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의 기술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기회이면서도 위험도 있음을 소개해준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예술가들의 삶의 고뇌를 이해하는 계기도 되었다.

예술가들도 생계의 걱정 없이 작품에 열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 기술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

 

NFT는 'Non-Fungible Token'의 약자로, '대체불가토큰' 또는 '대체불능토큰'으로 번역됩니다.

비트 코인, 이더 등의 암호화폐처럼 각기 동일한 가치와 기능을 가지는 대체가능토큰과 달리 NFT는 각기 고유값을 지니므로 희소성이 있죠. 토큰간의 상호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린 어쩌면 FOMO가 아닌 FOMOA 증후군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어떤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또다시'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디지털 '원본'을 증명하고 '희소성'의 가치를 부여해주는 NFT의 특성상 작품의 고유성이 중요시되는 예술 시장을 중심으로 급성장했지만 이젠 예술 영역을 넘어 소유권이 거래될 수 있는 다양한 분야로 그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NFT의 정의

NFT는 특정 자산에 대한 고유한 소유권이다.

NFT는 우리가 소유하고 거래하는 생활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꿔 각종 산업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암호화된 토큰이다.

 

 

토큰: 토큰은 블록체인상에 저장된 디지털 파일로, 특정 자산을 나타낸다.

        해당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거래 가능한 토큰으로 주조하는 것을 민팅이라고 하는데,

        이때 자산의 형태에는 제한이 없다.

 

최종정의 : NFT는 특정한 자산을 나타내는 블록체인상의 디지털 파일이고,

              각기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상호 대체가 불가능한 토큰이다.

 

"스스로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냈다면, 그 후엔 그것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알아내야 합니다."

커를로스의 작품에는 그가 디지털 아티스트로서 작품을 표현하면서 가지는 개인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창의성을 억누르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시스템의 불합리함 또한 표현된다.

 

아티스트라면 왜 처음 예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애초의 순수성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그 열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영혼을 팔고 있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예전에 나 자신을 위한 예술 작품을 만들수 없었을 때,

내가 신경 쓰지도 않는 제품을 파는데 동원되어 일할 때, 마치 내 영혼을 잃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집세를 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 상황에서 나는 영혼을 챙길 여유라곤 없었다. 만약 그런 생활로부터 탈출구가 있다면, 빈곤과 절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택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머리로 예술 작품에 대한 스토리를 생각하고, 가슴으로 이를 풀어낸다"라고 평을 해주었는데, 이게 나의 예술 세계를 잘 표현해준다고 느꼈다. 나는 머리로 크립토 스토리를 구상해 내고, 과거 경험들이 그 스토리에 감정적인 요소를 부여해 작품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책에서 "사람은 죽음에 집착하는 동물이고, 따라서 예술가는 시간을 미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프로이트는 사람이 죽음에 집착하고 죽은 후에 잊힌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예술가가 시간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Infinity Rooms' 시리즈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이 무한 방들을 통해 내 감정들이 내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뛰어 다닐 수 있도록, 그래서 연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나는 왜 예술 작품을 만드는가?' '왜 작품을 만들 때 특정 색과 질감을 선택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알아내는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아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대화에 참여하라. 그리고 대화의 일부분이 되라....

진심으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자신을 영적인 존재라고 보는데, 예술은 나에게 일종의 포스트모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모든 철학적 가르침은 죽었고,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말하고 행했던 많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예술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는 것, 그것이 내가 깨달은 큰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아티스트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큰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과거에 대한 생각에 잠길수록 지금의 성공이 더 멋있고, 더 아름다우며, 더 '리얼'한 현실로 다가온다.

 

한국에서 전문적으로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알았기에, 먼저 의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는 "의대를 택한 것은 졸업 후 의사가 되어서도 아티스트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안정된 진로와 고군부투하는 예술가의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한국 학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에서 어두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그에게 기쁨을 되찾아준 것이 바로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작품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즐기며, 당신의 집에서 전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이 예술품에 내재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창작자는 평생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작품 감상의 힘이다....

