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올려 봅니다.

 

MIT 기술사회학의 셰리 터클 교수는 우리가 맞이한 세상을 '다함께 홀로인 시대'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저서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통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돼있지만, 반면 정서적인 연결은 가장 약하다고 지적한다.

 

사람은 언제나 말을 하고 싶어한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접했다고 하자.

과연 당신은 혼자만 알고 넘어갈까. 아마 아닐 것이다.

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공유할 것이다.

 

사실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는 순간, 그 사이에는 여유와 사색이 있다.

 

사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짜의 가치는 커진다.

 

끌리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큰 내적 동기가 된다.

즉 일의 중심에 내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에 의미를 느끼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더 있다.

자신과 그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다.

내가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그에 동조할 사람이 있을 때 내적 동기는 더욱 증폭된다.

 

내적 동기의 과학을 연구하는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사람들의 자발적 열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세 가지 요인으로 주도성, 전문성, 목적성을 제시한다.

주도성은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며, 목적성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고 싶다는 열망이다.

누구나 자기 의지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세상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더해 사화학자 레스기블린은 저서 <인간관계의 기술>을 통해

누구나 타인에게 온전히 수용되고 인정받고 가치있는 존재로서 공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외로워진 게 아니라 집단이라는 익명성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화되는 만큼 그리고 외로워지는 만큼 내가 속한 집단보다 나의 솔직한 생각에 주목한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신뢰하자, 마치 그들은 지능지수가 순식간에 두 배로 껑충 뛴 듯 보였어요."

 

밀그램의 실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불합리하기 짝이 없더라도 본인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권위자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의 복종 심리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것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명령일지라도 말이다.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움직인다.

이성과 감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성은 결론을 낳는 데 반해 감성은 행동을 낳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사실에 입각해 구매 결정을 내리는 소비자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순간의 감성이다. '나는 이게 좋아. 마음에 들어."

 

이성은 논리다.

논리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기가 쉽지 않다.

 

훌륭한 달변가는 곧 훌륭한 스토리텔러다.

그들은 심연의 의미를 건드리는 Why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How로 이어가고, 마지막에 What을 꺼내든다....

모두 내면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Why -> How -> What으로 이어지는 골든 서클은 효과적인 메세지 전달 구조인 동시에 강력한 내적 동기를 일으키는 방법인 것이다.

 

소통이든 변화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가 정서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과 정서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땅끝에서 온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다....

- 과거에 대한 기억

축척된 과거의 기억? 미안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은그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거나 아예없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닦인다고 생각해보라.

한동안은 옛날에 살았던 곳의 기억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기억은 새로운기억으로 지워지고 만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아무리 애써도 과거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 순간의 강렬한 기억조차 펙트로 남았을 뿐이다.

고흐와 친구였고 부처를 만났다는 사실들은 계속 기억으로서 가치가 있어 마음속에 남아 있다.

 

-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결국은 늙어 죽게 마련이고,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도 필연적으로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거나 끌리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번 느끼면 떨쳐낼 수 없으니까.

이것들은 삶 속에서 언제나 찾아 온다. 단지 사랑에 여원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부질없는 바람일 분이다.

 

- 축적된 지식이나 지혜에 관해

한때 교수로서 연구했고 학생을 가르쳤다. 과학적 발견을 위해 많은 시간을 연구와 공부에 할애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현재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지식과 지혜밖에 없다.

왜? 아무리 공부하고 연구해도 결국 쓸모없는 지식이 돼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새로 발견되는 지식의 극소수만 접할 뿐이다.

지구 곳곳에서 새로운 지식들이 속속 발견된다.

그러나 과학이나 이동 수단,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일수록 나는 내가 머무는 곳에서 발견되는 지식만을 접했을 뿐이다.

반대로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동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가 더 어렵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현 세대의 지식을 따라잡을 수 없다.

내가 똑똑한 만큼 남들도 똑똑하다는 사실만 발견할 뿐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대의 지식이 과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다 아는 시대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의 지혜도 마찬가지다.

21세기 첨단의 시대에조차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깨달음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있다.

14,000년이 지난 이 순간에서조차. 결국 나는 현 시대를 앞서갈 수 없었다.

내가 많은 지식을 축적하려 애쓰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연결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었다.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너무 의식하지 말며,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 충실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살자는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물 흐르듯이 내 생각과 의식을 보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혼자 아무리 가치있는 정보를 붙잡으려 애써도,

설사 붙잡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낱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유사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발견에 희석되고 만다.

오히려 내 것을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확산시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명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중심이 되는 조직화되지 않은 조직,

그러나 동시에 거대한 하나의 정신적 생명체를 형성하며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호기심은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어느 날 맺힌 하나의 동기는 우리의 삶을 그 전과 그 후로 구분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아이같은 호기심에서 탄생한다.

마음 속의 어린이를 포기하지 마라."

 

당신이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상처 때문에 당면한 고민이나 생각들을 지나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금의 일은 과거의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그것이 현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그것을 운명과 결부시키면서 미래까지 속박하곤 한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꼭 해야할 일이 있다면 인생 전체에 걸친 배움이다.

