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가기에 허상을 쫒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긴 우주의 시간에서 인간의 삶은 지극히 짧기에 욕망과 허상에 집착하는 것은 실로 덧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일상이 되면 스스로를 몰아 세우지 않고 벌어지는 모든 일에 담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하련다.

인간 각자가 소중히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도 나름 가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라질 것을 알기에 짧은 인생이 소중함을 알고 더욱 알차게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유교가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교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며, 불교은 뿌리를 뽑는 것이라는 견해다.

 

우리나라에는 우주의 기본 원리를 밝힌 비책 <천부경>이 있다.

단제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천부경>은 신라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사 사상의 연원이 되었으며, <주역>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천부경>의 시원은 중국의 요순과 동일한 시대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복희씨의 팔괘가 나왔으며, 그 뒤에 문왕의 <주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우주 만유의 인식 주체를 연구한 것으로 그는 인식 주체를 순수이성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진하고 수연한 이치에서 나온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에서 망상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불가에서는 우주의 생성을 업의 인으로부터 인과필정의 원리에 따른 계가 생겨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범어의 '카르마'를 번역한 '업'이란 말은 '만든다', '짓는다', '한다' 등의 활동을 의미한다.

결국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착한 생각도 하나의 업으로 보고 이를 선업이라고 한다.

업은 그 인에 대한 어떤 결과가 올 때까지 소멸하지 않는 업력불멸의 원리를 갖는다.

 

'탐심이 생기게 되면 부정관을 하라.' 이 말의 핵심에는 애욕에 대한 경책이 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한 거풀 벗기고 나면 그 속에는 오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눈앞에 천하의 양귀비가 있다 해도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는 오물을 상상해 보면 마음이 홀리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천하의 절세미인이라도 그 사람의 겉만 보지 말고 백골을 상상하면 탐심이 동하지 않게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허공에 이르면 하나가 된다.

허공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것에는 차별이 없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가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가 되지 않는다.

본래 빈자리라는 것을 확연히 봤거나 믿거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위기다, 불안이다 하는 것도 본연의 자리에서 말하면 본래 불안이 없으니 해소할 것도 없고 본래 위기가 없으니 안심할 것도 없다.

 

반면 부처님은 이 대몽을 깬 분이기 때문에 중생에게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만상은 실체가 없다. 전부가 환이요, 허상인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본래 진실해서 망상이 없는 자리는 천도이며, 진실무망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진실 무망한 데서 밝아진 것을 성이라 하고, 밝은 자리로부터 밝아져서 진실 무망인 것을 교라한다.

 

조사들이 부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과정에서 달마대사의 '사행관'을 간절해한다.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이나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위다.

셋째, 수연행은 연을 따르는 행위다. 연을 따른다는 것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일이 닥쳤을 때 응직, 불응직을 관해서 당연히 해야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끊어 버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법이 아니라 진리에 합한다는 의미다.

 

부처라는 것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부처가 거기 머무르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머물지 않는 것이다.

 

도는 진리를 나타내는 대명사다. 한마디로 길을 가리킨다.

이때 도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옛말씀에 도를 잃으면 덕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인을 잃으면 의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예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선은 마음속의 생멸을 없애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 하면 더 일어난다.

따라서 이때는 '나'라는 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때에만 생멸상이 사라지게 된다.

 

<원각경>에는 이 관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관, 환관, 적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먼저 정관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 환관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행동할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실상이라고 보지 않고 환 또는 허상, 즉 꿈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삼라만상을 꿈으로 보면 집착이 없어진다. 우리가 매순간 변화하는 현상적 꿈인 세계를 실상,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생긴다. 

세 번째는 적관이다. 적관은 주관과 객관을 모두 수용한 공부법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봐도 일어나는 곳이 없고, 밖으로 우주 삼라만상을 봐도 삼라만상이 꿈 같은 것이어서 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가상과 현실이 구분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온다면 당신은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

SF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너무나 현실같은 가상 세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상일 뿐이다.

