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건방질 자격이 있소. 당신을 꺽었으니까.

누구의 검도 아닌 내 검으로 안 그렇소?"

 

"그 광오한 자신감, 언젠가 억센 올가미가 되어 네 발목을 잡아뜰어 내릴거다.

강호에서 건방질 자격같은 건 없다는 뜻이지.

한낮 더러운 음모 앞에서, 혹은 또 다른 강자 앞에서.

건방진 칼은 반드시 부러질 거다. 언제 건방졌나는 듯이".

 

"경험담이오?"

 

"난 수없이 부러진 칼 중 하나일 뿐이야. 강호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지.

수많은 강자가 등장했고 다시 그것을 꺽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고, 강호는 늘 그렇게 바쁘게 돌아간다.

결코 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건방질 새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어째 우리 사부 말씀과는 궤가 좀 다르군."

"사부가 그러더이다. 건방질 수 있을 때 한껏 건방져지라고 말이오.

이 더러운 강호, 언제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데 그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냐고 하더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나 역시 사부쪽 의견이 훨씬 더 마음에 드오.

어차피 한 세월 잠깐 맛보는 자신감이라면, 언제 밀려날까 전전 긍긍하기보다야 즐기는 편이 낫지 않겠소?"

"거기에 한 마디가 더 붙었소."

"언젠가 밀려나도 결코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말이오.

그건 더러운 강호의 잘못일 뿐, 일개 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강호의 ..... 잘못?"

 

"뭐, 원래 그런 양반이었소.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강호 탓.

매일같이 더러운 강호가 해 준 게 뭐 있냐며 불평만 늘어놓던 양반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오."

"난 그것도 마음에 들더이다. 그렇잖소? 한낮 인간이 강호를 이길 수 는 없는 법이니까.

일인자든, 최하층이든, 다들 파도에 떠밀려 사는 게 아니겠소?

안 그래도 못 이기는 강호, 풍파에 떠밀렸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건 어쩐지 억울하단 말이외다.

차라리 강호를 탓하고 말지."

"천형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충 들어 알고 있소. 얄팍한 위로 따위는 하지 않겠소.

천 형이 느꼈을 참혹한 심정. 난 상상조차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천 형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 모든 건 강호의 잘못이라는 거요."

"난 한낮 강호 물결에 떠밀리는 건 싫소.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온전한 나로 남고 싶소. 그게 강호에 발들이며 맺은 나의 결심이오."

 

 

 

 

 

우리가 배우는 삼국 시대에 대한 내용 대부분이 이 책에 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나열된 이 역사서에 대한 감사의 한편에 안타까운 점 이라면 고조선과, 그 이후의 나라들에 대한 역사서가 존재하지 않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흰 참새, 흰 까치, 흰꿩, 흰사슴 등등 평소에 볼 수 없는 동물들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으며,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지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어 우리 나라가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사람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역사책의 특징이므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력을 되세기는 두통의 도구로 삼지말고 전체를 들여다 보는 심정으로 가볍게 읽어 나가길 권한다.

다행인 점은 10년 전에는 이런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나의 인내력이 증가한 것인지 견디어 내고 쓰여진 글을 대충이나마 읽어 본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4(신라본기 제4)

지증 마립간 3년(502)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이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사람을 순장했는데, 이때 와서 이것을 금지한 것이다.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을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 바로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혹은 울릉도라고 한다.

 

14년 불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는데, 일선군 사람 모례가 자기 집 가운데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머물게 하였다...

이때 와서 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구설이 비등하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이때 가까운 신하 이차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 청컨대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란을 진정시키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형리에게 내려 그의 목을 베려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하기를 "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게 되었구나.

만약 부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기이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그의 목을 베자 잘린 자리에서 피가 솟구치는데, 색깔이 희어서 마치 젖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 행사에 관한 일을 헐뜯지 못하였다.[이것은 김대문의 계림잡전 기록에 의거해 썼다.]

 

신라본기 제9

효성왕

2년(738) 3월에 김우현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여름 4월에 당의 사신 형숙이 노자의 [도덕경]등 문서들을 왕에게 바쳤다.

 

혜공왕 2년

봄 정월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났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양리공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 개였으며 다리 하나는 위를 향하고 있었다.