100번째 작품이 완성됐을 때,

이 작품은 앞선 99개의 작품이 앞으로 조금씩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준 노숙자,

그를 편의점의 알바로 고용한 전직 교사,

"불편한 편의점"에서 벌어지는 일이 주요 무대다.

 

알코올성 치매로 인해 기억이 많이 날아간 그는 그저 "독고씨"라는 성인지 이름인지 애매한 호칭으로 불릴 뿐이었다.

 

"짜몽이 그러는데... 게임하면서 .. 삼각김밥...먹기 좋데요. 아들 게임할 때...줘요."

"근데 김밥만 주면... 안 돼요. 편지 ... 같이 줘요."

선숙이 고개를 들어 독고 씨를 바라보았다.

독고 씨가 선숙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그가 정말로 골든 레트리버처럼 보였다.

"아들한테... 그동안 못 들어줬다고, 이제 들어줄테니 말...해 달라고... 편지써요.

그리고... 거기에 삼각김밥...올려 놔요."

 

경만은 마음속으로 그 편의점을 '참새방앗단'이라 부르곤 했다.

그래, 오늘도 방앗간이지. 참새는 경만 자신이다.

그가 어릴적 [참새의 하루]라는 히트곡이 있었다. 송창식이 울렁울렁거리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노래는 소시민을 참새에 비유하여 생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아침이 밝았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재 너머에 낱 알갱이 주우러 나가봐야지. 아침이 밝는구나." 새나라의 어린이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그때도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공감을 했었지. 아무튼 그때도 그렇게 등교를 힘들어하던 열등생이었으니, 경만에게 인생이란 버거운 하루하루의 연속일 다름이었다.

 

오늘 밤은 '참참참'이다. 지난 몇 개월간 선택해 온 경만의 최적의 조합이 바로 이것 이었다.

참깨라면과 참치김밥에, 참이슬. 이것이 경만의 1선발이자 절대 후회하지 않을 하루의 마감이고 빈자의 혼술 최고 가성비가 아닐 수 없었다.

 

젊을 때는 실수를 해도 만회할 힘이 있었고, 숙취에 절어도 뜨거운 물 샤워 한 방에 털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회복찬력성은 게임 속 에너지 게이지가 닳아 없어지듯 그의 인생에서 빠르게 휘발되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 힘들게 돈 버니까...돈 아껴 써야 한다고...편의점에 가면...원 플러스 원만 사라고...그랬다는 거예요.

거참, 정말 아, 알뜰하다 싶었고....애들이 참....자알컸다 싶었죠."

"....."

"어제부로 이 상품 다시...원 플러스 원 됐으니까, 오늘은 아버지가 사 가시면..되고,

내일부턴 딸들보고... 사러 오라고 하세요."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아니, 죄송할 건 없고요.... 좀 불편하네요."

"어쩌다 보니.....예, 불편한 편의점이...돼버렸습니다."

 

의사였다.

지금이라도 여기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메스를 쥐면 어떤 수술이라도 집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없이 마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유소에서 나는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차를 고쳤다.

고쳤으면 떠나야지. 다시 길을 가야지.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 했다.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아차피 풀어야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 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직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이 책은 그런 영역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들려준다.

맞다른 길목에 있을때는 직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되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생각하는 방법이다"

 

때로는 무질서해져라. 가볍게 돌아다녀라. 참고 기다려라.

본능을 믿고 너무 오래 고심하지 마라.

동전을 던져라. 용서하지만 잊지는 마라. 자신이 옳다고 믿어라.

 

즐기는 경험과 새로운 경험 사이에 균형을 찾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들을 얼마나 오래 즐길 예정인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탐사의 가치, 선호할 것을 찾아내는 일의 가치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과 마주친다. 그것을 즐길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탐색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함으로써 가장 나은 것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미래를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쉬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자신도 어떻게든 쉬지 않고 움직일 필요가 있다.