어느 시대에 살건 항상 배우는 자세만이 세상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의 직업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안정적 미래를 위해 배움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책 속의 좋은 글을 옮겼다.

 

레이 커즈와일을 비롯한 일부 미래학자들은 미래에 기술 발전의 속도가 급속히 변함으로써 그 영향이 넓어져

인간이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기점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술 범위에 속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미래학, 미래예측의 방점이며, 한편으로는 마침표가 되기도 하는 시점이다.

미래학자들은 이를 싱귤래리티, 특이점이라고 한다.

 

2045 메가트렌드

.Human 4.0

.Disrupted Nation States(국가 해체)

.Internet Giants(인터넷 대기업)

.Digital Currencies(디지털 통화)

.Brain Upload(브레인 업로드)

.Immersive Life(몰입 인생)

.AI Robotics(인공지능 로봇)

.Internet of Things(사물인터넷)

.Synthetic Biology(합성 생물학)

.Disrupted Family(가족 해체)

 

2045년 일상의 가상 시나리오

.기상-스마트 하우스의 풍경

.아침 식사-3D 음식물프린터

.아침 시간-지구 온난화, 바이오 컴퓨터

.출근 준비-나노 섬유 의류, 무인기 택배

.출근-공유 경제와 무인차, 진공 자기 부상열차

.업무 1-시간제 근무, 인공 지능이 대신하는 일

.귀가-태양광 에너지, 콘투어 크래프팅, 클레이트로닉스

.업무 2-비즈니스 콜로니, 마이크로 칼리지

.오후 시간-장기 교체로 인한 수명 연장, 직접 민주주의

.저녁 식사-몰입가상현실, 탄소 배출 거래, 결혼제도

.밤 여가 시간- 하루 만에 이뤄지는 유전자 검사, 줄기세포 처방약

 

CNN은 미래학자 이안 피어슨의 말을 인용해 2050년에는 인간의 뇌를 슈퍼컴퓨터에 다운받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마인드 업로딩으로 알려진 이 기술은 두 가지로 나뉜다.

복사해서 전송하는 기술과 점진적인 뉴런 대체 기술이다. 뇌를 스캔하고 매핑해서 복사한 뒤 전송해서 저장하는 방법이다...

영화 <트랜센던스>에서 처럼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컴푸터와 가상 현실에서 살아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집을 넓게 쓰도록 해주는 나노기술

미래에 작은 집에서도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 비밀은 물질은 자우자재로 구성하는 나노기술인 클레이트로닉스에 있다.

클레이트로닉스의 핵심 기술인 나노봇 '캐톰'은 정전하와 전자기장의 힘을 이용해 스스로 움직이고 물질을 재구성해 그 형태와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클레이트로닉스가 보편화되면 집안의 가구를 여러가지 살 필요 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가구로 바꿀 수 있다.

대형 테이블이 필요에 따라 침대, 소파로 모양을 바꿀 수 있다.

 

고령 인구가 많은 미래에 나노 의류가 등장해 셀프 크리닝이 가능해진다.

세탁이라는 노동과 생활하수를 줄여주는 덕분에 고령인구에게 적절하며, 집이 작아지는 미래에서 말릴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눈으로 볼 수 없을만큼 촘촘한 나노그물은 박테리아 및 기타 유해한 세균을 퇴치해주고, 모기 등의 해충이 접근하는 것도 조절해준다.

공기는 통하되 물은 완전히 막아주는 방수 기능을 갖춰 우산이나 우비가 필요없다.

나노 기술을 갖춘 의류는 헤어지거나 구멍이 나는 등 옷이 손상되면 스스로 수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인데, 로봇과 인공지능, 3D 프린터에게 현재 인간의 일자리 90%를 빼앗기게 되면 인류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든 이동할 것이다.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사람들이 해외로 출퇴근하는 일도 불사하면서 국경의 개념이 엷어진다.

 

튜링 테스트는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기계에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테스트다.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50년에 고안했다.

 

테슬라 모터스의 엘론 머스크 회장은 닉 보스트롬의 책 <초기능>을 읽고 트위터에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잠재적으로 핵무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초지능이란 기계학습 알고리즘으로 자율적으로 대량의 데이터와 상호작용해 스스로 학습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을 이론적으로 일컫는 용어다.

한편 구글의 이사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기술을 갖게 되면, 더는 인공지능이 아니라고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능력을 갖추게 될 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로봇으로 인해 풍족해지는 미래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로봇들은 생산성에 중점을 둔 인간의 노동 대부분을 앗아갈 수도 있다.

저널리스트 마커스 울슨은 인간이 작업해야 할 일들을 점차 로봇이 대신하게 되면서 미래에 인간은 오로지 창조하는 일에만 열중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복잡하고 정교해진 로봇은 농사를 지으면서 스스로 학습하고 경험을 축적해 데이터화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사에 더 익숙해진다.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2750년에는 한국인이 멸종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2012년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한국의 출산율 1.19와 함께 전한 헤드라인 기사다.

