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책이다.

기존에 나온 책들과 다르게 사고의 폭을 확장해준다.

혼자서 이 영역을 사고로 터득하기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은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단어를 은유적으로 대체할 의미를 찾았다.

죄인=부족한 인간, 완벽하지 않은 인간

 

질서는 탐구된 영역이다.

우리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으로 목표하는 결과를 얻을 때 우리는 질서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우리 인간은 광대한 미지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집스러우리만치 맹목적인 데다 세계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예상 밖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우리는 경솔하게도 모든 것을 고려 대상에서 제거해버리는 까닭에 그 질서는 곧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런 시도가 도를 넘는 순간 전체주의가 고개를 내민다. 전체주의는 원칙상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곳에서 완전한 통제를 이루려고 할 때 동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질서 너머 혼돈의 영역으로 나아갈 필요에 부딪힌다... 우리가 힘들게 얻은 지혜에 따라 행동할 때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질서라면, 혼돈은 우리를 둘러싼 잠재적 가능성들이 우리의 예상이나 시야 밖에서 뚫고 튀어 오르는 것이다.

 

새로운 것과 접촉하지 않으면 정체되기 마련이다.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잡아끄는 본능, 곧 호기심이 없는 삶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새로운 것이 어느 정도 섞여들어도 존재가 참을 수 없이 흔들리고 불안정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흥분과 매혹과 격정을 부채질한다.

 

우리의 이해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한 발은 질서 안에 놓고 다른 발로는 그 바깥쪽을 디뎌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

그 변경에서 아직 화해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안정을 유지하면서 두려움을 통제하고 베움을 계속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깊은 의미를 탐구하고 발견할 힘을 얻는다. 여기서 의미란 단순한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것이며, 이를 향한 본능이 인생을 올바르게 이끌어 준다. 의미를 따라가야 우리는 우리 너머에 있는 것에 압도되지 않고, 시대에 뒤처졌거나 너무 편협하거나 너무 과시적인 가치와 믿음 체계에 바보처럼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타인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의 질서를 유지한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마음이 잘 통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식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자신의 생물적, 심리적 필요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지각하고 행동한다.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고 꽉 막힌 사람이 되기보다는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편이 낫다.

내가 아는 것들과 친해지기 보다는 모르는 것들과 친해지는 게 백배 낫다.

아는 것은 유한하지만 모르는 것은 끝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신뢰를 얻어라.

그러면 당신이 개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동료들이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자제한다.

 

사회제도를 보면 이미 가치가 검증된 일은 보수적인 사람이 담당하고,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일은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담당한다.... 현명하고 신중한 보수주의와 예리하고 주의 깊은 창의적 변화는 세계를 질서있게 유지한다.

 

규칙을 충실히 따라서 빛나는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때는 규칙을 따라라.

하지만 그 규칙이 큰 걸림돌이 되어 그 핵심 가치를 구현하지 못할 때는 규칙을 깨뜨려라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 상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라.

 

삶은 반복이며, 반복되는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목적이 없으면 긍정적인 감정이 사라진다.

우리가 희망을 품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어떤 것에 다가가는 경험에서 대부분 나온다.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불안에 항상 시달리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널려 있으며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우리는 목적에 집중함으로써 참을 수 없는 혼돈을 억누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신뢰의 길이 열리며, 그 신뢰는 순진함이 아닌 용기에 기초한다.

나는 배신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신뢰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 신뢰를 통해 당신과 나의 가장 좋은 면이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고 협력과 타협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당신이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나는 계속 당신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 즉 안개를 걷어내는 것이고, 거기 숨어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모서리가 진짜인지 환상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중 일부가 진짜일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진실을 안개에 묻어두기보다는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나은 이유는 적어도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적 토대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동기와 감정과 물질적인 것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만 지각이 선명해지고 세계가 명료해 진다.

 

주어진 것 이상의 책임을 맡는다면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삶을 가장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의미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어렵다는 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제약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게임이 시작된다.

제약을 존재의 필수 요소이자 인생에서 가치있는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제약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게임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사람은 의미를 필요로 하지만, 문제는 해결을 필요로 한다.

