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많은 삶에 있어 그걸 인정하고 이겨가는 지침서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우리는 삶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번뇌 그 어떤 것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쓴 글에 심취되어 밤을 지세울 수 없다면 그 글은 결코 다른 누군가의 밤을 지새우게 할 수 없다.'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슬픔의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는 30년 전 처음 소개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된 점이 많았다.
고통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이라 할지라도.
아침이 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날 시간이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지만 그렇게 할 열의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삶이 무겁게 느겨진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이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겹게 느껴진다.
마음이 침울하며, 자꾸만 뭔가를 뺏기는 기분이 든다.
생각조차 못한 상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혀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한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하지만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감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사랑한 이가 죽은 정확한 시각을 또는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을 그대로 기억한다.
그것은 마음 깊이 새겨진다. 당신의 세계는 무력함과 환상으로 점령당한다.
마음의 시계는 이미 멈춰 있는데 세상의 시계는 여전히 앞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어느 낯선 뜻밖의 감정이 상실의 한복판에 자리 잡는다.
넘쳐나는 슬픔과는 대조적인 후련함이 바로 그것이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현 시점과 맞지 않는 것 같아 종종 옳지 못한 감정이라고 여긴다.
너무나 가깝고 소중했던 이를 잃은 와중에 왜 후련한 기분이 드는걸까?
대개 인생은 희망했던 것보다 짧기에 우리는 상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라던 모든 일을 끝마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 끝마쳤다고 느끼는, 더구나 그것을 잘 이루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현하지 못한 희망을 갖고 아직 응답받지 못한 소망을 품는다....
당신이 애타게 바라고 갈망하는 '더'는 항상 저 너머에 있고 늘 변한다.
만일 그 일을 이루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꿈은 내일의 후회이며 소망하는 모든 것을 항상 손에 쥘 수는 없다.
생각나는 모든 후회에 대해 평온함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라.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해본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완벽하고 후회없이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자신을 용서하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삶 속에서 당신은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은 맬린다처럼 한번 울면 결코 멈출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는 것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물론 그럴거라고 믿으면서도 울음을 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바리는 것이다.
흘리지 못한 눈물은 슬픔의 샘을 훨씬 더 깊게 채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흘리고 나면 기분이 홀가분할 것이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잚은이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오늘날 '대화 단절.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앞을 향해 전진하기'사고 방식속에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으며,
사실 우리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세대라는 것도 새삼 놀랍다.
슬픔과 상실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실을 나누는 방법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갈 사람을 걱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가 원하는 방법일 것이다.
시간이 얼머만큼 주어지든, 삶이 얼마큼 완전하든, 즉음은 인간에게 여전히 깊은 상실이다.
"예전엔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 난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는 죽어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단다.
친구들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죽음이 소멸이라면 내겐 아무일도 생기지 않겠지.
하지만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겠지.
어디에 있든 난 분명 혼자가 아닐거야. 그리고 때가 되면 널 다시 보게 되겠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 하다.
마지막 테이프에서 그는 딸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이 테이프를 보고 있을 땐 날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나도 널 그리워하는지가 궁금하겠지. 나 역시 네가 몹시 보고싶음을 이렇게 말해줄 수 있구나.
내가 죽어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널 두고 가는 거였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널 두고 가지 않으려고 애쓰고, 애썼지만 결국 난 가야만 했다.
내가 널 생각하듯 너도 날 이따금 생각하겠지.
학교에서 또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바쁜 날,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불현듯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겠지.
그 순간 내가 널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다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겠지만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난 네 심장만큼이나 가까이 네 곁에 있을거니까."
그 고통과 사람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상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피해야 한다.
영국 출신 작가인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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