 

인류는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게 되지만, 일자리가 소멸해 개인으로서는 더 팍팍해진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미래에는 벗 기사와 트럭 기사, 심지어 비행기 조종사들까지도 무인차와 무인기로 대체될 것이다.

건설 노동자, 수위, 회계사, 은행 및 소매업계 전문가들도 모두 자신의 위치를 잃고 실업자가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 직장인은 평생 11개의 일자리를 거친다.

그런데 일자리와 일거리가 더욱 유연해지는 미래에는 한 사람이 거치는 일자리가 더욱 많아진다.

가령 10년 후에는 보통 200~3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일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의 종류는 끝없이 늘어나고 기술의 변화 역시 급격하게 빨라진다.

계속해서 재교육을 받지 않으면 테크노 문맹이 되어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가 영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한 직장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일을 헤쳐나가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을 계속 배우는 조율과 경력의 변화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주문형 재교육 프로그램이 기술을 단번에 배울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인간이 바퀴를 발명한 지 1만년이 넘었다.

이 바퀴를 운송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5000년 전이고 말이 바퀴를 끌기 시작한 것은 약 2200년 전이다.

운송수단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마차를 자동차가 완전히 소멸시켰다.

1900년 미국의 뉴욕 5번가를 지나는 모든 운송수단은 마차였지만, 불과 13년 뒤인 1913년에는 자동차로 변했다.

이렇게 거대하고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는 기술을 우리는 파괴적인 기술이라고 한다....

2050년이 되면 도로에 달리는 차량의 약 75%는 무인차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비를 내리고 멈추는 단순한 기술에서 한 단계 나아가 태풍의 진로를 변경시키는 등 발전한 기술이 등장할 것이다.

 

1804년 전 세계 인구는 10억명에 불과했다.

1927년에는 20억명, 1999년에는 60억명으로 증가했다. 2013년 현재의 인구는 72억명이다.

유엔은 2050년 인구가 83억~109억명 사이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

또한 2100년까지 인구 증가가 적게는 96억 ~123억명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의사결정은 미래에 대한 신념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신념에 대한 다양한 응답을 수집하고 대응하는 것은 의사결정을 증진시킨다.

 

과학기술은 이미 윤리적 가치를 뛰어넘은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을 복제하거나 공룡을 부활시키는 것, 합성생물학을 이용해 수 천종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윤리적일까?

적절한 안전검사 없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구현하고, 안전한 처리방식이나 사용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가?

기초과학 연구는 사회문제와 기금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어도 괜찮을까?....

과학 기술의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세계화는 미래의 위험과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세계가 직면한 또 다른 윤리 딜레마는 노예문제다.

현재 2980만명의 노예가 존재하는데, 이는 노예무역이 창궐했던 19세기보다 많은 숫자다.

대략 1050만명의 14세 미만 어린이들이 노예와 같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정보의 공유가 실시간으로 가능해지면서 윤리관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끝나면서 점차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윤리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바람직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윤리관을 갖춰야 한다.

 

 

 

 

행복의 첫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속을 걷는 것이다.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행복은 자기 가족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다.

태양과 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경쟁심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더 배려할 줄 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두려움과 내면의 문제는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시골에선 채소밭과 닭 몇마리를 갖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서로를 지탱해 주거든요.

하지만 도시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어요. 가족들도 견디지 못하고.

 

어쨌든 우리는 웃는 아이들에게 더 잘해 준다.

그것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더라도.

 

비행기에서 가장 비싼 칸을 선택했다. 돈도 그가 전부 다 지불했다.

비록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긴 했지만,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거액이 빠져 나간 신용카드 고지서가 날아오리란 걸 알았지만.

얼마간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삶이란 어느 한 순간에 정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행복할 때는 자신이 서투르다고 느끼는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못 된다.

 

만일 어느 날 진짜로 가난해지면, 바닷가 근처 햇볕 잘 드는 도시나,

자신이 덜 가난하다고 느껴지는 가난한 나라로 은신처를 찾아가야겠다고 꾸뻬는 생각했다.

 

꾸뻬는 그녀가 정말로 좋은 여자이며, 자신이 그녀를 떠났던 것이 다시금 후회되었다.

젊었을 때 사람들은 가끔씩 바보처럼 행동할 때가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사원 앞에 서서 구름과 태양과 바람이 한 순간 산들과 어울려 노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꾸뻬는 이것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새로운 배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그것은 행복에 대한 욕망이나 추구마저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과 하나가 되어 존재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근원적인 행복감이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행복을 찾아 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가지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이라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정말 좋은 책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사람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생활 방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내가 아는 젊은 친구 중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느라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거라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졸작을 써서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되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지금의 생활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러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

비록 무인도에 살지라도 머나먼 바다 저편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지.

혼자 있는 밤일지라도 누군가가 새근새근 자는 소리에 기를 기울인다네.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는 한 고독이 닥치게 되어있어....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단언했으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네.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는 의사가 아닐세.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가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타인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내게 어떤 역할을 바라는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런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명확한 꿈이나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자네가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했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 수용'을 한다. ->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 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그래.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은 하겠지. 춤추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아.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인생에 있어 의미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 입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