조차 못한 상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혀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한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하지만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감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사랑한 이가 죽은 정확한 시각을 또는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을 그대로 기억한다.

그것은 마음 깊이 새겨진다. 당신의 세계는 무력함과 환상으로 점령당한다.

마음의 시계는 이미 멈춰 있는데 세상의 시계는 여전히 앞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어느 낯선 뜻밖의 감정이 상실의 한복판에 자리 잡는다.

넘쳐나는 슬픔과는 대조적인 후련함이 바로 그것이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현 시점과 맞지 않는 것 같아 종종 옳지 못한 감정이라고 여긴다.

너무나 가깝고 소중했던 이를 잃은 와중에 왜 후련한 기분이 드는걸까?

 

대개 인생은 희망했던 것보다 짧기에 우리는 상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라던 모든 일을 끝마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 끝마쳤다고 느끼는, 더구나 그것을 잘 이루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현하지 못한 희망을 갖고 아직 응답받지 못한 소망을 품는다....

당신이 애타게 바라고 갈망하는 '더'는 항상 저 너머에 있고 늘 변한다.

만일 그 일을 이루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꿈은 내일의 후회이며 소망하는 모든 것을 항상 손에 쥘 수는 없다.

 

생각나는 모든 후회에 대해 평온함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라.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해본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완벽하고 후회없이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자신을 용서하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삶 속에서 당신은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은 맬린다처럼 한번 울면 결코 멈출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는 것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물론 그럴거라고 믿으면서도 울음을 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바리는 것이다.

흘리지 못한 눈물은 슬픔의 샘을 훨씬 더 깊게 채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흘리고 나면 기분이 홀가분할 것이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잚은이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오늘날 '대화 단절.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앞을 향해 전진하기'사고 방식속에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으며,

사실 우리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세대라는 것도 새삼 놀랍다.

 

슬픔과 상실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실을 나누는 방법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갈 사람을 걱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가 원하는 방법일 것이다.

 

시간이 얼머만큼 주어지든, 삶이 얼마큼 완전하든, 즉음은 인간에게 여전히 깊은 상실이다.

 

"예전엔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 난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는 죽어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단다.

친구들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죽음이 소멸이라면 내겐 아무일도 생기지 않겠지.

하지만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겠지.

어디에 있든 난 분명 혼자가 아닐거야. 그리고 때가 되면 널 다시 보게 되겠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 하다.

 

마지막 테이프에서 그는 딸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이 테이프를 보고 있을 땐 날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나도 널 그리워하는지가 궁금하겠지. 나 역시 네가 몹시 보고싶음을 이렇게 말해줄 수 있구나.

내가 죽어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널 두고 가는 거였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널 두고 가지 않으려고 애쓰고, 애썼지만 결국 난 가야만 했다.

내가 널 생각하듯 너도 날 이따금 생각하겠지.

학교에서 또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바쁜 날,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불현듯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겠지.

그 순간 내가 널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다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겠지만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난 네 심장만큼이나 가까이 네 곁에 있을거니까."

 

그 고통과 사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상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피해야 한다.

영국 출신 작가인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다.

 

 

 

 

 

1200페이지의 두꺼운 책을 앞에 두고 있다.

원본의 3권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새로운 사고를 들여다 본다는 의미에서 독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노동이다.

3주에 걸쳐 절반을 읽었다.

한 숨을 돌리며 밑줄친 글중에서 추려내어 적으며 음미해 본다.

 

참으로 인간이란 헛되고 가지각색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 않고 늘 저 너머에 있다.

공포나 욕망, 희망 등이 우리들을 늘 미래로 비약시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현실에 관한 고찰과 마음을 가리고, 장차 올 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장차 세상을 떠날 날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한다.

 

장례의 절차와 묘지 선택과 장례의식은 고인에게 무슨 부조가 되기보다 오히려 산 자들을 위한 위안이다.

 

불행이 닥쳐 올 때면 우리는 무슨 원인이건 붙여 보지 않은 일이 있는가?

대들어 볼 상대를 찾기 위해 옳건 그르건, 어떤 것이나 되는대로 원망하며, 대들지 않는 것이 있는가?

 

일어나는 일들에 화를 내서는 아니되느니

신들은 우리들의 분노 따위에는 개의치도 않는 것을.

 

한가함은 항상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

 

급작스레 신속히 둘러대는 것은 재치에 해당하는 일이고, 천천히 침착하게 말하는 것은 판단력에 적합한 일이라고 본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그것은 소득 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불행이다.

 

인색은 늙어서 모두 잘 걸리는 병으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수작 중에서 가장 꼴같잖은 일이다.