 

15년 봄 3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지고, 죽은 이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오직 배운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안 연후에 사물의 본말을 밝게 알게 되나니,

학문을 하고서 벼슬하는 이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근본을 먼저 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로 되는 것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위치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아부다비, 두바이, 새르자, 아지만, 움알카이와인, 라스알카이마, 후자이라 7개의 에미리트(토후국)들이 1971년 연방국으로 새로이 출발하면서 탄생했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 아랍에미리트 사람들은 여름철 아부다비 섬에서 진주를 채취해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막의 배'라고도 불리는 낙타를 타고 일주일간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는데, 그야말로 목숨을 건 여정이였다.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일년에 두 번 계절이 바뀔때 모래바람이 분다.

이 시기에는 아부다비 시내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도 아부다비는 지금도 개발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가장 높은 건물 바로 왼쪽에 책처럼 접힌 모습의 건물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국부펀드 중 하나인 아부다비 투자청 건물 본부인데, 우리나라 건물업체가 지었다.

 

아부다비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인 에미리츠 팰리스 호텔은 금을 주제로 하여 실내가 대부분 금색을 띠는데, 크리스마스 대는 고가의 보석으로 트리를 장식하기도 한다.

커피 위에 금가루를 뿌려주는 에미리츠 카푸치노가 유명하며, 그날의 시장 가격으로 금을 파는 금 자판기도 있다.

 

아랍에미리트가 장랑하는 이슬람사원인 그랜드 모스크는 아부다비의 또 다른 대표적 명소로, 순백색의 80여개 돔을 가지고 있다.

야외 기도공간은 이탈리아산 특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한여름 태양에도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해가 떠 있는 낮 동안 금식해야 하는 라마단 기간에는 천막을 치고 원하는 모든 방문객에게 해가 전문 후 첫 번째 식사인 이프타르를 제공한다.

 

멀리서 바라본 두바이의 스카이라인은 뉴욕의 맨해튼을 연상케 한다.

가운데 우뚝 선 것이 총 162층, 높이 828미터의 세계에서 제일 높은 부르즈 칼리파 빌딩이다.

사막 토양에 초고층 빌딩을 수도 없이 올리는 것이 경이로운데,

땅속 암반층까지 파고 들어가 파일을 박아 단단하게 고정하면 초고층 건물을 짓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주상 복합 빌딩으로 호텔과 아파트, 사무실로 구성되어 있는 부르즈 칼리파는 우리 나라의 삼성물산이 시공했다.

매년 12월 31일 자정에는 불꽃놀이가 행해지는데, 전 층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불꽃이 장관을 이루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두바의 의 인공섬 팜 주메이라는 계획 단계부터 그 창의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야자나무 모양으로 설계한 덕에 전체 해안선 길이가 늘어나는데 기여했다고 말해진다.

 

먼저 아랍은 민족적, 언어적 개념이다.

한 마디로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 즉 현재의 22개 아랍연맹 회원국을 의미한다. 이라크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수단, 모리타니까지가 아랍이다.

이에 비해 중동은 지역적 개념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극동, 중동, 근동으로 지역을 구분한 것이 우리에게도 고착화되었다...

좁게는 이란에서부터 이집트까지, 넓게는 파키스탄 서쪽에서부터 북아프리카 북단을 따라 서쪽 끝 개서양에 이르는 지역을 모두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터키, 이스라엘, 이란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랍 또는 아랍지역과 구분된다.

 

한 마디로 이슬람의 주도 세력인 수니파는 모하메드를 따르던 추종 세력 중 누구나 지도자인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시아파는 모하메드 혈족만이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유일한 혈육인 딸 파티마의 남편 알리만이 정당한 칼리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무슬림의 첫 번째 의무는 유일신인 알라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무는 기도이다.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드려야 하며, 기도를 드리는 시간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세 번째 의무는 자카트, 즉 기부이다.

네 번째 의무는 라마단이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매년 9월에 한 달정도 지속되는데, 이 기간에는 금식과 금욕을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의무는 메카 순례이다. 순례는 이슬람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데,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평생에 한 번은 성지인 메카를 방문해야 한다.

 

에미리트를 연합하여 단일 연방국가를 이룬 데는, 아랍에미리트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고 자이드 개통령의 역할이 컸다.

3년간의 어려운 협상 과정을 거쳐 1971년 12월 2일 아랍에미리트연합이 새로운 독립 국가로 탄생하였다.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는 대략 500만 명에서 800만 명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전체 인구 800여만 명 중 자국인은 100만 명정도이고, 약 700만 명에 이르는 절대다수는 외국에서 유입된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기업들과 근로 업종, 서비스 산업 등의 경제 활동을 외국 인력에 의존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원유 도입량, 즉 1년 동안 산유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원유의 양을 보면,

2009년 8억 4000만 배럴, 2010년 8억 7000만 배럴, 2011년 9억 3000만 배럴이었다.

