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이 많다.

나중에 언제고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강조한다.

 

창조성을 회복하면서 사람들은 훨씬 더 위대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창조란 정신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성을 탐험하러 나선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여는 것이다.

 

우리는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거나 굉장한 꿈을 구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때로는 피아노나 그림을 배운다든지, 연기 수업이나 창작 강의를 듣는다든지 하는 창조적인 일을 소망하기도 한다.

우리는 창조적인 삶에 굶주려 있다.

 

하나는 자율성이 강화되고 회복력과 기대감, 흥분을 장착한 새로운 자아가 출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창작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우주 안에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알기 위해 명상을 한다.

명상을 함으로써 바깥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내부의 힘의 원천에 대해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일정한 삶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이유는 그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복한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불행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실상 창조적인 삶이란 끝없는 관심의 연속이다.

관심이란 우주와 나를 연결하고 살아남는 방식이다.

 

할머니는 선인장꽃처럼 갑자기 돌아가셨다.

오늘은 있는데 내일은 사라지듯이 말이다.

할머니는 편지들과 62년을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를 남기셨다......

할머니가 작은 기회를 음미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인생의 큰 기회들을 날름 삼켜버렸다.

할머니는 거대한 스페인풍 저택에서 트레일러로,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철길 옆 오두막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싸구려 판자집으로 옮겨 다니며 삶을 할아버지와 함께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거듭된 실패에 분노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어떻게 견디셨는지 안다.

할머니는 삶의 물살에 무릎까지 담그고 그 물살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쏟으며 견디셨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정신을 갖는 것이고, 바른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관심을 쏟는 것이라는 할머니의 교훈을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삶의 진실은 그 삶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깨달으셨다.

삶의 질은 기쁨을 맛보는 능력과 비례하고, 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 메이 사턴은 삶의 중심이었던 아름답고 오랜 연애가 덧없이 끝난 즈음에 <고독 일기>를 썼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연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텅빈 집에 들어서서 "서재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국화꽃의 눈부신 광채에 걸음을 멈췄다.

스포트라이트처럼 겹겹의 진분홍 꽃잎 속에서 노란색이 밝에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가을빛을 수혈받은 기분이었다."

 

관심을 쏟으면 헤어진 연인, 아픈 아이, 깨진 꿈 등으로 인한 일상적인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치유된다.

릴케의 말을 빌리면 우리 모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다."

관심이란 무엇보다도 서로가 통하려는 작용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 관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동안,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과거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안전했다. 홀로 남겨진 매순간이 언제나 견딜 만했다.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괜찮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매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부고를 들은 나는 스웨터를 입고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종려나무 뒤에서 은빛 보름달이 솟았다.

달은 그날 밤 내내 선인장을 은빛으로 적시면서 정원 위에 걸려 있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 깨끗한 은빛 달이 생각난다.

시인 윌리엄 메러더스는 "그 사람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 가장 큰 욕이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작은 무늬가 수놓인 옷을 입고 정원 일을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이제 곧 남의 손으로 넘어갈 집 아래 가파른 경사 밑 여울에 있는 미루나무를 가리키면서,

"망아지들은 그늘이 있어서 저 나무를 좋아하지,

그리고 나는 저 나무들이 한창일 때 온통 은빛으로 빛나서 좋아한단다"라고 말씀하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우리는 뭔가를 잘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잘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위험은 그것을 감수한다는 것만으로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려면 뭔가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필요하다.

위험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도전할 만한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감행하는 것은 자신감을 낳고, 그런 자신감은 더 큰 도전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힘을 준다.

 

"난 나이가 너무 많아"라는 말은 두려움과 맞서는 것을 피하기 위한 회피전략일 뿐이다.

 

늙고 노쇠해도, 어리고 어수룩해도 해볼 수는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뭔가에 미쳐보는 것은 창조적인 탐험에 나서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우리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창조성을 회복하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만족스러운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고 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야"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의식하지 않는다. 일단 창조성의 물결에 휩사이면 우리는 아이가 된다.

 

어떻게 보면 창조적인 활동이란 끝을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연기하는 법을 다 배울 수 없다. 언제나 더 배워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완벽하게 감독할 수도 없다.

완벽하게 하려면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영화를 다시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창조적인 생활에 모험심이 샘솟는다.

하지만 똑같은 생활이라도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어리석고 황폐하게 느껴질 수 있다.

 

초보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은 아티스트에겐 언제나 최고의 기도이다.

초보자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탐구한다.

탐구는 성취로 이어진다. 모든 것은 작고 두려운 단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정작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종이 위나 회폭 위, 찰흙 덩어리 속,

또는 연기 수업 시간의 창작활동 안에서 벌어져야 한다.