당신은 현재에 존재하는 물질적 존재이다.

그것을 무시한다면 궁극적으로 당신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암울해질 것이 확실하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이런 언택트 세계를 메타버스(metaverse)라 부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를 뜻합니다.

인간이 디지털 기술로 현실세계를 초월해서 만들어낸 여러 세계를 메타버스라 합니다.

 

메타버스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세계, 어울림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더 편하게 더 많은 이들과 어울리기 위한 세계가 메타버스입니다.

메타버스 안에서 함께 지지고 볶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네 종류의 메타버스를 차례로 여행합니다.

증강 현실 세계, 라이프 로깅 세계, 거울 세계, 가상 세계 순으로 살펴 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를 메타버스라 부릅니다.

메타버스는 초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입니다.

현실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테라포밍은 지구화, 행성개조 정도로 해석되는 용어입니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다른 행성을 인간이 사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으로 바꾸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증강현실 메타버스가 잘못 구현된다면, "너는 직접 상상하지마. 네가 상상을 잘못해서 내가 전달하려는 의도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이해하는 게 나는 싫어. 네가 머릿속에 그릴 이미지, 네가 상상할 소리와 감정 등을 모두 내가 던져줄 테니 너는 그대로 받기만 해."라는 세상, 콘텐츠 제공자가 메타버스 속 사람들의 호모 사피엔스적 상상력까지 주무르는 통제된 세상이 될지 모릅니다. 참으로 무자비한 호모데우스가 창조한 메타버스가 아닐까요?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이 꿈속에서만 생각하는 것을 실행한다"

 

아바타는 온라인 환경에서 나를 대신해주는 분신, 케릭터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증강현실은 안전도 향상, 작업시간 단축, 품질 개선, 교육 원가 절감 등의 다양한 효과를 보이며 생산 현장, 공장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작업자들은 공장이 아닌 안락한 집이나 사무실에서 메타버스를 통해 모든 생산 공정을 진행할지도 모릅니다.

 

페르소나는 연극을 할 때 사용하는 탈,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람, 성격의 어원이 페르소나입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페르소나는 집단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개인이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를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 사이의 일종의 타협이라 정의했습니다. 원래의 내 모습과 사회에서 기대하는 나, 이 둘 사이의 어딘가라는 의미입니다.

 

현대인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지만,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기회는 의외로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담은 브이로그를 공유하는 메타버스가 급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타인의 일상 기록에 피드백을 남기며, 누군가의 기록과 기억을 단단하게 붙잡아줍니다.

삶을 기억하고 되돌아보는 과정,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라이프로깅이 망각의 선을 넘어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가 듭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창조적 인간에게는 상기, 기억보다 망각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망각은 능동적,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일시적으로 닫는 저지 능력이라 했습니다.

보다 고차원적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일시적으로 의식의 자리를 백지상태로 비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실제 세계의 모습, 정보, 구조 등을 가져가서 복사하듯이 만들어 낸 메타버스를 거울 세계라고 합니다.

현실 세계에 효율성과 확장성을 더해서 만들어집니다.

 

우리 뇌는 우리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 우리 뇌는 더 활발하게 깨어납니다.

가상 세계의 이점을 누리되, 현실 세계에서 더욱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뇌는 크게 세 가지 감정을 추구합니다. 세 가지 감정은 지배, 자극, 균형입니다.

지배는 경쟁에서 이기거나 누군가를 물리치는 행동, 남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행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자극은 새로운 음악, 영상을 즐기거나,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경험,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만남 등에서 얻는 탐색, 발견과 관련된 감정입니다. 균형은 안정감을 유지하고 싶은 감정입니다. 위험한 상황, 무서운 것, 불확실한 조건 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육체적, 물질적 욕망과 이성적, 도덕적 욕망을 동시에 가진 존재인데, 우리에게 잠재된 놀이 충동이 이 둘을 조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자유로워지며, 아름다운 존재가 됩니다. 자유와 아름다움을 깨달은 인간만이 참된 목적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철학자 칸트는 놀이가 즐겁고 편한 이유는 아무런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가상 세계 메타버스에서 함께 목적 없이 놀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적을 더 잘 찾아낼 겁니다.