 

누구나 오래 불행하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다.

죽음도 삶도 참아낼 용기를 갖지 못하는 자를, 저항하기도 달아나기도 원치 않는 자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공포의 충격을 참아내지 못해서 목매달아 죽고, 빠져 죽고, 뛰어내려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포는 죽음보다도 더 참아낼 수 없이 괴로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예지와 사유가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 한 점에 귀결된다.

 

매일 매일이 그대에게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기대하지 않은 시간이 오는 것을 감사로 맞이하라.

 

죽음의 예상은 자유의 예상이다.

죽기를 배운 자는 노예의 마음씨를 씻어 낸 자이다.

죽음을 알면 우리는 모든 굴종과 강제에서 해방된다.

 

우리 묘지들이 교회당에 붙어서 도시 사람들이 가장 자주 찾아가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친한 사람들이나 여자들, 아이들이 죽은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게 하고, 우리들에게 해골.무덤.장례 행렬 등을 늘 보아 눈에 익혀서,

우리 인간 조건을 알려주게 하기 위한 일이라고 리쿠르고스는 말했다.

 

우리들 앞서 지나간 영원한 태고의 세월들이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음을 알라.

 

고귀한 일 가운데 위험 없이 되는 일은 없다.

 

우리는 기억력을 채울 생각만 하고, 이해력과 양심은 빈 채로 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듯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되고 우리 속에서 변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실 학문의 방법은 판단력의 방법보다 못하게 평가된다.

판단력이 있으면 학문은 없어도 된다. 그러나 학문은 판단력 없이는 안 된다.

 

감히 현명하여라.

시작하라, 잘 살아 볼 시간을 미루는 일은

강을 건너려고 물이 다 흘러가 버리기를 기다리는 촌사람 격이니라.

그 동안 강물은 흐르며,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철학은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며, 거기에는 유년 시절이라도 다른 연배들과 마찬가지의 학과가 있는 이상,

어째서 소년에게 그것을 가르쳐서 안될 일입니까?...

사람들은 인생이 끝날 무렵에 인생을 가르칩니다.

 

진리를 말하는 문장은 기교없이 단순해야 한다 -세네카-

 

내게 진실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가짜라 비난하며 경멸하는 것은 역시 어리석은 자부심이다.

이것은 일반인들보다도 좀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결함이다.

 

분명 큰 강이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을 못 본 자에게는 크게 보인다.

한 나무와 한 인간을 두고도 그러하니, 모든 종류에게 각자가 본 가장 큰 것은 거대하게 보인다.

 

눈에 익혀 습관이 되면 우리 정신은 사물들과 친근해진다.

눈은 항상 보는 사물에 놀라지 않으며, 그리고 그 원인을 탐구해 보지 않는다. -키케로-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 그의 진실한 영광이 있다. 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고, 마음과 심령의 견고성이다.

 

우연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일을 결정한다. -메난데르-

 

나는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습관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그만큼 조심스레 습관은 나의 모든 행동을 제한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걷어채이며 둔중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말게 하라.

자기를 추어 올리며 애무하라. 자기 이상과 양심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들 앞에 잘못하면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다스리라.

"사실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퀸틸리아누스-

 

그대와 동무 하나만 있으면, 그대들 둘이 충분히 인생의 무대가 된다.

또 그대와 그대 자신만으로 족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에게는 하나이며, 그대 하나가 그대에게 민중 전체가 되게 하라.

한가하게 집에 있거나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 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자기굴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발자국을 지우는 산짐승의 본을 떠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말을 해 주기를 찾는 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다.

 

양심은 우리를 공포심으로 채우듯, 마찬가지로 평안과 신념으로 채워 준다.

그리고 나는 내 의지와 의향의 깨끗함을 알고 있는 덕택으로, 수많은 위험한 경지를 더 확고한 걸음으로 걸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양심이 자기에게 주는 증명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공포나 희망으로 채워진다.

 

 

그는 이상적인 삶을 '지식에 의해 인도되고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는'것으로 보았다.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이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여러 분야를 섭렵한 레셀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한다.

그의 좋은 말을 정리해 본다.

 

아이들은 자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자율은 한편으로 좋은 습관,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어떤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유년기의 행복은 최선의 인간을 만드는 데 절대적인 요인이 된다.

 

정상적인 어린이라면 누구나 배우겠다는 욕망이 있고 이 자발적인 욕망은 걷기 시작할 때나 말하기 시작할 때의 노력에서 보여 주듯이 강한 추진력이 된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독자적인 인생을 산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이웃의 감정이나 말에 따라 사는 단순한 거울에 불과하다.