 

창조성은 행동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행동은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유로워지려면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우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만 하고 행동하기를 싫어한다.

행동하는 대신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만 좋아한다.

 

답이 안 나오는 큰 문제에 빠져 있지 말고 작은 행동 한 가지를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하자.

커다란 문제에만 매달려 허우적거리면 자그마한 해답도 찾을 수 없다.

거창한 변화-물론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를 기대하지 말고 현재 있는 모든 것,

즉 지금의 일, 가정, 대인관계를 창조적으로 키워나갈 행동을 한다.

 

"우리는 가야만 하는 곳에 감으로써 배운다"

우리는 단계를 밞아나가면서 언제나 커다란 변화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커다란 변화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주선을 발사할 때 발사 궤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궤도 차이를 보이지 않는가.

 

열정은 삶의 흐름에 왕성한 활동력을 공급하는 에너지이다.

열정은 일이 아니라 놀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의 아티스트는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이자 놀이친구다.

여느 놀이친구들처럼 오랫동안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다.

노란 망태기 버섯

 

 

1.나다움으로 산다

2.온화한 분위기

3.말과 태도를 가린다

4.겸손하면서 당당하다

5.과시하지 않는다

6.좋은 자세를 취한다.

 

나이 들수록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람 특징 - 나이 들수록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 - YouTube

 

"글 전체에서 엘리트주의에 물든 학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보다 100년 이상의 경험을 축적한 지식인의 눈으로 보면 르 봉은 전형적인 차별주의자다."

번역자가 붙인 말이다.

내가 보기엔 르 봉은 군중의 부정적인 부분만 드러내서 글을 쓰고,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제외한 듯하다.

부패한 권력과 왕국은 타국의 침략에 의해서 망하기도 하지만, 민중의 봉기로 전복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백성 혹은 민중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해석하고 왕들의 통치에서 제일 주의할 항목으로 뽑는다.

 

군중 속의 개인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무수한 모래알과 같다.

 

이성과 벌이는 싸움에서 감정이 완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교적 영감을 받아 제작된 예술 작품과 기념물 모두를 발물관과 도서관에서 끄집어내 파괴하고 과장에 내던진다면

인간이 위대한 꿈이 이루어낸 흔적 중에서 무엇이 남을까?

신과 영우, 더 나아가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희망과 환상을 주기 위해서다.

희망도 없고 환상도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대담하게도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에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의 주된 힘이 있다.

군중은 예로부터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군중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오류가 마음에 들면 그것을 신격화한다.

군중의 마음에 환상을 심을 줄 아는 사람은 쉽게 그들이 지배자가 되지만,

군중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들의 제물이 된다.

 

경험은 군중의 정신에 진실을 확고히 심어주고, 지나치게 위험해진 환상을 걷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효과를 거두려면 많은 사람이 같은 일을 경험해야 하고,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어야 한다.

한 세대가 겪은 경험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대에 쓸모가 없다.

 

군중의 지도자는 대부분 사상가가 아니라 행동가다.

매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고, 앞으로 갖출 가능성도 무척 낮다.

혜안은 대부분 의심과 신중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신념이다.

복음서가 믿음에 산을 옮길만한 힘이 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믿음을 부여하면 그의 힘이 열 배는 더 커진다.

 

결국 세계를 이끌고 가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다.

그러나 지성은 너무 멀리서부터 세계를 끌고 간다.

사상을 만들어낸 철학자가 흙으로 돌아가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사상이 내가 방금 설명했던 장구한 과정을 거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뜻이다.

 

신념과 관습은 우리 삶의 지극히 사소한 행동까지 지배하기 때문에

독립심이 강한 사람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

우리 정신에 무의식적으로 발휘되는 지배력이야말로 진정한 폭정이다.

 

1895년에는 대표작인 <군중 심리>를 출간했다.

이책은 출간된 지 1년 만에 19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사회심리학의 선구자 역할을 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드골, 루스벨트, 처칠 등 세계를 이끈 정치인들도 <군중 심리>에서 르 봉이 제시한 원리를 통치에 적극 활용했다.

한편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들이 개중을 선동하는 일에 그의 의론을 악용하기도 했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까지 그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면 개인으로 존재하는 때처럼 이성적으로 추론하지 못한다."

 

대중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군중은 '활동하는 대중'이다.

 

르 봉에게 군중이란 문명의 계단에서 몇 단계 아래로 내려간 '야만인'이며 오직 파괴하는 힘밖에 없는 존재다.

 

수백 명이 한 공간에 있더라도 각자가 다른 목적을 띤다면 그들은 집합체에 불과하지만,

소수라도 '특정한 상황에서' 군중을 형성할 수 있다.

