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이자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스토아 철학자였다.

 

스토아 철학은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거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도시국가라는 자족적인 활동 공간을 빼앗긴 개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거대해진 제국과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개인 사이의 불균형을 극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더 중시하거나 세계를 덜 중시하는 방법이 있었다.

첫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 스토아 학파이고, 두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 에피쿠르스학파였다.

에피쿠르스 학파는 철저한 유물론의 신봉자들로, 세계는 원자들이 우연한 결합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에피쿠르스학파의 우주가 무정부주의적이라면 스토아학파의 우주는 질서정연하다.

우주 또는 자연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며, 이성은 신, 운명 도는 섭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는 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꿋꿋하게 참고 견디는 것이다.

'자연에 맞게' 오늘의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사회 개혁이 아닌 개인의 자아완성으로, 또 개인의 자아 완성은 도적적 수양으로 한정한다...

에피쿠르스학파가 개인의 철저한 자유를 주장한 것과 달리 스토아 철학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면서도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의무를 권장한다....

스토아 학파의 목표는 '자연과 일치된 삶'으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죽음도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는 그 생각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몰두할 뿐 업적을 통해 얻게 될 명성은 고려하지 않는 사람처럼.

 

누가 자연의 작용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어린애 같은 사람이다.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에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가장 긴 삶도 결과는 가장 짧은 삶과 마찬가지다....

누가 같은 광경을 100년 또는 200년 또는 영원히 보느냐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나 가장 일찍 죽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잃는 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현재뿐이라면 현재만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은신처는 없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당장 더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특히 그러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은 정돈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늘 그런 은신의 기회를 마련해 너 자신을 새롭게 하라.

네 원칙들은, 그것들을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당장 네 근심을 모두 쫓아주고

네가 돌아가고 있는 것들에게로 아무 불만 없이 너를 보낼수 있도록 짧고 원초적이어야 한다.

 

너 자신이라는 작은 영역으로 은신할 생각을 하라.

첫째 사물들은 네 영혼을 장악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영혼 밖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불안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의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둘째, 네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변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 자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경험했는지 항상 명심하라. "온 우주는 변화이고, 인생은 의견이다."

 

죽음은 출생과도 같은 것이며, 자연의 신비이다.

출생이 여러 요소들의 결합이라면 죽음은 그것들로의 해체로, 조금도 곤혹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잠시 뒤에는 너희들의 이름조차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명심하라.

 

아름다운 것은 어떤 종류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찬미는 그것을 이루는 성분이 아니다.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물이 너에게서 오고, 너 안에 있고, 너에게로 돌아간다.

 

무엇을 행하든 그에 대한 열성은 그 가치와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는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음으로써 싫증이 나서 그만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를 기꺼이 클로토에게 맡기고 네 운명의 실로 그녀가 원하는 베를 짜게 하라.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모두 하루살이이다.

 

네 마음은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최선의 복수 방법은 네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각각의 사물이 완성되는 것은 우주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 밖에서 그 사물을 에워싸거나, 그 사물들 안에 내포되어 있거나,

그 사물의 외부에 딸려 있는 다른 본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임무에 대하여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철학이 너를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라.

신들을 공경하고, 인간들을 구하라. 인생은 짧다.

지상에서의 삶의 유일한 결실은 경건한 성품과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양 살아가되 흥분하지도 나태하지도 위선자가 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완벽한 인격의 특징이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은 버리고 길든 짧든 남은 인생을 네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

따라서 네 본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숙고하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에도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너에게는 세 가지 관계가 있다.

하나는 너를 담고 있는 그릇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서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의 모든 원천인 신적인 원인과의 관계이고,

나머지 하나는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철학하기에는 인생의 어떤 다른 상황도 지금 네가 놓여 있는 상황만큼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영혼 속에 내재한다.

 

슬픔이 허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허약함의 표시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상처받고 항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목표가 늘 한결같지 않은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하여 한결같을 수 없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빼앗아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옛날에는 카폐가 단순히 사람을 만나고 차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었다.

돈 없는 작가들의 회의실이기도 했고 집필실이기도 했다.

가난한 예술인들이 예술 세계를 펼치는 산실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매년 2월이면 베네치아인들의 마음과 손길이 바빠진다.

카니발의 계절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409개의 다리가 섬과 섬을 잇고 있다.

 

카사노바는 1755년 5년형을 선고받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피옴비 감옥에 투옥되었다.

..두 번째 탈옥 시도는 옆방에 수감된 수도사 발비와 성경책 속에 쪽지를 껴 넣어 주고 받으면서 바닥이 아닌 천장을 파내어 이루어지는데 결국 함께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감옥을 나서면서 그다운 말을 남겼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소."