 

겸손은 위선과 본능의 왜곡을 낳게 했다.

 

지도자의 권위는 마치 축구팀의 주장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즉 하나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귄위다.

 

그들은 회의적이어야 할 때 쉽게 믿어 버리고, 오히려 인정해야 할 때는 믿지 않는 것이다.

'지성'이라는 말의 뜻은 분명히 이미 획득된 지식이 아닌,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할 때 적절하다고 본다.

 

나는 지성의 개발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목적의 하나라고 본다.....

즉 지성이란, 지성에 필수적인 정신습관을 발견하는 것이다.

 

지적 생활의 본능적인 기초는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다. 지성은 활발한 호기심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감추어진 덕성에 대해서는 소문을 내지 않는다.

오직 감추어진 결점에 대해서만 소문을 낸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고 게다가 이 소문을 시정하려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한편 소위 올바른 호기심은 지식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의해 살아난다.....

호기심이 죽어 버리면 활발한 지성 또한 죽어 버린다.

 

유년기의 가장 본능적인 충동은 성이 아니라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인식함으로써 노력하려는 자극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햄릿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을 보고 있는 동안 햄릿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계속 상기시키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 또한 서투루게 현실을 상기시키는게 있다면 짜증이 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상상도 중요하다.

 

본능이라는 원래의 성질은 윤리적으로 중성이고 오직 환경에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아이들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복과 건강을 통해 도덕을 배운다.

 

사랑과 지식은 좋은 행동을 위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적으로 부모는 하나의 배경이 되어야 하고 아이가 부모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행동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부모의 즐거움은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문제가 생길 때 대답해 주고, 갈팡질팡할 때 결정해 주고,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주는 부모를 믿는다.

부모가 지식을 위해 해 준 대부분의 것은 아이의 의식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증오심을 낳기 쉽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집중력의 특징으로 세 가지 특질을 들 수 있다.

즉 집중력이 강해야 하고,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끝으로 자발적이어야 한다...

상당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해내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말 가치있는 것이 되려면 집중력은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모든 열광적인 정당은 신화의 보호막을 만들어 그 속에서 편안하게 정신적인 백일몽을 꿈꾼다.

정열은 너무도 흔히 지성을 죽인다. 반대로 지성은 지식인들에 의해 수시로 정열을 죽인다.

 

성인에 가까워지면서 꿈이란 그것이 조만간 현실화될 수 있을 때만 그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들 노예의 눈을 가려 진실을 은폐한다. 노예들은 그렇게 해서 강자의 이익에 합당하게 일한다.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해가 안가는 것은 민주정치라는 게 자진해서 진리를 은폐하는 여러 법률을 만드는 일이다.

이거야말로 집단적 돈키호테주의다.

즉 그들은 헬맷이 그들이 믿고 싶은 것보다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거짓이나 기만이 아닌 정열과 본능의 올바른 훈련을 통해 도덕을 탐구할 갓이다.

내가 원하는 도덕은 공포도 없고 제한도 받지 않는 지식의 탐구로,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이것 없이는 다른 사소한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짓을 선동하는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독이 되는 약을 먹게 하고 서로 독가스를 품어대는 이 세상에서,

비판적인 습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눈앞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 주장에 쉽게 넘아가는 것은 현대의 저주 중 하나다.

 

지식과 현실의 관계를 학생들에게 가시화하고 지식에 의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 줘야한다.

 

사랑에 의해 인도된 지식은 교육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학생이 획득해야 할 지식이다.

 

우리는 자연이 부여한 친절한 마음을 열어 놔야 한다.

만일, 어떤 교리가 아이들을 비참하게 한다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든 간에 거부해야 한다.

모든 경우에 잔인성이 담긴 교리의 심리적 원천은 공포다.

 

** 러셀의 저서 : 철학의 여러 문제, 서양철학사, 수학 원리, 독일 사회 민주주의, 자서전

 

 

 

독서 수준에 놀라며, 대한민국에 기여한 역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 준 근본 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인간 존재의 심령적 요소와 종교적 신앙관을 다소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이고 종교의 '정신적 아편성'을 인식하고 있어요...

특히 남한 사회의 역대 폭력 정권아래서 그것을 미화하고 미국의 대한민국 정책을 무조건 미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이성과 지성을 상실한

광적 반공주의와 극우 집단의 폭력 체계를 옹호해온 것이 바로 월남 기독교인들이라는 현실을 늘 생각한 겁니다.

