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를 말한다면, 현상에 매여 사는 사람인가, 현상을 너머 사는 사람인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생명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육체라는 현상을 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 때문에 육체의 현상, 곧 육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현상은 단지 육체에 그치치 않고, 육체적인 현상으로 넓게는 행동, 생각 , 말 등이 된다.

 

우리이 육체가 살게 되는 것은 생명 때문이지만, 이 생명 때문에 살게 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살게 된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생명 때문에 우리는 살게 되는 것이기에, 따라서 생명을 알아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정작 이 생명을 알아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을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의욕의 모든 근본은, 필요와 결핍, 즉 고총인 것이다.

다라서 이미 인간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로 해서 고통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의욕이 너무나 쉬운 만족에 의하여 그것이 소멸되어서, 의욕의 대상이 제게되어 버리면, 그는 무서운 공허와 지루함에 빠진다.

즉 그의 본질과 그의 현존 자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된다.

이리하여 그의 생은 진자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실은 이것들이 그의 생의 궁극적인 요소이다.

 

이 세상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 덧없음이다.

그 뜻으로는 몇 세기라는 세월도 다만 일순이란 순간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따라서 덧없음, 그 자체의 연속성 따위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이 폐허에서 꽃핀다는 것은 삶의 연속성보다도 오히려 죽음의 연속성을 증명하고 있다. -카프카-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경험할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것을 우리의 사유의 선천적인 범주들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지각한다.

그러나 지각되지 않을 때의 한 사물은 어떤 모습일까?

물자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비감각적 지각 경험을 결코 할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은 감각된 대상들이다.

... 물자체의 개념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켜주지 않고 우리에게 인식의 한계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삼위일체란 성령인 아버지와, 여기에 태어난 성령인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으로 맺어진 관계, 이를 소위 삼위일체라고한다.

 

직관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고 직접적인 지각이며 그러한 것에 머물러 그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 종교 역시 그러하다.

종교는 우주의 존재와 행위에 관한 직접 경험 및 개개의 직관과 감정에 있어서 성립되고 있다.

이들 직접 경험 각각은 다른 것과 관련되거나 혹은 의존하는 일이 없이 그 자신으로 성립하는 활동이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천의 사람들이 동일한 종교적 직관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동일한 직관을 나란히,

혹은 전후하여 어떻게 보았는가를 확정하려 한다면 각자는 틀림없이 서로 다른 윤곽을 그릴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어떤 고도의 교묘한 문구로 번역해 놓는다고 해서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한 것은 매우 교묘하게 붙여댄 이름이고, <초월적인 실재>란 말은 더 얼토당토 않으며,

심지어 우리는 <만물의 근거며 종말>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 대신으로 듣고 있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있는 이름표처럼 가장하고 나와서 우리는 속이는 것이고, 이런 표현이 어던 실물을 시사하는 것처럼 사용되어 있으나,

실상 그런 표현은 우리를 당장 고대 사고의 문제속에 빠뜨리거나, 으미 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바보 천치가 되게 한다. -세계기독교 사상전집-

 

자연을 이해하는 데있어서 신이라는 가설은 이미 실용가치가 없어졌다.

도리어 더 참되고 더 좋은 해석을 방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지에 있어 신은 지배자라기보다는 꺼져가는 석양의 실루엣과 같다.

 

하늘이 없는데 첫째 날이 있고, 해도 달도 없는데 낮과 밤을 명명하고, 첫째 날과 둘째 날을 운운한다.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수긍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에덴 동산이라는 낙원에서 농부처럼 여러 나무를 심었다고,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백치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러한 것들을 누구나 마땅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너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 그치고, 마음은 부합함에 그친다.

기는 마음을 텅 비우고서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도는 오직 텅 빈곳에 모이니, 마음을 텅 비우는 것이 심재이다.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분별을 통한 인식이다. 그러나 분별인식은 제한적이기에, 인식의 대상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 번째는 실상의 직접적인 인식이다.