그러나 카사노바에게 있어 여자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봉사 대상의 개념이었다....

그의 묘비에 적인 "나는 미치도록 여자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여자보다 자유를 더 사랑했다"는 말이 그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나는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카사노바의 인생 여정을 관통한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이란 '빛과 움직임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존스는 생동감있는 의상과 독창적인 무대 디자인으로 최고의 가면극을 만들어냈다.

 

로마네스크란 '로마 풍'이란 뜻으로 10세기말에서 12세기까지의 건축양식이다.

와관상 특징은 외벽 장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블라인드 아치의 열이다.

'불라인드'란 장님이란 듯으로 아치 안의 벽이 부분적으로 막혀 있거나 아예 통째로 막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외벽만 아치 형태의 모습을 띠고 있다.

대략적으로 볼 때 원통형 건물이거나 블아인드 아치 또는 여러 개의 아치열이 늘어선 건축물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라 보면 틀리지 않는다.

 

로마네스크 다음 세대는 고딕 양식이다.

고딕 양식은 12세기 중반부터 약 2세기 동안 프랑스, 영국,  북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양식이다.

두 손을 모으고 사람이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한 형태로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목적인 '신에게 더 가까이'를 표현하였다.

 

바로크 시기는 르네상스가 기울고 새로운 역동적인 변화를 갈구한 16세기 중엽 이후다.

건축에서는 팔라디오가 그 시대를 점한다. 그래서 이 시기를 후기 르네상ㄴ스 시대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포루투칼어로 '일그러진 진주'에서 온 말이다.

정적인 단정함이 아니라 사람이 막 뛰쳐나가려 하거나 넘어지려는 찰나의 모습 등의 동적인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로마 트레비 분수나 나보나 광장에 있는 피우미 분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라 할 수 있다.

직선에 균형미와 편의성이 들어 있다면 곡선에는 조화를 이루는 삶의 비결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달려가기보다는 꾸불꾸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이렇듯 삶의 두 객체, 문명과 자연, 즉 지식과 지혜를 적절히 분배해 놓은 이들의 혜안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 에밀리아 로마냐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자신의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는 느림을 삶의 활력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한 방편이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행동에 옮겨, 더 빨리 목표를 쟁취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빠름으로 달려가면 갈수록 우리의 삶이 여유로워지기는커녕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하는 데 있다.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삶은 각박해지고 일상은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삶을 즐기려면 느려져야 한다.

느림이 게으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다르다.

게으름은 삶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 뿐이지만 느림은 삶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다른 선물이 아닌 포도액이 든 발사믹 나무통을 선물한다.

아이가 자라서 20살이 되면 자연스레 20년 된 발사믹 식초 한 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랜드 투어는 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까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예술을 관망하면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것을 말한다.

이 여행자들은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까지 갔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음식은 역사이고 문화이며, 생활이고 삶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잘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이는 음식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와 달리 식사중에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문학을 논하 듯 음식을 노하고, 요리사를 작가처럼 평가하는 것을 하나의 식사 예절로 여긴다.

"인생의 절반은 잘 차려진 식탁의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잘 먹은자의 삶만큼 여유롭고 행복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빈치마을에서, 미켈란젤로는 동남쪽으로 65km 떨어진 카프레세 미켈란젤로 마을에서 태어났다.

 

콜로세움은 높이 49m, 지름 187m, 둘레 527m나 되는 4층 구조물로서 동시에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로마에는 7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중 건국신화의 진원지인 팔라티노 언덕이 가장 유명하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의 중심지로 유적 대부분이 이곳 주변에 몰려 있다.

 

네로는 서기 54년 양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에 오른다.

그러고는 친아들의 존재가 두려워 55년에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59년에는 친어머니 소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에는 스승 세네커를 자결케하였으니

인류 역사상 이만큼 잔인한 인물은 둘도 없을 것이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사관 오긍이 편찬한 책이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가히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성쇠와 왕조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구리 거울과 역사 거울, 사람 거울을 흔히 삼경이라고 한다.

원래 경은 감을 바꿔 표현한 것이다. 동감.사감.인감을 삼감이라고 한다.

군주가 삼감을 통해 스스로 경계하며 제왕의 덕을 쌓는 것이 바로 삼감지계다.

 

창업의 시기에는 무력을 기반으로 한 패도, 수성의 시기에는 덕치에 기초한 왕도를 구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천하를 거머쥐고자 하면 반드시 큰 뜻을 품어야 한다.

