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에필로그에 있는 글이 좋다.
마흔이 넘은 자는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나이가 범죄다.
이것이 그 밤의 심판관들의 슬로건이었다. ....
하지만 레고라는 끝내 그를 따라잡아서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추격전은 끝났다.
하지만 가해자도 진이 다 빠졌다.
동이 틀 무렵, 레고라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까지 빠졌으니까.
결국 그 무리는 레고라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디노 부차티의 이 현대적 우화는 놀랍다.
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 반 연민 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인생의 뼈아픈 교훈, 마침내 돌아온 부메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대들을 우정, 관심, 대화로 한없이 엮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세대들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다.
각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고유한 정신구조, 거의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다.
이 사회는 윗세대나 아랫세대하고 결합할 때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한다.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발을 헛디딜까 두렵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
꿋꿋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 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했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시간은 확신을 앗아갔고 결심에 상처를 냈다.
어릴 때는 원래 고마운 것도 모르고 온 힘을 성장에 쏟기 마련이다.
고마운 마음은 나중에, 자기가 뭔가를 바치거나 무사공평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삶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가족, 친구, 부모, 조국에 입은 은혜를 돌려주어야 할 때가 결국은 온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똑같이 베품으로써 갚아야 할 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음으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례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저마다의 운명은 두 심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익히 말했듯이 생은 늘 약속이라는 구조를 띤다. 우리의 요람을 들여다본 요정은 없었다.
지켜진 약속,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약속은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그 삶이다.
그 삶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가없는 감사를 우러나게 한다.
우리는 존재를 긍정하고 무조건 찬동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세상의 광휘, 그 눈부심을 찬양하라. 지상에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동물, 풍경, 예술작품,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경찬할 만한 기회를 찾도록 하자.
세상이 추해지지 않도록 숭고한 것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매혹을 발견해야 한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채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 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복한 인생이었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든, 어느 덧 떵거미가 내려앉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늙는다는 것은 달력 속으로 편입되는 것,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인생의 가을은 언제나 모순적으로 정의되어 왔다.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끝없는 겨울잠 속에서 쇠락해가는 슬픔이 있다.
무의식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패배를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라.
요컨데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산다는 것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를 다른 고도로 데려가고 기발한 상상의 장소로 끌고 가는 이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삶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 인생에 소설처럼 일관된 흐름이 있기를 바란다.
"정신은 필요한 것을 획득할 때보다 필요 이상의 것을 획득할 때 한층 더 흥분한다.
인간은 욕구의 창조물이 아니라 욕망의 창조물이다.
생은 지속하는 불확실성이다.
생은 지속하는 동안만 우리가 살아 있음을 보장한다.
단조로운 일상이 없으면 전격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일상의 선율은 통주저음이다.
그 통주저음을 배경 삼아 이따금 가슴 떨리는 아리아가 연주된다.
생을 시간의 지속으로 보면 과거는 현재를 내다본 역전된 예언같고 현재는 확증된 회고같다.
우리가 해온대로 하기를 잘했다.
생의 끝없는 속삭임은 이제 우리가 약해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감의 증거다.
이리 삶은 소설이 아니요, 늘 그날이 그날 같다.
뭐 새로운 것 없나?
별일 없이 사는 거지. 뭐.
그런데 인간은 일화 형식의 일상을 소재삼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간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품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른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능력, 이 무심한 한가로움이야말로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음의 특권이다.
그것이 젊음의 재능이자 경박함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기 위해 우연을 선택으로 바꾸는 일이다.
삶은 일종의 실험이다.
삶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쭉 나아가는 게 아니라 에둘렀다가 홱 질러가고 똬리 속에 이전의 과정을 품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간도 각기 다르고 치열함도 각기 다른 삶의 시기를 거친다.
우리는 나이를 먹되 마음이 늙지않게 지키고, 세상을 향한 욕구, 기쁨, 다음 세대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해야 한다.
당장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라.
지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자명해 보이는 것에 경이로워하는 능력,
그러한 능력은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를 보전하려는 바람, 이미 습득한 것에 안주하려는 태만을 이긴다.
인생은 작은 글씨로 쓰는 아주 긴 편지다.
생의 횡단은 때때로 위험하기 그지없으나 참으로 근사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심의 순서와 위계를 정할 줄 안다는 의미다.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안주하지 않고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일깨우는 남다른 이들을 우러르는 것이다....
저 나이가 되면 우리는 어떨까 궁금해서 그들을 열심히 분석한다.
본이 되는 사람은 철학의 모든 원리와 맞먹을 만큼 귀하다.
성공한 삶보다 자기를 실현한 삶이 중요하다.
다채로운 삶을 추구하려면 서로 모순되는 두 명령을 따라야 한다.
팔자에 만족하라. 그러나 세상의 소음에, 기이한 것들의 작은 음악에 언제나 깨어 있으라.
지금의 경이에 푹 빠져 살되 바깥의 감탄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지속의 행복과 유예의 행복, 집중의 행복과 확장의 행복. 평온과 도취, 익숙함과 도피같은 명암의 대비만이 황홀한 노년을 불러올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불멸을 추구하는 순교자들이 딱 이렇다.
그들은 수명 연장에 정신이 팔려 그 연장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다르면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는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당신의 장례식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지만 가장 먼저 당신을 기억에서 지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두고두고 당신을 그리워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이 온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와 철학이 아무리 너그러움을 발휘한들 죽음의 공포를 가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언젠가 무대에서 퇴장할 테고 잔치는 우리 없이는 계속되리라.
우리 안에서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식들이다...
생식은 나이든 사람을 젊은 사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종의 영속성을 보장한다.
적당한 수의 자식을 두는 것은 한없이 번창하는 생에 대한 선험적 에정 고백이다.
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요,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도 내세는 일차적으로 자식이다.
불가지론자인 우리를 지탱해주는 놀라운 불꽃은 생이 끝날 때 오는 해방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 영원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이다. 다른 영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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