중요한 것, 나를 희생할 가치가 있는 것, 맞서고 떠맡을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대단한 일이다.

 

필요한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자발적으로 맞설 때 우리는 더 강해진다....

도전에 직면할 때 우리는 세계와 맞붙어 사우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대 당신은 더 큰 사람이 된다.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은 인간에 허락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오늘 나 자신과 게임을 해야 하는데, 그 게임이 내일, 내달, 내년에 할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편협한 이기심은 역효과를 부른다. 이런 이유로 철저한 개인주의 윤리는 한마디로 모순이다.

자기 자신을 대해야 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하는 방식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남들이 책임을 방치한 곳에 기회가 숨어 있음을 인식한다.

 

목표가 없으면 모든 것에 이끌리고 흔들린다.

목표가 없으면 갈 곳이 없고, 할 일이 없으며, 인생에 가치있는 것이 없다.

가치는 선택지에 위계를 매기고, 낮은 것을 희생하고 높은 것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길고 정교하고 통일된 글을 쓴다는 건 적어도 부분적으로 인성이 더 복잡해지고 명호가하고 깊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중 에서도 자신의 인격, 사랑, 가족, 우정, 그리고 일에 대한 책임이 중요하다.

어느 영역에서라도 정원을 가꿔 볼살필 줄 모르거나 그럴 뜻이 없는 사람은 그로 인해 반드시 고통을 받는다.

물론 무언가에 전념하려면 살을 내주는 아픔을 참아야 한다.

 

인생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힘든 순간이 반드시 찾아 온다. 그래서 인생은 참으로 고단하다.

어떤 때는 정신을 차리고 멋지게 이겨낸다 해도, 잔인한 순간은 거듭 찾아오며 순간으로 끝나지 않기도 한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인생이 더 나을 수 있지만 둘이 있어도 힘든 순간은 여지없이 찾아온다.

따라서 부부는 이렇게 힘든 인생을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동의, 진실한 합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변화는 긁어 모을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협상을 성사시키고 나면 멋진 미래와 성공이 따라온다.

 

우리는 타인이 있어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다. 결혼이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는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절반쯤 있고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절반이 둘 다 똑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우선, 완벽한 사람은 없다. 세상에는 하자가 있는 사람들뿐이다.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심한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현실은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대상인 동시에 주관적 존재의 내면에 있는 꿈, 감각 경험, 감정, 충동, 환상 등이 존재하는 곳이다. 세계는 개인의 의식 속에서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 반쯤 눈이 멀고 분개하더라도 영구적이고 심대한 손상을 입힐 수 없는 구조를 설계하고자 할 것이다. (죄인= 완벽하지 않은 인간)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우리의 윤리적, 의식적 산택으로 결정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그 모든 가능성, 그 모든 공포와 함께 하루를 맞는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방향을 가늠하고, 경로를 정한다....

책임감을 갖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진실하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가능성을 높이는 최선이 방법이다...또한 세상의 위험과 맞설 수 있고 삶을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충분히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고결함, 위엄, 의미가 활짝 꽃피우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여러가지로 기획되고 조직화된 사회의 틀속에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유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다.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을 구별하고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소유 양식'이 자명한 전제가 되고 '존재 양식'을 능가하는 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위기에서 벗아나기 위한 새로운 사회상과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생존양식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 자기의 주체성, 혹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뿐 아니라 인간, 지식, 관념, 신, 나아가서는 건강이나 질명에 까지 미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존재'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나 태도가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주고, 나누어 갖고, 관심을 함께 가지는 살아 있는 관계가 된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소외된다. -칼 마르크스-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일에 대한 집념을 윤리 규범으로서 받아들이면서 하루의 나머지 시간과 휴가 동안은 완전히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는 모순과 비슷하다. 한편에는 일관작업의 벨트 컨베이어와 관료제적인 일과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텔레비젼, 자동차, 섹스가 있어 이 모순된 조합을 가능케 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는 유별나게 불행한 사람들의 사회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존재와 실제는 '진정한, 시종일관한, 진실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삶의 소유 양식에서는 세계와 나의 관계는 소유나 점유의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모든 물건을 내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한다.