직접적인 실상을 찾아야 한다면, 역시 우리는 첫번째의 경우인 분별의 인식을 떨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인식을 떨어낸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 자체의 온전한 실상을, 마치 칸트의 물자체를 인식하기 위한 것처럼 의식(분별 인식)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분별을 통하여 생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번째 생명을 인식은 하되, 제한적(상대적)인 생명 인식이다. 이것이 분별을 통한 생명인식이다. 분별을 통한 인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무한한, 즉 절대적인 생명의 인식이다. 물론 이는 분별을 떠난 생명의 인식이다.

           역시 분별을 떠나지 않고는 무한한 절대적인 생명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욕망의 성격상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욕망하는 대상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다라서 뭔가 부족한 생각이 드는 나머지 계속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욕망의 특성인 것이다.

언제인가 욕망이 대상(분명한 목적)을 제대로 만나기 전에는 욕망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히치너가 헤밍웨이도 그의 아버지처럼 자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매우 걱정하자, 헤밍웨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다짐했던 이야기들을 집필하는 일도, 좋은 시절 자신에게 약속했던 일들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예순두 살의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나?"

헤밍웨이는 지하실로 내려가 총이 있는 창고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그는 수많은 총들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12구경 2연발식 보스 권총을 꺼내어 총알 2개를 장착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 메리가 자신을 즉시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현관으로 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총부리를 입안 깊숙이 넣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자....

비록 이렇게 헤밍웨이처럼 자살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허망함에 고통을 겪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성향은 양면적이기 마련이다.

무한대의 욕망으로 가던가, 욕망을 잃어버린 탓에 절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면에 놓인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를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모든 행동을 떠나 살아야 하는 것은 죽은 듯이 사는 것,

이것은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을 바라지 않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살기 위한 행동을 떠나 사는 것),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이 사는 것이다. 이는 곧 금욕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지극한 도의 정수는 깊고 아득하며 지극한 도의 극치는 컴컴하고 잠잠하다.

그래서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정신을 고요하게 하고 있으면, 육체가 바야흐로 스스로 바르게 될 것이다.

반드시 고요하게 하고 바드시 맑아 그대의 육체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 그대의 정신을 움직이지 않으면 곧 오래 살 수가 있다.

눈으로 보는 바가 없고 귀로 듣는 바가 없고 마음으로 아는 바가 없으면, 그대의 정신은 바야흐로 그대의 육체를 잘 지켜 오래 살 것이다.

그대의 내심을 삼가고 그대의 외물에 대한 욕망을 버리게. 지혜가 많으면 실패하리라 -장자-

 

그래서 과도한 기쁨이나 고통의 근저에는 언제나 과오나 망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심정의 두 극단의 긴장은 통찰에 의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과도한 기쁨은 생활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망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즉 끊임없이 새롭게 고뇌를 만드는 소망, 혹은 불안의 영속적인 충족이다.

이런 종류의 망사은 각기 후에는 망상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고,

그 망상이 없어진 후에는 망상의 출현에 의해 기쁨이 생긴 것과 똑같은 정도로 쓴 고통을 가지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망상은 뛰어내리는 것 밖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높은 곳에 비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런 높은 곳은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치를 알게 된 후, 이것이 마치 자기의 성과인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타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도교든 밀종이든 입만 열면 전문 용어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먼저 경전상의 지식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앞 사람들이 수련한 성과를 가져다 자신의 성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알고, 원인을 결과로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불교수행법 강의-

 

예술가는 욕망이 끊어졌기에 이에 따라서 절망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금욕 수행자는 욕망이 없는 이 지점에서 더 나은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과 그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껏 거쳐온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우리의 인식은 생명과는 무관한 무지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비록 생명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현상 세계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나머지 생명의 인식 역시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세 번째는 제한적인 입장을 벗아난 인식으로, 곧 견성의 입장이 되어, 원초적인 생명, 즉 무한 생명을 인식하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제한적인 인식을 벗어나는 것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따라서 제한적인 인식을 벗아난 상태란 단지 무한 생명을 인식할 수 있는 터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흐름을 따라서 흘러가면 사람을 낳고 만물을 낳으나, 그를 거슬러 올라오면 조사를 이루고 부처가 된다.