 

사상적 자폐증은 곧 자살이오. 공산주의나 반공주의나 다 자살주의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면학의 글

어려서 뜻을 품고 고향을 나왔으니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리라

뼈를 묻을 곳이 어찌 선조의 묘소뿐이리오

뜻있는 이에게는 세상 어디나 청산이다

 

훈련기간 중에 인민군의 진격으로 우리 훈련소는 부산으로 밀려 내려갔어.

인간은 누구나 급해지면 교사가 강도로 돌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가능성을 다 지닌 동물이더군.

지식인이라는 부류에겐, 영국 같으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통에서 나오는 젠틀맨 다움이나 기사도 정신,

즉 어떠한 급란에 처해서도 흩어지지 않는 일정한 품위와 행동규범을 유지하는 계율 같은 것이 있잖아요?

한국 지식인에게는 그런 세련된 정신이나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그 판국에 이르니 뚜렷이 드러나더구만.

 

한 민족이 얼마나 일찌감치 세계문명에 눈을 뜨고, 몇 사람의 훌륭한 선각자적 지식인들이 민족의 장점을 글로써

세계에 알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실감하게 되지요.

 

38도선을 그어서 조선을 분단하자고 한 것도 미국의 제안이었어요.

오키나와에서 미처 남조선으로 진격할 여력이 없었던 미국이 급히 스탈린에게 38도선에서 미.소 양국 군대에 의한 분할 점령 통치를 제안했지.

스탈린이 그에 동의한거요.

 

그 기생의 인간적인 큼 앞에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크기, 도덕적인 크기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어.

참으로 나에게는 귀중하고, 어쩌면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기회였어요.

 

어렸을 때, 거울에 비친 하나의 영상이 각인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연상됩니다.

 

오늘보다 더 암담해질 내일을 견디어야 할 절망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그때 나는 '사람은 자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어.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역사적 체험과 인간적 삶을 경험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적 반응 양식은 천차만별이라구요.

인간이란 그렇게 전쟁을 경험하고 나서 반드시 반전평화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가 전쟁애호적인 무력 숭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 각기 개인의 주체적 의식의 문제라고 해야겠지.

 

무기를 가지면 생명을 경시하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무기를 가진 자들의 위험한 심리상태에요.

사격술이라는 '기술'의 초보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누구나 예외없이 그런거요.

바로 무기를 갖는 '군대'라는 집단과 무기를 지니고 그 집단 속에 매몰되는 '군인'의 심리가 이런 것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분열주의자이지 통합주의자가 아니거든....

민족의 통합보다 분열을 더 중요시 하고, 남북의 화합을 극력히 반대하고, 자기의 패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지요.

 

나는 언제나 '개인은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일 수 있지만, 무리(집단)는 극히 비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개체로서 사고하는 인간'과 무리 속에서 '무리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큰 차이에요...

이것은 지성인의 바람이나 욕구와는 전혀 무관하게 걸어가는 집단적 행동의 특성인 것 같아.

 

인간 집단은 실패를 거듭하는 괴로움 속에서 다음에 올 실패의 괴로움을 다소나마 감소하는 정도의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 집단이 이렇게 많은 목숨과 고통과 설움을 겪고서 다음에 올 운명에 대해서 조금씩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적 한계가 아닌가 싶어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닌 목적으로 사람을 대하면서 짙은 색안경을 끼는 사람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기 눈이나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람이고, 둘째 유형은 마음에 흑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뜯어보려는 사람,

그리고 셋째는 자기심중의 좌불안석인 상태와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열등의식 때문이라고, 이 세가지라고...

그러고 보면 박정희의 짙은 안경은 자기 열등의식의 표시이고, 강자 앞에 서게 된 약자의 정신적.심리적 동요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던 것 같아.

 

괴테는 이렇게 말했지.

"안경을 낀 사람을 대하면 이 미지의 사나이가 무장을 한 눈초리로 내 마음속 비밀스러운 곳까지 후비고 들어오는 것을 느껴.

나는 상대방의 마음속을 알 수 없는데 상대방은 나의 마음을 구석까지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아주 역겹단 말야.

이런 인간은 아무리 사귀어 보아야 그에게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잃을 것 밖에 없지.

 

그것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한국 국민의 나쁜 특성이 하나인데, 자기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막강할 때에는 평신저두하다가,

정권이 국민에게 자유를 주고 약한 기색을 보이면 즉시 태도가 돌변해서 제각기 자기 주장대로 행동하는 것이오.

이 때문에 민주당 아래서 이렇다 할 개혁의 성과는 없어.