단순 수치로 대략 10억 배럴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원유 도입량을 단순화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원유 도입액도 간단하게 계산된다.

평균 유가가 배럴당 100억 달러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원유 도입액은 대략 1000억 달러다.

 

아랍에미리트의 원유 매장량은 1000억 배럴정도이다.

연간 10억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니, 현재 추세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100년 정도는 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이웃 나라인 아랍에미리트와 이란은 현재 이라이 점유하고 있는 섬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란은 아부무사, 대툰브, 소툰브 섬을 점유하고 있는데, 아랍에미리트는 이란에 이 3개 섬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양국간 심각한 논란의 요소가 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에 따르면, 아랍말을 하는 주민이오랜 기간 살아온 아랍에미리트 소유의 세 섬에 아랍에미리트가 연방으로 새롭게 출발하기 직전인

1971년 11월에 이란이 군대를 보내 강제 점유한 뒤, 이란 땅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의 독도와 여기 3개 섬은 입장이 다르다.

우리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1905년에 강제로 빼앗긴 것을 1945년 해방과 함게 되찾아왔는데, 일본이 생떼를 부리며 ICJ로 가자는 것이고,

당신들은 1971년에 빼앗긴 것을 아직 찾아오지 못한 것인데,

만일 나중에 3개 섬을 되찾아온 뒤에 이란이 다시 ICJ에 가서 따져보자고 하면 가겠느냐?"하고 설명해주면 우리의 입장을 쉽게 이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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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기는 이 책으로 대신한다 -마오쩌뚱-

 

이책은 에드거 스노가 1936년 6월 부터 1936년 10월까지 4개월에 걸친 중국내의 여행을 통해 기록한 책이다.

우리에게 낯설은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성장하여 중국 전체의 기반으로 성장해 나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성장 과정의 기본이 된 군대 홍군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다.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승리는 곧 삶이요, 패배는 곧 죽음이다 -펑더화이-

 

한 남자가, 그것도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열심히 일만 했지 남에게 큰 해를 끼친 적이라고는 없는 정직하고 훌륭한 남자가

한 달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의 모습을 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모습이였다.

생명을 잃어가는 그의 살은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처지고, 그의 몸에 있는 뼈라는 뼈는 남김없이 드러났다.

 

나는 싸라치의 거리에서 막 목숨이 끊어진 시체를 보았으며, 촌락의 얕은 웅덩이에 기근과 질병의 희생자들이 죽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마을들 대부분에서

아직도 부자와 쌀 매점상인,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이 무장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도시에는 관리들이 기생들과 어우러져 노래하고 희롱하는 가운데 식량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날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상하이'의 공장들에서 나이 어린 소년.소녀 노예 노동자들이 서서 또는 앉아서 하루 12시간에서 13시간을 일하다가 기진맥진해

그들의 잠자리인 기계 바로 밑의 더러운 솜이불에 쓰러져 잠이 드는 장면을 보았고, 지금도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4년에서 5년 동안의 실질적인 시한부 노예로 팔려와, 그 기간에는 특별한 허락이 없으면

낮이든 밤이든 높은 담에 감시가 엄중한 공장 구내를 벅어나지 못했던 제사공장의 어린 소녀들과 면방직공장의 창백한 젊은 여성들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1935년 한 해 동안에 상하이의 거리와 강과 운하에서

적빈자, 아사자, 또는 양육할 수 없어 강에 버린 그들의 어린 아기의 시체를 2만 9천구 이상이나 치워야했다는 사실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엄격한 군사적 의미에서 볼 때 모든 홍군 전사들을 '비정규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홍군 자신은 전방부대, 독립부대, 우격대, 농민보위대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나는 곧 홍군 병사들이 대부분 그들의 가정과 그들의 땅과 그들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다.

양상쿤의 통계를 보면 일반 병사들의 평균 연령은 19살이었다.

홍군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7~8년, 심지어는 10년 이상의 전투 경력을 갖고 있지만

아직도 10대 중반인 소년병들이 대단히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평균 연령이 이처럼 낮아졌다.

게다가 수많은 전투를 치른 '고참 볼셰비키들'도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소년 전위대로서 홍군에 가담했거나, 15~16살에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홍군 병사의 60~70퍼센트가 읽고 쓸 줄 알았다.