삶의 존재 양식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확인해야만 한다. 하나는 뒤 마르세의 말에 예시되어 있듯이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살아 있는 것, 세계와 진정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또 하나의 형태는 '보이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존재의 어원에 예시되어 있듯이 사이비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사람 혹은 물건의 진정한 본성, 진정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신념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실제로 신념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희망을 잃어버리며 자신이 존재의 핵심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지향이며 태도이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람이 산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지식은 도그마의 특질을 띠어서는 안된다.

도그마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양식에 속한다.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은 사고의 통찰적 능동성-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 결코 멈추어 서는 일이 없는-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는 우리의 소유물,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아에 얽매이는 정도에 따라 제약된다.

우리의 자아에 얽매임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저해하며 결실을 방해당하고 자기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도 방해를 받는다.

 

삶의 소유양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전반적 태도이다.

모든 것이 다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재산, 의례, 선행, 지식, 사상 등이 모두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느냐 보다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야말로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며 우리 행동을 몰아가는 성격이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동적인 핵심에서 유리된 행위나 의견은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

 

사랑, 자랑, 미움, 기쁨은 언쯧 보기에 불변의 실체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은 명사에는 실재성이 없을 분더러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떤 인간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흐리게 할 뿐이다...

물건은 우리의 육체 조직 속에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테이블이나 램프와 같은 물건은 본 대로 존재한다고 단순히 믿는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감각을 지각으로 변모시키게끔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은 이런 지각을 통해 주위의 세계를 조작함으로써 주어진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런 표상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이름은 표상의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유의 필요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살려는 욕망'이다.

우리가 행복하건 불행하건 간에 육체는 '불멸'을 행하여 노력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멸이라는 것을 믿게끔 하는 해결책을 찾는다. 이 소망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어 왔다.

 

존재양식에는 그 전제조거으로서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의 존재가 있다.

그 기본적 특징은 능동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분주하다는 외면적 능동성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내면적 능동성의 의미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나 재능을,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그 정도는 다르지만- 주어져 있는 풍부한 인간적 천부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 성장하는 것, 넘쳐 나오는 것, 경청하는 것, 자아의 뇌옥을 초월하는 것, 관심을 갖는 것, 경청하는 것,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어느 것 하나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경험을 채운 그릇이며 경험은 그릇에서 넘쳐 나온다.

언어는 경험을 가리키지만 경험은 아니다. 경험한 것을 사상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경험은 없어진다.

 

'존재'는 거짓된 환상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현실의 모습과 관련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영역을 증대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자기의, 타인의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세계의 현실에 대한 통찰의 증대를 의미한다.... 존재에의 길은 표면을 꿰뚫고 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입센은 그의 작품 <페르 귄트>에서 이 자기중심적 인물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일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그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의해서 '자기'는 '욕망의 덩어리'이므로 '자기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임종에 이르러서 그는 자기의 소유중심의 생활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는 알먕이가 없는 양파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 미완성의 인간임을 시인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만일 '내가 존재하는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의 감각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 나의 '존재'능력과 스스로의 본질적인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며, 물론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병이나 고문, 그밖의 강력한 외적 제한이 가해지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쓰여지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반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감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 속에 있다.

즉 생명과 자기의 생산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 속에, 퇴보적 경향 속에, 내적 나태와 자진하여 다른 사람에게 내 생명을 양보하려고 하는 속에 그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일단 숫자로 환원되어 버리면 진짜 관료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범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세거 아무런 인간적인 유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보단 덜 지독하지만 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는 양심과 의무의 갈등마저 없기 대문이다. 그들의 양심은 '실제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입과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에서의 도피>, <정신 분석과 종교>, <건전한 사회>

드론에 대한 기초 지식에 도움이 되었다.

드론은 운송 수단, 무기, 배달 등 다양하게 그 위치를 점유하게 될 것이다.