뜻이 작으면 그릇이 작고, 그릇이 작으면 담을 게 없다. 그릇이 커야 사람이 모인다.

그릇을 키우려면 제왕 스스로 겸허해야 한다. 그것이 사우정신이다.

 

이건성에게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단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최상의 방안을 찾느라 머뭇거린 게 결정적인 패인이다.

 

원래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면 모험을 피하게 마련이다.

사생결단의 승부수는 대개 궁지에 몰린 측에서 던진다.

 

창업 때는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할 수밖에 없고, 수성 때는 능력과 덕성을 겸비한 인물이 바람직하다.

 

군주가 유념해야 할 네가지 불화가 있다.

첫째, 나라가 하나로 결속되어 있지 않을 경우 출병해서는 안된다.

둘째, 병사가 하나로 뭉쳐 있지 않을 경우 출진해서는 안된다.

셋째, 진영이 하나로 단합되어 있지 않을 경우 진격해서는 안된다.

넷째, 진격과정에서 일사분란하지 않을 경우 결전을 치러서는 안된다.

 

신하들을 표현할 때 맡은 역할에 따라 통상 고굉지신, 후설지신, 이목지신,등으로 분류한다.

고굉지신은 군주의 넓적다리와 팔뚝의 역할을 하는 신하로, 군주 곁에서 보필하는 중신을 말한다.

후설지신은 군주의 목구멍과 입을 대신하는 신하로, 군주의 명을 보정에 알리거나 조정의 여론을 군주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승지내지 언관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이목지신은 말 그대로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신하로, 사정기관에서 일하는 관원을 지칭한다.

 

미자하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미자하의 행동이 전에는 칭찬받았다가 후에 책망을 받게 된 것은 군주의 애증이 변했기 때문이다.

군주에게 총애를 받을 때는 지혜를 내는 것마다 군주의 뜻에 부합해 더욱 친밀해졌다.

그러나 미움을 받게 되자 아무리 지혜를 짜내도 군주에게는 옳은 말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질책을 받으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군주에게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이 과연 구준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미움을 받고 있는지 여부를 살핀 뒤 유세해야 한다.

 

시작을 훌륭하게 하는 자는 실로 많으나 능히 끝까지 이어나가는 자는 대개 적은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 '천하를 취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민심의 향배일 뿐입니다.

물은 능히 배를 띄우거나 전복시킬 수 있습니다. 백성은 물과 같으니 의당 깊이 삼가야 합니다.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치 내달리는 수레를 썩은 밧줄로 부리고자 하는 것처럼 위험하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덕이 지극히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는 이른바 무위치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좇아 인위적인 요소를 최소화한 다스림을 말한다.

 

한비자가 독선의 독버섯을 먹고 자라는 권신의 전제를 거듭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든 뒤 보위를 빼앗거나, 외국과 결착해 나라를 통째로 팔아버리는 자들이 바로 권신이라고 본 것이다.

역대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거의 예외 없이 패망 직전 조상의 사당으로 가 피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빌었다.

군주에게 사직은 가문이나 다름없다. 사직이 무너지는 마당에 손을 놓고 있을 군주는 세상에 없다.

설령 방탕한 행보를 보였을지라도 이는 작은 사안에 지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신하들이 충성을 다하지 않고 군주와 나라를 내준 데 있다.

 

'짐은 태평한 세월 뒤에 반드시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고, 커다란 혼란 뒤에 다시 태평한 세월이 온다고 들었소.'

 

사람은 일이 잘 풀릴 때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모든 일이 자신이 잘났기에 술술 풀리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과 희로의 감정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불문하고 모두 똑같습니다.

현명한 자는 이를 절제할 수 있어 도를 넘지 않도록 하지만 우매한 자는 방종한 나머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대부분 도를 넘깁니다."

 

"군주가 된 자의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보존하는 데 있소.

백성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몸을 받들게 하면 이는 곧 자신의 정강이를 베어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과 같소.

배는 부를지언정 곧 몸이 쓰러져 죽고 말 것이오.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리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스스로 몸을 바르게 해야 하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새는 숲에 둥지를 틀지만 나무가 높지 않을까 우려해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고,

물고기는 물속에 살지만 물이 깊지 않을까 우려해 바닥에 굴을 만든다.

그럼에도 새와 물고기가 사람들에게 잡히는 것은 모두 먹을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소."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이상 세계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힘들다.

이 책은 우리가 말하는 천국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단, 조건이 있다.

그 천국을 현실에서 보려고 하고 그렇게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있는 좋은 글을 정리해 본다.

 

하늘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늘이다.

하늘마음은 몸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마음은 우주에 가득하다.