 

한 가지 사실이 나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도대체 홍군은 먹고 입는 것과 장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이 전적으로 약탈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었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어떤 한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즉시 그들 자신의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이 적의 봉쇄에도 그들 스스로 근거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적은 돈으로도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군대가 유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홍군 유격전의 원칙들

1.유격대는 어떤 경우에도 패하는 전투를 하지 말아야 한다.

2.기습이야말로 잘 지도 받은 유격대의 주요한 공격전술이다.

3.교전을 도발하거나 받아들이기 전에 공격과 후퇴, 특히 후퇴의 계획을 신중하고 자세하게 세워야 한다.

4.유격전의 전개에서 최대의 관심은, 지주 및 호신들의 최초이자 최후이며 가장 완강한 저항선, 즉 민단에 쏟아야 한다.

5.적군 부대와의 일반적인 교전이라면 유격대가 수에서 적을 능가해야 한다.

6.실전에 임하는 유격대의 전열은 최대의 탄력성을 유지해야 한다.

7.교란, 유인, 견제, 복병, 양공, 도발 등 여러가지 전술을 체득해야 한다.

8.유격대는 가장 약하면서도 치명적인 지점을 집중 공격할 분이지 절대로 적의 주력부대와 대결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9.적이 우격대의 주력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10.유격대는 우월한 기동성 외에도, 현지의 대중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월한 정보수집 능력 이라는 장점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 해가 다 가기 전 한 전투에서 우리는 백군으로부터 이들 지역의 일부를 탈환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비옥했던 땅들은 반은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몇몇 노인들과 여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전율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그런 범죄 행위가 중국인에 의해 중국인에게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안에서 일오난 쿠데타는, 그 동기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절한 타이밍과 눈부신 실행 과정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반란 계획은 이미 손을 쓸수 없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장제스 진영에 한 마디도 누설되지 않았다.

12월12일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총통을 체포하는 데에는 피를 조금 봐야만 했다. 장제스는 .....

이들은 이내 총통의 몸종을 찾아냈고, 얼마 안되어 총통을 발견했다.

그는 잠옷 위에 헐렁한 긴 겉옷만을 걸치고 신발도 신지 못한 맨발에다가, 황급하게 산 위로 도주하다 양손에 상처를 입은채,

혹한에 덜덜 떨면서 틀니조차 빠뜨린 모습으로 큰 바위 옆 옴푹 들어간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반란군 측이 제시한 8개 항목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1.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내전을 즉각 전며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7명)을 석방할 것.

4.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쑨원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대대적으로 정복해 승리했는가 하면, 엄청난 손실과 패퇴도 기록되었다.

그러나 양자 간의 결투 모습은 중국 연극 무대에서 벌이는 두 무사의 싸움과 흡사했다.

이들은 소름 끼치는 기합소리를 내지르면서 칼로 맹렬하게 허공을 베지만 정작 서로의 몸을 건드리는 법은 없었다.

마침내 패자가 잠시 동안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켜, 살아있는 시체로서 당당하게 제 발로 무대에서 물러난다.

난징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가짜 놀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모두가 '승리'를 거두고 오로지 역사만이 기만당하고 희생되었다.

 

레닌은 그러한 시기에 " 필요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에 최대한 철저하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협이나 '방침 전환', 협정 체결, 우회, 후퇴, 등 필요한 온갖 형태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라고 쓴 바 있었다.

 

역사상 어떠한 독재정당도 감내하기 어려운 가장 강력한 압력을 받지 않고는 그들이 장악한 권력을 양도하지 않았는데,

이런 점에서는 국민당도 예외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심지어 이제 기대할 수 있게 된 '민주주의적' 조치의 성취도 10년간에 걸친 무력항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저항이 없었다면, 어떠한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제 중국에서 목격하게 될 국가권력의 중앙집중화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치가 성장한다는 것은 근대국가 자체의 성숙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된 여러 가지 모순,

즉 기본적인 계급대립을 조정하기 위한 권한과 기구의 필요성이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운동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다른 누구보다 앞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

 

1928년, 작은 무리의 젊은이들이 멀리 떨어진 외로운 징강 산에 적기를 꼽고 운동을 시작한 이래, 이 운동은 급기야 십자군 원정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1944년 여름에 이르러 이 십자군 원정대는 전국을 뒤엎는 대대적인 운동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따라서 이제는 중국의 운명을 중재하는 어느 누구도 거대한 인민대중을 대변하는 이들의 주장을 더 이상 이면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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