흐름을 다라서 흘러가는 것은 만물과 내가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스승이 아니면 어찌하여야 할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하루살이같이 보고, 큰 진리는 하늘과 땅도 물거품과 같이 본다.

오직 생명활동을 주재하는 으뜸 신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본성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그 위에 있다.

 

 

 

 

 

최하위 직급에서 한 단계 오른 후부터 당신은 말과 글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에 따라 평가된다 -피터 드러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각본을 완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눈으로 보고 배우는 시각 유형에 속한다.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력있는 주장의 5단계를 따른다.

1.청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2.해결해야 할 문제나 대답해야 할 의문을 제기한다.

3.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4.제시한 해결책에 따른 구체적인 혜택을 설명한다.

5.행동을 요청한다.

 

청중은 재미와 정보를 원한다.

그들은 제품 및 사용법에 대한 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얻기를 원한다.

 

청중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프레젠테이션에 흥미를 잃는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일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진정한 만족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일을 찾으세요.

 얼른 일을 하고 싶어서 해가 뜨기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일 말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에너지가 없고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뛰어난 리더는 사람들을 더 나은 미래로 향하게 만든다.

 

리더는 미래에 매혹당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변화와 진보를 추구해야만 리더가 될 수 있다.

리더는 머릿속으로 더 나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간극은 리더를 자극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거기서 리더십이 나온다.

 

당신은 그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미치광이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서 천재를 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자신이 가장 크게 열정을 느끼는 일을 파악하라.

그리고 그 열정을 사람들과 공유하라. 사람들은 감동받고 영감과 믿음을 얻기를 바란다.

그들이 당신을 믿도록 만들어라.

 

대부분의 프레젠터들은 회사나 제품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미리 만들어 놓은 헤드라인이 없으면 일관된 메세지를 전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프레젠테이션은 헤드라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10단어 내외로 사업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면 관심도 없고 투자할 생각도 없습니다.

 

한 슬라이드에 잡다한 내용을 넣은 것은 프레젠터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인지 작용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글머리 기호는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도구다.

 

리더의 임무는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2분안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로 듣는 말은 눈으로 읽는 글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슬라이드에 너무 많은 내용을 넣으면 청중의 뇌에 부담을 준다.

 

메세지를 충분히 숙지한 뒤, 자신감을 갖고 아이디어를 단순하고 명확하게 전달한다.

 

프레젠테이션은 시각적 효과가 강할수록 잘 기억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라고 말했다.

 

숫자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라. 청중의 생활과 밀접한 내용으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라.

 

눈맞추기는 정직과 자신감을 반영한다. 눈길을 피하면 자신감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청중과 교감을 유지하려면 항상 눈을 맞춰야 한다.

 

자신이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녹화해서 몸짓과 화법을 점검하라.

동영상으로 자세를 교정하는 것이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향상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당신은 프레젠테이션을 오랜 시간 동안 치열하게 연습한 적이 있는가?

아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잡스처럼 말하고 싶다면 연습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외고집"이다

 

심리학자 k. 앤더슨 에릭슨은 농구, 체스, 골프, 다트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연구했다.

에릭슨은 그들이 '세심한 연습'을 통해 기술을 연마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그들은 단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기술이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다른 이의 의견을 들으며, 장기적인 개선을 추구한다.

에릭슨은 뛰어난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체적인 기술을 연습한다고 주장했다.

 

해결책의 90퍼센트 이상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당신의 동료들은 대개 당신이 상처받을지 모르는 지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화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냉정하게 문제를 지적한다.

 

'주제 나누기'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모든 질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

1.가장 흔하게 나올 질문들을 파악하라.

2.질문을 주제별로 나누어라.

3.각 주제별로 최선의 답변을 준비하라.

4.질문을 잘 듣고 핵심단어를 파악하여 정확한 범주를 찾아내라

5.질문자의 눈을 마주보며 자시 있게 답변하라.

 

자연스러운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5단계

1.각본의 전체 문장을 파워포인트의 '메모'란에 적어라

2.각 문장의 핵심 단어에 밑줄을 긋고 연습을 시작하라.