 

현실 세계의 실재감을 완벽하게 구현해주는 기술이 등장한다면, 자칫 본인이 있는 공간이 가상 세계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실 세계에 있으면서 본인이 가상 세계에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인간의 기술로 완벽하게 무너뜨려도 될지에 대해서는 철학, 종교, 범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Z세대는 나이, 성별, 국적 등에 관한 선입견 없이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즐깁니다.

새로운 만남을 성장의 기회로 인식합니다.

메타버스에서 누군가와 만난다면, 상대의 나이와 성별에 아예 신경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별과 상관없이 당신이 그와 소통이 잘 된다고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익명으로 인해 낮아진 책임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상황, 공포감을 덜 느끼는 환경은 현실 세계보다 메타버스에서 사람들을 더 공격적으로 만드는 요소입니다.

 

HUD(Head Up Display)

변화해라. 억지로 변화해야 할 상황이 오기 전에 -잭 웰치-

 

좋은 책이다.

마음의 창을 넓게 함으로써 힘든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주도적으로 삶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내적 균형을 동요시킨 후 다시 조절되는 기준치로 돌아오는 과정을 생체 적응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성적이거나 장기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심신 체계는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도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늘 활성화된 상태로 남게 된다... 생체 적응 부하가 누적될수록 우리는 다양한 신테적 정서적 인지적 영적 행동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조절 장애를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생체적응 부하가 심각하게 누적됐고 우울증, PTSD, 불면증, 만성적 구토, 질주하는 생각, 과잉 각성, 안정적 신체 질병, 여러 가지 부적절한 대처 행동 등 많은 조절 장애 증상을 보였다.

 

우리에게 특정한 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적 성향이 있더라도 실제 유전자가 발현돼 그 성향이 표출될지 여부는 우리의 환경과 습관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환경적 요인과 습관이 우리 DNA나 주변 단백질을 변화시켜 이른바 후생유전학적 변화를 야기한다.... 결국 모든 것은 심신 체계가 겪는 반복 경험에 달렸다... 즉, 꾸준한 신체 운동으로 후생유전학적 변화가 이뤄져 뇌가 스트레스에 대해 더욱 회복탄력적인 상태로 재구조화된다는 것이다.

 

자울신경계에는 생존 뇌에서 장기로 메시지를 보내는 두 갈래의 경로가 있다. 즉, 스트레스 각성 시에 온몸이 즉각적 생존 욕구에 초점을 맞추도록 지시하는 것과 위협이 지나간 후 다시 회복에 초점을 맞추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한 갈래는 스트레스 체계를 가동하는 교감신경계이고 다른 갈래는 스트레스 체계의 가동을 끄고 몸의 소화, 회복, 성장, 생식, 수선, 휴식을 준비하는 부교감신경계다.

 

만성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심신 체계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충격적 경험이 끝난 후에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 결과 심신 체계는 계속 황성화 상태로 남아 생체 적응 부하를 가중시키고 사고 뇌와 생존 뇌의 대립 관계를 악화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체적응 부하가 누적되고 인내의 창이 좁아져 결국에는 조절 장애 증상이 나타난다.

 

엘라자르는 전쟁의 극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계속 다양한 관점의 얘기를 듣고 배울 수 있었다. 즉, 엘라자르는 전쟁 동안에도 사회참여를 확실히 유지해 시종일관 광범위한 사람들과 연결된 채로 조언과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인내의 창이 넓을수록 충격이 더 빨리 지나가 효과적 의사 결정과 다른 사고 뇌 기능에도 더 빨리 접근하게 될 것이다.