 

2018년 2월 9일,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리픽 개박식의 하이라이트는 식전 행사 '제3막-행동하는 평화 코너'였다..

그동안 하늘에서는 발광 다이오드 LED 조명을 장착한 1218대의 드론이 스노보드와 스키 등의 서로 다른 겨울 스포츠 형상을 연출했다.

 

군집드론은 복수의 드론이 와이파이로 연결된 한 대의 컴퓨터의 명령으로 서로 부딪히지 않고 비행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군집 드론의 핵심적인 기술이 군집 기술이다. 군집 드론 비행에는 첫째 충돌을 막기 위해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비행하는 분리 기술, 서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응집 기술, 동시에 일정한 방향이나 속도로 일제히 움직이는 정렬 기술이 필수적이다. 분리, 읍집, 정열을 유지하며 드론을 군집 비행시키려면 조종, 제어 기술은 물론 실시간 통신 기술 그리고 RTK(Real Time Kinematic)-GPS 기술이 필요하다.

 

미 공군이 운용하는 노스럽 그러먼 RQ-4 글로벌 호크는 실이 14.5m, 날개 폭 39.9m 높이 4.7m에 최대 중량이 14.6t이나 된다. 최고속도 628km/h, 순항 속도 570km/h의 고속으로 최고 1만 8000m 고공까지 비행할 수 있다.

 

MEMS 센서

드론에서 가속도, 속도, 각 속도 등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도를 측정하는 센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운동하는 물체의 물리적 특성을 이용한 기계적 자이로(machanical gyro)와 광간섭 효과인 사냑 효과(sangac effect)를 활용한 광학 자이로(optical gyro) 그리고 기계적 장이로를 마이크로 이하의 단위로 축소한 MEMS 센서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각운동량(angular momentum) 센서이다.... 항공용 자이로를 생산하던 스페리 저이로스코프사는 자사의 기술을 이용해 세계 최초의 무인기를 개발해 비행에 성공했다.... 기계적 자이로는 매우 ㅗㅍ은 정밀도와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고가이며 소형화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1960년대 광신호를 사용한 광학 자이로가 개발되었다. 반대 방향으로 전파되는 광간의 간섭을 이용한 광학 자이로는 기계적 자이로와 비교해서 소형화가 가능했다. 상업화된 광학 자이로는 광섬유 자이로와 링레이져 자이로를 들 수 있다. 링레이져 자이로는 1970년대 개발되었으며 현재 민항기나 전투기 등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광학 자이로도 여전히 가격과 크기 면에서 대중화되기는 어렵다.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 자이로는 센서를 미세 공정을 이용해 칩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가속도와 각속도 등을 측정하는 MEMS 센서들은 1980년대까지는 주로 우주 분야에 사용되었다. MEMS 센서는 비록 안정성과 정확도 측면에서는 기계적 자이로나 링레이져에 비해 뒤처졌지만, 소형화가 가능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제왕운기는 고려 1287년에 이승휴가 만든 책이다.

사료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이책을 골랐는데 어렵다.

차라리 원서의 해석을 읽는 게 나았을 것으로 보인다.

190페이지까지만 읽고 덮는다.

 

제왕운기 초간본은 이를 편찬한지 10여 년이 지난 원정 연간(1295~1297)에 진주에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환웅 긴화를 전하는 대표적인 사서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후의 [제왕운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 후기 및 원 간섭기에는 여러 편의 역사 관련 기록물이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종 23년인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이는 광종 때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구삼국사]를 뒤이은 것으로 약 200여 년간의 문화적, 사상적, 사회적 발전 및 지리적 인식 확대의 상징물이었다.

 

[삼국사기] 성책 후 반세기가 지나 고구려 개국주의의 신이한 사적을 담은 서사시 [동명왕편]이 지어졌고, 이때로부터 다시 약 100년,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는 136년이 지난 1281년 [삼국유사]가 지어졌으며, 다시 1287년에 중조와 동국, 그리고 고려의 역사를 읊은 [제왕운기]가 만들어졌다.

온통 분홍색 코스모스 속에서 하얀색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