그러므로 하늘마음을 회복한 사람은 우주가 자기의 몸이다.

 

큰 경지를 얻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욕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보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지금 그대로가 천국이다.

천국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늘과 하나이고, 우주와 하나이며, 만물과도 하나이다.

이 하나인 본질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바로 천국으로 보인다.

 

전체로 보면 다르게 보인다. 내 몸 하나만이 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다.

전체로 보면 경쟁하는 것이 삶을 건강하고 충실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보인다.

내 몸이 늙는 것은 모두가 자라는 현상으로 보이고, 내 몸이 죽는 것이 모두가 살아가는 현상으로 보인다.

힘센 자와 가진 자가 약한 자와 없는 자를 착취하는 것을 보면, 약한 자를 힘센 자로 만드는 과정이고, 없는 자를 있는 자로 만드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악한 자들이 잘 살고 착한 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악한 자들이 망하고 착한 자들이 성공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죄 없는 토끼가 늑대의 밥이 되고, 사슴이 사자에게 먹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임을 안다.

토끼와 사슴은 풀을 먹고 산다. 토기와 사슴의 수가 너무 많으면, 초원의 풀이 모자라서 모두가 죽게 된다.

그러므로 늑대와 사자가 적정한 수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잡아먹는다. 그것이 토끼와 사슴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이다.

세상은 지금 이대로 천국이다. 불만을 가질 것이 없다.....

이 세상이 혼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본질을 잊어버린 사람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일에 초연할 수 있다.

 

맑을 '소瀟', 깨끗할 '灑쇄', 동산'園원'.

소쇄원은 인품이 맑고 깨끗해 속기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산이란 듯으로 이해하면 된다.

말하자면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란 뜻이다.

 

하서 선생은 알았다. 사람도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다.

태어나는 것도 자연이고, 자라는 것도 자연이며, 죽는 것도 자연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어나는 것과 죽은 것이 차이가 없다.

 

긴장하고 있으면 싸우지 않아도 평화롭지않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마음 푹 놓고 있어야 평화다.

 

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인생도 이와 같이 흐른다.

물은 흘러 사라지지만, 근원의 물은 영원하다. 사람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늙고 죽어가지만, 삶의 근원은 변함없다. 그 근원을 보고 살면, 변함이 없다.

 

온 대밭의 대나무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고 있듯, 산골짜기에 가득한 뭇 생명들도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하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모두가 하나 되어 흐뭇해진다.

하나가 되는 것보다 더 흐뭇한 것은 없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가난에 견디지 못하고, 천함에 견디지 못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양심을 파는 것이 다반사다.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도대체 없다.

그러나 저 돌 틈에 뿌리박고 있는 외로운 매화도 그렇지 않다.

먹을 것도 없어 가지가 앙상하고 잎이 성글어도 태연하고 초연하다.

언제나 만족할 뿐, 아부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는다.

영양이 없는 맑은 물도, 얕아서 보잘 것 없는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앙상한 가지, 성긴 잎은 풍성한 그림자도 못 만들지만, 그대로 만족한 채 불만이 없다.

만족하면 행복하다. 공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행복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도로 찾는 것일 뿐이다 -맹자-

잃어버린 한마음을 찾은 사람은 한마음으로 산다.

 

나는 부모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나와 부모는 하나다.

나와 부모가 하나면 나와 형제가 하나다.

나와 형제가 하나면 삼촌과 나는 하나다.

이런 방식으로 확대해가면, 하나인 관계가, 사촌,오촌,육촌,칠촌 등으로 무한히 확산되다가 급기야 모든 사람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사람만이 하나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도 하나이고, 모든 물체와도 하나다.

사람이 만약 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삶이 영생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이 어떤 심판을 통과함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하나의 차원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늙음의 슬픔과 죽음의 고통이 없다.

그러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행복이란 바로 이런 행복이다.

 

한국인은 몸을 챙기는 일에는 서툴지만, 마음을 챙기는 일에서는 능력을 발휘한다.....

역사의 봄이 오면 마음을 잘 챙기는 사람들에게 향기가 난다.

마음을 챙기는 능력으로 보면 한국인을 앞설만한 사람이 없다....

힘을 자랑하던 시대에는 규모가 크고 웅장한 문화재가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역사의 봄이 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마음을 중시하고 마음을 챙기는 일에 몰두하는 한국인은 큰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은 힘을 자랑하는 천박한 문화재다.

한국에는 그런 문화재가 없다. 한국의 문화재는 마음을 챙기는 것으로 일관한다.

마음을 챙기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국의 문화재가 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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