 

피로는 우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피로할 때 우리는 스트레스 각성과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삶의 예의 상황을 다루는데 유연성이 떨어진다.... 코르티솔은 면역 기능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만성 수면 부족은 명역계의 조절 장애와도 관련이 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

 

타성을 깨고 나오려면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 방식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자기 조절과 회복에 도움이 되는 생활 방식을 선택하도록 우선 순위를 정하고 실천하려면 일관되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습관을 개발하는 과정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런 노력 역시도 시간이 지날수록 관성이 불어 기쁨, 창조성, 연결성, 건강, 안녕에 다가가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인내의 창이 좁아지는 첫 번째 경로는 어린 시절 만성 스트레스와 발달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두 번재 경로는 너무 많은 스트레스 각성을 너무 빨리 겪게 될 때의 쇼크 트라우마다. 그리고 세 번째 경로는 일상생활에서 힘든 일이 너무 오래 지속되거나 너무 자주 발생해 만성 스트레스와 관계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경우다. 세 가지 경로는 모두 경험하든 한 가지 경로만 경험하든 상관없이 적절한 회복이 없는 한 스트레스 각성을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활성화해 생체 적응이 제기능을 멈춘다. 그러면 심신 체계는 즉각적 생존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회복, 보충, 치유, 성장 등의 장기적 욕구에는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생체 적응 부하의 누적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부 및 내부 상황에 큰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스트레스 요인을 줄이거나 제거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해볼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의 주체감이 높아질 뿐 아니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나머지 스트레스 요인도 창의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지혜는 우리가 원하거나 기대하는 대로가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그 정보를 이용해 지금 순간에 가장 효과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 용기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이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지면 어떤 영역에서도 주체성과 효과적 행동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만 특히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그럴 것이다." 가장 용감하고 가장 지혜로운 영혼은 외부의 영향에 결코 흔들리거나 방해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반복을 통해 인격적 특성을 발전시킨다. "이런 덕목은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만 그의 내면에 형성된다." 탁월함, 극기, 성품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다. 꾸준히 연습하는 행위 자체, 즉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시작하고 실수로부터 배우고 진심을 다해 그 길을 걸아가는 일 자체가 전사의 목표다.... 사무라이 무사시의 표현대로 " 진정한 길은...언제나 어떤 상황에나 적용되는 길이다."

 

" 한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는 똑바로 쏘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제로 과녁을 맞히는 것"이 선택될 수는 있어도 추구되지는 않는다."

 

내가 정복당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내가 정복하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스스로 천하무적이 될 수는 있어도

적이 쉽게 무너지게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승리는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지혜는 우리가 원하거나 기대하는 대로가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그 정보를 지금 순간에 가장 효과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엄격히 통제된 마음은 잘 통제된 마음과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으로는 그와 동일한 명료성, 유연성,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내면의 시끄러운 소리를 막느라 엄청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행 기능이 고갈될 뿐 아니라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데 필요한 주의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지혜에 기반을 둔 능숙한 행동은 오로지 이 순간에 현재 상황의 독특한 윤곽을 정확하고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삶이 우리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용기는 우리가 인생의 진리를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지만 용기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계속 행동을 취해나가려는 의지다. 이런 의지를 길러야만 온전하고 진실하고 두려움 없이 현재의 순간에 살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가진 전부인 것이다....전사의 일은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거이고 주체성이 제약받고 스스로 취약하다고 느낄 때도 계속 반복해서 주체성을 찾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이렇게 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달린' 요인들, 즉 심신 체계의 내적 자질과 외부 사건에 대한 우리의 내적 반응에 계속 집중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혜와 용기가 결합돼야 비로소 능숙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열린다.

상황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잇는 지혜와 자신의 환경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를 겸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일을할 수 있다.

 

성격은 반복해 도덕적 자질을 육성하고 인내의 창을 넓히고 능숙한 선택을 거듭함으로써 형성된다

훈련과 꾸준한 연습을 통해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자각에서 벗어나면 그 감정은 종종 나중에 다시 나타나는데 그때는 보통 강도가 더 세져서 다루기가 더 어려워진다.