 

누군가의 신용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언론을 통해 악의적인 확언을 반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확언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의견이 일치되어 여론이 형성되면 전염이란 매커니즘이 개입한다.

 

책의 뒤로 갈수록 생각을 깨우는 글들이 많다.

정신을 새롭게하는 글들이 고맙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진실과 사실의 추구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 운동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립감과 분노에 빠진 사람들의 존재다...

사유하기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넘어서 한 개인을 사유 주체로, 판단 주체로 그리고 행동 주체로 자리잡게 한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사건에나' 공정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비로소 그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선택적 정의는 정의의 이름을 빌린 '불의'일 뿐이다.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라고 한 이유다.

 

칸트가 중요한 철학적 공헌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지닌 여성 혐오 사상과 인종 차별과 같은 인식의 사각지대의 문제들이 덮여서는 안된다.

 

변화란 마치 뜨개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완성을 위해서는 꾸준하게 지치지 말고 일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한 번에 한 걸음씩"의 입장을 지켜내며,

인내심을 가지고 개혁의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변화의 의미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헌법에 근거하여 설득했다.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는 범주 속에 트랜스젠더를 함께 넣는 것도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LGB"는 성적 지향에 관한 것이지만, "T(트랜스)"는 젠더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적 범주를 지칭하는 라벨을 붙이는 것에는, 언제나 그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 문화 종교 정치적 차별만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경험하면서까지 오랜 성전환 과정을 거쳐야 하는 트랜스젠더라고 규정되는 사람들,

이 모든 이가 다양성을 지닌 인간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인간됨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인류에 철학과 종교가 등장하게 된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런데 내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행복의 추구'라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존재다.

이 죽음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이 죽는다. 식물과 동물은 소멸할 뿐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 유한한 삶에서 무엇을 소중한 가치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성찰하게 한다...

철학은 '행복의 추구', 종교는 '구원의 추구'라고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유한한 삶에서 나에게 행복이 경험과 의미를 주는 소중한 그리고 진정한 관계를 가꾸고 있는가.

 

모든 고립이 외로움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할 사람이 없기에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상태의 고립이 있다.

즉 나의 행동에 "함께" 공조하고 연대하는 사람이 없을 때의 경험이다.

공포와 두려움을 권력 유지의 무기로 삼는 정치나 종교는 개별인들이 고립에 처하도록 하면서

그 고립감이 주는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을 조종하게 된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음'의 상태이다. 동시에 이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사유는 바로 고독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고독은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그 대화가 바로 사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고독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한 우선적 전제조건은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이다.

자기 신뢰를 통해서 자신과 또 다른 자기와의 대화인 비판적 사유가 가능하게 된다.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자 사랑을 할 수 없다.

 

외적인 고립이 정신 세계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로 자기만의 정원을 끊임없이 가꾸는 일이다.

그는 그 오랜 고립과 시간에 끊임없는 독서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낮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립과 외로움이 줄 수 있는 파괴성을 넘어서서 비판적 사유와 성찰이 일어나는 '고독'의 시공간을 창출했고

27년 6개월이라는 길고 긴 고립의 시간 동안 새롭게 변화된 세계의 낮꿈을 일구어 냈다.

 

고독의 시간에 자신과 만나는 것은 타자와 "함께-살아감"의 중요한 토대가 되기에, 함께-살아감의 소중한 예식이기도 하다.

'고독 연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살아감이란 무수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질병과 같은 외적인 문제들,

또는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과 씨름하는 내적인 문제들 등 우리 각자의 삶에 '문제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지금' 절실하게 시름하는 문제가 끝나면 이제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 문제의 색체와 농도가 다를 뿐,

언제나 지금 나의 삶에는 외적인 문제들, 그리고 내면적인 문제들이 나의 세계에 자리 잡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제없는 삶을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문제들과 씨름하는 삶을 살 것인가"로 질문의 구성을 바꾸어야 한다.

 

이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만이,

우리 각자의 삶이 지닌 무의미성과 부조리를 넘어서는 용기와 열정을 지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삶이 비처럼 나 자신에게 쏟아지게 하련다.

 

타자들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죽음들이 '나'를 이 삶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 죽음들을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것은, '문제없는 삶'에 대한 동경과 기다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나의 삶을 살 것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들을 용감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어떠한 문제들과 씨름하며 살 것인가. 이 근원적인 물음과 매일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살아있음의 과제이다.

 

의도적 헌신이 없는 삶이란 실존적 심연으로 우리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

목적의식이 없는 삶은 불안을 가져 온다.

의미로운 삶이란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내면은 끊임없이 자신이 새로운 탄생을 믿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탄생의 능력은 새로운 해의 시작에 새로운 결심을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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