3.각 문장에서 피요없는 내용들을 삭제하고 핵심 단어만 남겨라

4.슬라이드마다 핵심 주제를 기억하라.

5.메모를 보지 말고 슬라이드를 참고하면서 전체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하라.

 

가장 중요한 일은 열정과 직관을 추구할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열정과 직관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압니다. ... 항상 배고프게, 항상 미련하게 사십시요.

 

 

 

해피 엔딩으로써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이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반드시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이다.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국가이성은 처음부터 이성적 토대를 그 분야에서 배제해버리려는 원리이다.

바로 이처럼 간단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유와 어울릴 수 없다.

국가이성은 진리도 정의도 전제하지 않으며 오직 항복만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의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인식은 관념을, 관념은 개념을, 그리고 그 개념을 담은 용어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관념표상의 작용을 일으켜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사상을 표현.전달하려는 용어가 그 사상의 내용이나 성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면 전달된 뜻이 더욱 왜곡.변형되거나 혼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그러진 유리를 통해 보는 사상은 일그러질 것이고 그것으로 형성된 개념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스트롱맨 폴리시'란 "외국의 명령과 지배를 수락할 정도로 충분히 약하되 국내의 민중에 대해서는 명령과 지배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를 골라

그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지속하는 방법이다.

 

노령은 관념과 실천화의 침체와 퇴화를 뜻한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모택동 자신이며 젊은 대중의 지도력 참여의 문을 구조.제도적으로 꾸준히 개방한 것이 그 자신이다.

 

너무도 위대한 혁명지도자의 뒤에는 집단지도체제라는 과도기가 불가피해진다.

그것은 선배지도자의 권위가 너무도 압도적이였다는 본인의 불본의 과실과, 자기에 비길 후계자를 적극 키우지 않은 적극적 책임의 결과이다.

 

오히려 전능하신 신이 창조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토록 불완전하고 제약많고 약점투성이인가를 원망하게 되지만,

차라리 아메바에서 진화한 것이라면 용케도 이만큼이나 진화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인간은 무한히 진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정치화한 현대의 교리는 무엇이든 여태까지 지켜온 사고나 가치나 체제나 질서의 변화는 그 사회의 기틀을 위태롭게 한다는 보수적 정치교리로 경화되어 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안녕과 안정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국가이익' 신학으로 정치화한다.

 

그러기에 자기가 믿는 신앙과 대립하거나 그 신앙에 질문을 던지는 체제나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허위.사기.음모.부정.불의는 용서받는다는 식이다.

실제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이 비밀문서로서 밝혀진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1,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부터 제2차대전 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해방투쟁

2.전 베트남민주공화구 수립(1955/10월)부터 전후 베트남 민족 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지나휴전협정 성립(1954/7월)까지의 투쟁

3.남베트남공화국 수립(1955/10월)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 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상태

4.그 이후 남베트남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현대의 특징이라면 아름다운 단어일수록 환상적이다는 것.

TV의 광고를 보노라면 인간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 줄 듯한 좋은 단어들은 다 동원되고, 행복이 손안에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현명한 것도 아니고 인생을 잘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삶의 질은 못살던 시절보다도 못하다.

이 책을 읽노라면 인간이란 존재에서 무얼 기대해야할지 답이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이 인간이기에 결국 그 비난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보자. 그리고 나의 자식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고자 노력해 보자" 이렇게 다짐해 본다.

 

이제 우리는 위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오염, 소음, 부정부패, 공포 등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공포라는 가장 오래된 감정은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이제 우리는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이제 위기는 이곳에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머지않아 국가나 사회같은 '위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내려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려야만 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라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출현했던 위기들과 다릅니다.

권력과 정치의 분리는 모든 '위기'가 당연히 필요로하는 것, 즉 나아갈 길을 선택하고 거기에 필요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는 주체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부재는 별거 중인 권력과 정치가 다시 합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계속해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는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국민을 지도하고 통제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경제적 계산에 종속시킵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공공서비스에 생존력 지표들을 도입했습니다.