 

인내의 창 밖에 있을 때는 어떤 생각이나 의미 이해도 감정에 의해 편향된다.

 

지혜가 있다면 아무리 강렬한 감정도 에너지 넘치는 파도일뿐임을 기억할 수 있다.

감정은 생겨나서 절정에 달하고 나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라는 시간표에 따르지는 않더라도 결국은 그렇게 된다.

지혜는 또 우리가 무엇을 밀쳐내려고 노력하든지 오히려 거기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 오히려 지속성을 보장하게 됨을 알려준다. 옛말에도 있듯이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지속된다.

 

인내의 창 밖에 있을 때는 생각을 멀리하려고 노력하고 다시 인내의 창 안으로 돌아올때가지 일체의 의사 결정, 문제 해결, 계획을 미루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광범위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삶의 일부분이다.

감정을 피하거나 부정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감정으로 우리를 규정할 필요도 없다.

 

오래된 감정 패턴이 해소되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우리는 냄새, 소리, 이미지, 기억을 인지할 수 있다.

이들은 단지 해소되기 위해 자각 속에서 표현된 미해결된 기억 캡슐의 일부일 뿐이다.

 

과거는 현재 순간의 자각을 통해서만 해소되고 치유될 수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연히 더 가벼워지고 여유로워진다.

인내이 창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감정적으로 더 개방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극도로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감정까지도 충분히 경험해 해소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겼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우리가 목표로 추구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어떤 날은 어려운 요가 자세도 취할 수 있지만 어떤 날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어떤 날은 마음이 차분하고 집중되지만 어떤 날은 질주하는 생각과 산만함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두려움과 자기 의심은 우리가 가장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재능과 자질을 활용하고 마음속의 진정한 소명을 따르며 우리의 진정성을 드러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두려움과 자기 의심은 종종 우리가 정확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조금씩 꾸준히 진도가 나가면 대단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더 좋은 점은 그러면 추진력과 자신감이 쌓이면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항이 일어날 때 그로 인해 곤란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성과난 결과를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고 연습과 경로에 완전히 전념해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매일 모습을 나차내도록 스스로를 훈련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현재 지향적 불안관리 체계다.

계획이 궤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적응 능력에 의존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가꿔온 관계, 우리가 익혀온 기술 그리고 인식, 지혜, 용기, 창조성, 자신감을 상황에 부여하는 넓은 인내의 창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적응 능력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 즉 통제할 수 없고 모호하고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럽고 놀랍고 엉망진창인 삶과 마주해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제나가 말했듯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괜찮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예상과 회복탄력성 사이의 균형을 찾으라는 것이다

 

계획 2.0

첫 번째 원칙은 우리가 인내의 창 안에 있을 때 선택을 해야만 자연히 장기적인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재 원칙은 의도성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분명히 추구하는 것이다. 의도성이 있으면 갈 길이 분명해지며 에너지가 집중되고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특정한 목표나 열망을 향해 진심으로 몰입하면서도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다른 경로가 있을 수 있도 그중 일부는 사고 뇌가 할 수 있는 수준을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의도적이고 끈기있게 매일매일 작은 일들을 꾸준히 실행하다 보면 몇 주만 지나도 장기적인 목표에서 얼마나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고 놀랄 것이다. 매일 장기적 목표에-단 15분이라도-투자함으로써 일단 스스로 보람을 느끼면 당신이 일정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다른 시간대에 대한 원망도 줄어들 것이다.

 

속도를 늦추면 삶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또 산만한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의 의도에 다시 집중하고 일상생활의 체계를 만들 수 있다.

 

뒷마당에서 조용히 차 한 잔을 즐기는 일에 가장 수용적인 경향이 있다.