한국 민중에게 민주주의적 책임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요. 그때나 40년 지난 지금이나.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공'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이처럼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적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

 

자기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있는 규율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에 따름으로써 보다 승화된 삶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남이 준 것으로 인해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자신에게 제약과 규율을 가하는 속에서 그것이 보다 의미있고

높은 정신성으로 자신을 승화한다는 진리를 터득했어요.

 

생물적 기능의 종식과 동시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속성은 종식되는 것으로 생각해.

육체의 생물학적 종식, 그 자체가 소위 '영혼적' 기능의 해소를 뜻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든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독선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종교의 잔인성은 더했고, 상황은 악했습니다.

소위 '신앙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히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에서의 고문은 극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이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를 묻기 전에 그 사람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알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도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인 행복 추구의 실천적인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인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인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학문 연구의 주체의식이 희박해. 큰 문제야.

자기 나름의 문제 의식이나 분석 방식 없이 남의 이론을 빌려서 자기의 권위로 이용하는 작태를 나는 멸시해요.

정치 이론도 사회 비평도 다각도로 교차검증한 다음에 일단 소화하고, 내 머릿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해서 발효시켜서,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자기의 지식이 돼버린 것은 굳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 뼈를 깍는 노력을 통한 철저한 '자기화'가 필요하지.

나는 수많은 논문과 평론, 심지어 신문, 잡지에 발표한 평범한 주제의 글도 다 이 정신과 방법으로 쓴 것입니다.

 

나는 20년을 사귀어야 그 사람을 웬만큼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 극한 상황 속에서 믿을 수 있는 벗이라고 할때에는 30년쯤 사귄 사람을 말해.

30년 쯤 험난한 행보를 같이해야 믿을 만한 벗으로 생각하는거야.

"먼 길을 가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긴 세월을 지내봐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누구의 호의나 힘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나 혼자 하는 것이라는 정신 자세를 은연중에 내 내면에 구축하지 않았나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은 이기주의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 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세력도 그 의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력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에요.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비례한다  - 영국 속담 -

소리와 몸짓의 광란, 이런 것은 교양.이성.지성 측면의 결핍을 뜻한다는 말이오....

그것이 연극이건 음악이건 길가의 장사이건 학교의 행사이건, 나는 시끄러운 것은 못 견딥니다. 그래서 소란스러운 곳을 피하지요.

나는 인간 행위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여겨요. 사람들이 각기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절제하는 곳에 아름다운 인간적 덕성.화합과 평화가 꽃피니까요.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책에서 소개되는 책

한낮의 암흑[아서 케스틀러],    1984년[조지 오웰],                               아리랑의 노래[님 웨일스],         근대국가 이론[라스키],          

사회중의 경제학[콜],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모리스 돕],         파워 엘리트[라이트 밀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검은 피부 흰 가면[프란츠 파농],

세계 경제론[J.R.힉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암병동/수용소 군도[솔제니친],                           과거를 돌아보며: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맥나마라]

빈핍물어[가와카미 하지메],     해공선[고바야시 다케지],                      여공애사[호소이 와키조],          트로츠키전(소련 혁명사) 3부작[도이처]

볼셰비키 혁명[E.H.카],           영국혁명론[트로츠키],                          괴테와 에커만의 대화[노신],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새프트[페르디나트 퇴니스]

역사란 무엇인가[E.H.카],        세계를 뒤흔든 10일간[그린 존리드],        러시아 혁명사[트로츠키],          사상의 자유의 역사[J.B.베리]

법과 자유[스에카와 히로시],    사회과학의 방법[오쓰카 하사오],            진리와 권력[한스 모겐소],          월남망국사[현채 중역],       무기의 그늘[황석영]

중국의 붉은 별[에드거 스노],   태평천국혁명의 역사[오거스트 린들리],   대장정의 기록[오토 브라운],       파리 고퀸[조르주 부루제],   아Q정전[노신]

한국 민족주의 탐구[송건호],    민족경제론[박현채],                             고요한 돈 강[미하엘 쇼로호프],   현대의 신화[바로우스 던엄],

팔만대장경,                           금강경,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네루], 그리스도교에서의 신학과 과학의 전쟁사[앤드류 화이트]

수상록[몽테뉴],                     팡세[파스칼],                                      고백록[루소],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소크라테스와의 대화[플라톤]

괴테와의 대화[에커만],           베토벤의 전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몽테-크리스토 백작[알렉상드로 뒤마], 희망의 기억[드골],                     역사로서의 사회주의[하루키],     고향[노신]

 

리영희 저작

역정: 나의 청년 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  전환 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베트남 전쟁, 중국 백서, 역설의 변증, 분단을 넘어서, 분단 민족의 고뇌, 조선 반도의 새로운 밀레니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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