셰상이 계속 변하는 한, 탐색을 결코 완전히 멈춰서는 안된다.

 

우리 주변 세계의 구조를 배우고 지속적인 사회관계를 맺는 것은 둘 다 평생에 걸친 과제다.

따라서 먼저 탐색하고 나중에 이용하는 일반적인 양상이 생애에 걸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늙어갈수록 사회 관계망이 축소되는 것이 주로 변변찮은 관계들을 '쳐내고' 가까운 친구들과 식구라는 핵심되는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임을 밝혀냈다. 이 과정은 신중한 선택처럼 보인다. 삶의 끝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가장 의미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단순한 것이 최고의 계획일 것이다.

우리의 기대값이 불확실하고 자료에 잡음이 많을 때, 최선의 방안은 폭넓게 생각하는 것, 일필휘지로 죽 긋는것이다.

 

브라이언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숙제도 해야 하고, 잔심부름도 해야하고.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선생님이 하라는 것은 할 필요가 없어..

내가 하라는 것도 할 필요가 없고, 법도 굳이 지킬 필요가 없어. 그런데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야.

그런 결과를 맞닥뜨리고 싶은지를 스스로 판단해봐."

어린 브라이언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주체의식, 책임, 도덕적 판단을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어려운 문제는 계속 붙들고 씨름하기보다 더 쉬운 형태를 상상하여 그것을 먼저 공략하자.

제대로 적용될 때, 이것은 단지 희망 섞인 현실이나 환상이나 게으른 몽상이 아니다.

발전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다.

 

무작위성은 이성의 정반대처럼 보인다. 문제 풀기를 포기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컴퓨터 과학에서 무작위성이 놀라우면서도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활용이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 접근하는 신중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쓸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을 때도 있다.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에필로그에 있는 글이 좋다.

 

마흔이 넘은 자는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나이가 범죄다.

이것이 그 밤의 심판관들의 슬로건이었다. ....

하지만 레고라는 끝내 그를 따라잡아서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추격전은 끝났다.

하지만 가해자도 진이 다 빠졌다.

동이 틀 무렵, 레고라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까지 빠졌으니까.

결국 그 무리는 레고라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디노 부차티의 이 현대적 우화는 놀랍다.

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 반 연민 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인생의 뼈아픈 교훈, 마침내 돌아온 부메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대들을 우정, 관심, 대화로 한없이 엮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세대들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다.

각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고유한 정신구조, 거의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다.

이 사회는 윗세대나 아랫세대하고 결합할 때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한다.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발을 헛디딜까 두렵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

꿋꿋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 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했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시간은 확신을 앗아갔고 결심에 상처를 냈다.

어릴 때는 원래 고마운 것도 모르고 온 힘을 성장에 쏟기 마련이다.

고마운 마음은 나중에, 자기가 뭔가를 바치거나 무사공평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삶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가족, 친구, 부모, 조국에 입은 은혜를 돌려주어야 할 때가 결국은 온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똑같이 베품으로써 갚아야 할 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음으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례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저마다의 운명은 두 심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익히 말했듯이 생은 늘 약속이라는 구조를 띤다. 우리의 요람을 들여다본 요정은 없었다.

지켜진 약속,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약속은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그 삶이다.

그 삶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가없는 감사를 우러나게 한다.

우리는 존재를 긍정하고 무조건 찬동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세상의 광휘, 그 눈부심을 찬양하라. 지상에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동물, 풍경, 예술작품,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경찬할 만한 기회를 찾도록 하자.

세상이 추해지지 않도록 숭고한 것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매혹을 발견해야 한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채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 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복한 인생이었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든, 어느 덧 떵거미가 내려앉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늙는다는 것은 달력 속으로 편입되는 것,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인생의 가을은 언제나 모순적으로 정의되어 왔다.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끝없는 겨울잠 속에서 쇠락해가는 슬픔이 있다.