아침에 한 연습이 온종일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더 명확하고 의도적으로 활동에 집중해 하루 내내 평화와 차분함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면 외부 상황과 산만함 때문에 본래 목표에서 벗어나 의도에 반하거나 상황을 악화하는 행동을 잘못 빠질 가능성이 줄어든다.

새로운 사고를 접하는 기회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혼자 서는 것, 그게 바로 야망이라고 생각해요...

야망 따위를 갖지 않고 초연해지고, 직장에서 아무런 옥심도 갖지 않으며, 일터에서의 자아와 퇴근 후의 자아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 그리하여 회사가 나를 버리든 내가 떠나든 언제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와 이별할 수 있는 것이었다. 회사에 연연하지 않으려면 최악의 경우 해고당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더라도 적어도 내 한 몸은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어야 했다.

 

마음에 어는점을 만들지 말 것,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을 것, 최대한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할 것, 어릴 적 읽은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나는 이런 걸 배웠다.

 

외계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강도로 압력을 가해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어릴 때 읽은 책은 자아의 일부분이 되거든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며 더욱 더 곧고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녀의 그 염결성이 어린 마음에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대단해 보여서 그 삶의 태도를 닮고 싶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어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가 되겠지만 저는 어른들 중에도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처럼 고약한 마음에 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끄떡없다는 굳은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 울면 지게 됩니다.

그럴 때야말로 생긋 웃으면서 살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내려 놓고 진솔하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나답게 쓸때 좋은 글이 나온다.

 

누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다. 그냥 각자의 길을 가다 보니 삶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때는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이제는 만나면 할 말이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날 때처럼, 그 관계를 포기하는 게 무척 힘들었던 적이 있다.

노력하면 되는 건데, 노력이 부족해 소원해진 것 같아서 애써 이어가보려 해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이제는 안다.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기한이 다한 인연은 '그간 고마웠다' 인사하고 미련 없이 보내는 거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다.

나는 아직 '그때 그 시절'의 추억에 머물러 있지만,

이제 내가 아닌 다른 관계에 몰두해 있다면 굳이 그 인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질 이유가 없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사이에서 갈등한다.

 

즉 내가 미치도록 그것이 될 것을 원했던 것으로 되는 대신에

자기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의외의 방향으로 어느새 자기가 형성되어버린 것을 발견한다.

 

홀리스 또 "마법이 존재한다 믿었던 유년기의 주술적 사고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믿었던 사춘기의 영웅적 사고가 우리가 경험한 삶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중간항로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중년은 '현실적 사고'와 관점을 갖게 되며 젊음의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뿐더러 종종 카타스트로프(파국)을 가져온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작고 외로운 존재야."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독에 갇혀 있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단다."

 

1999년 죽마고우 안네마리가 병으로 숨을 거둔다.

평생 외로웠고 나이 들어 더 외로웠던 이 여자는 그렇지만 순간을 충실히 살았다.

1967년 한 잡지 기자가 "환갑의 나이에 어쩌면 그토록 나이를 잊은 듯이 살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매일을 마치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

 

사람은 반드시 소박한 즐거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들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 한다.

 

그녀와 동류인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나는 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여야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인가.

그 사실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괜찮아"라고 나 자신에게 여러 번 얘기한다. 괜찮아. 넌 생각보다 강해. 괜찮아.

 

"불행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마라.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는 외로운 목소리가 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라.

 

"난 인간의 본성을 알아요.

시골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살다 보면 인간의 본성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지요."

 

"인간은 가여운 한편으로 아주 위험한 존재거든.

나약하고 정이 많은 살인범일수록 특히 위험하지.

나약한 사람일수록 궁지에 몰리면 두려운 나머지 잔인하게 변하고 절제를 전혀 못하니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를 기억해주던 마지막 사람이 떠나고 혼자가 된 기분,

나도 조카가 있고 다정한 친구들이 있지만 어렸을 적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함께 추억할 사람이 없지요. 난 아주 오랫동안 혼자로 지내왔답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그 사람의 내부에 있어요."

 

열여섯 살 소녀,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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