공공서비스가 마치 사기업이나 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교육, 건강, 사회보장, 고용. 과학 연구, 공공 서비스, 안전 등의 분야들을 분석표에 따라 관리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책임을 없애버리고 국가가 전통적인 권한들을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그러한 권한들을 점차 민영화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권력 상실은 경제 정책의 약화를 낳고, 이는 공공서비스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국가의 위기는 다음의 두 요소 때문입니다.

하나는 국가가 경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결정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무능력의 결과로서 적절한 사회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긴축재정, 탈 규제, 제도적 권한들의 이양 등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국가 장치와 갈수록 줄어드는 그 권한들을 존속, 유지시키기 위한 조치들일 뿐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위기의 국가는 공공복지를 제공하고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 시민에 빌붙어서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을 쓰는 '기생충'이 됩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국가없는 국가주의'입니다.

'국가없는 국가주의'는 앞에서 이야기한 짐을 개인에게 전가하고는 스스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간접적 '거버넌스'의 한 형태입니다.

지금 당장 대체물을 찾을 수 없는 포스트-베스트팔렌 모델의 위기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이면에는 소위 '신자유주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되 원래 국가의 책임이던 것들의 대부분을 사적 부문에 넘겨버립니다.

그 결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통짗하는 완전히 새롭고 이상한 지배 형태 즉 '국가 없는 국가'가 출현합니다.

 

우리는 복지 시스템들이 하나씩 하나씩 없어져 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노는 무관심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아 뭉개면서 가장 가가이에 있는 생명 줄에 매달리는 전시경제나 비상시처럼,

사람들은 갈수록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단지 일시적 위기에서 살아남고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기는 데만 신경 쓸 뿐 다른 문제에는 무관심합니다.

 

'진보'는 한 쪽 방향으로의 일직선적인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전 보장이 견디기 힘들 만큼 지나치게 간섭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느껴지면 자유에 대한 욕구 쪽으로 갔다가,

자유가 극소수의 승자와 너무나 많은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일이라고 느껴지면 안전에 대한 욕구 쪽으로 가는

끊임없는 왕복과정에서 추진력을 얻는 일종의 진자같은 것입니다.

 

같은 이상을 품고 공동의 가치들을 믿고 그것들을 위해 함께 싸우고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잠재적 적이 아니라

같은 목표들을 추구하는 동료로 느끼는 사람들 간에 존재하던 신뢰의 끈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평등한 사람들 간의 연대는 공동의 목적과 가치를 갖는 공동체에 기초하는데, 이상들이 실패하게 되면 그러한 연대가 존재할 근거가 사라지게 됩니다.

도리어 최근까지 친구로 여겨지던 사람이 이제는 경쟁자, 경계해야 할 적이 됩니다.

 

많은 정치 체제들이 냉소적인 속내를 감춘 채 시민들을 속이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표방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민주주의가 아니면서도 거짓 가정들과 기만적인 약속들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끌어 모읍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서,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의 지배라는 원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노골적인 의심까지는 아니더라도 갈수록 짙은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25세 이하의 인구 중 25퍼센트는 실업 사태에 있습니다.

Y세대는 기간제 근로 계약과 인턴 근무를 피하기 어려운데, 이 두 가지 근로 형태는 모두 교묘한 책임 회피와 노골적이고도 무자비한 착취를 위한 편법입니다.

2006년 인턴 사원은 대략 60만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120만 명과 150만 명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싸움에서 현재는 자본주의가 우세한 국면에 있습니다.

적어도 힘의 불균형을 회복할 기반을 되찾기 위한 민주주의 측의 반응이 시작될 때까지는 이런 국면이 이어질 것입니다.

 

탈규제는 공적 권력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탈규제는 신자유주의, 서비스의 민영화, 복지국가의 급속한 축소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이 행보의 끝은 균형 예산입니다.

국가는 공기업이 아니므로 영리를 목적으로 할 필요가 없고 사회복지를 제공하고 부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균형 예산이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 모순입니다.

프랑스 여행중 묵었던 곳

사람이 설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의 샤워실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