 

무의식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패배를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라.

요컨데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산다는 것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를 다른 고도로 데려가고 기발한 상상의 장소로 끌고 가는 이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삶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 인생에 소설처럼 일관된 흐름이 있기를 바란다.

"정신은 필요한 것을 획득할 때보다 필요 이상의 것을 획득할 때 한층 더 흥분한다.

인간은 욕구의 창조물이 아니라 욕망의 창조물이다.

 

생은 지속하는 불확실성이다.

생은 지속하는 동안만 우리가 살아 있음을 보장한다.

 

단조로운 일상이 없으면 전격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일상의 선율은 통주저음이다.

그 통주저음을 배경 삼아 이따금 가슴 떨리는 아리아가 연주된다.

 

생을 시간의 지속으로 보면 과거는 현재를 내다본 역전된 예언같고 현재는 확증된 회고같다.

우리가 해온대로 하기를 잘했다.

생의 끝없는 속삭임은 이제 우리가 약해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감의 증거다.

 

이리 삶은 소설이 아니요, 늘 그날이 그날 같다.

뭐 새로운 것 없나?

별일 없이 사는 거지. 뭐.

그런데 인간은 일화 형식의 일상을 소재삼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간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품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른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능력, 이 무심한 한가로움이야말로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음의 특권이다.

그것이 젊음의 재능이자 경박함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기 위해 우연을 선택으로 바꾸는 일이다.

 

삶은 일종의 실험이다.

삶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쭉 나아가는 게 아니라 에둘렀다가 홱 질러가고 똬리 속에 이전의 과정을 품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간도 각기 다르고 치열함도 각기 다른 삶의 시기를 거친다.

 

우리는 나이를 먹되 마음이 늙지않게 지키고, 세상을 향한 욕구, 기쁨, 다음 세대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해야 한다.

 

당장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라.

 

지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자명해 보이는 것에 경이로워하는 능력,

그러한 능력은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를 보전하려는 바람, 이미 습득한 것에 안주하려는 태만을 이긴다.

 

인생은 작은 글씨로 쓰는 아주 긴 편지다.

생의 횡단은 때때로 위험하기 그지없으나 참으로 근사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심의 순서와 위계를 정할 줄 안다는 의미다.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안주하지 않고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일깨우는 남다른 이들을 우러르는 것이다....

저 나이가 되면 우리는 어떨까 궁금해서 그들을 열심히 분석한다.

본이 되는 사람은 철학의 모든 원리와 맞먹을 만큼 귀하다.

 

성공한 삶보다 자기를 실현한 삶이 중요하다.

 

다채로운 삶을 추구하려면 서로 모순되는 두 명령을 따라야 한다.

팔자에 만족하라. 그러나 세상의 소음에, 기이한 것들의 작은 음악에 언제나 깨어 있으라.

지금의 경이에 푹 빠져 살되 바깥의 감탄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지속의 행복과 유예의  행복, 집중의 행복과 확장의 행복. 평온과 도취, 익숙함과 도피같은 명암의 대비만이 황홀한 노년을 불러올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불멸을 추구하는 순교자들이 딱 이렇다.

그들은 수명 연장에 정신이 팔려 그 연장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다르면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는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당신의 장례식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지만 가장 먼저 당신을 기억에서 지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두고두고 당신을 그리워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이 온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와 철학이 아무리 너그러움을 발휘한들 죽음의 공포를 가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언젠가 무대에서 퇴장할 테고 잔치는 우리 없이는 계속되리라.

 

우리 안에서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식들이다...

생식은 나이든 사람을 젊은 사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종의 영속성을 보장한다.

적당한 수의 자식을 두는 것은 한없이 번창하는 생에 대한 선험적 에정 고백이다.

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요,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도 내세는 일차적으로 자식이다.

 

불가지론자인 우리를 지탱해주는 놀라운 불꽃은 생이 끝날 때 오는 해방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 영원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이다. 다른 영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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