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뒤로 갈수록 생각을 깨우는 글들이 많다.

정신을 새롭게하는 글들이 고맙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진실과 사실의 추구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 운동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립감과 분노에 빠진 사람들의 존재다...

사유하기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넘어서 한 개인을 사유 주체로, 판단 주체로 그리고 행동 주체로 자리잡게 한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사건에나' 공정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비로소 그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선택적 정의는 정의의 이름을 빌린 '불의'일 뿐이다.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라고 한 이유다.

 

칸트가 중요한 철학적 공헌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지닌 여성 혐오 사상과 인종 차별과 같은 인식의 사각지대의 문제들이 덮여서는 안된다.

 

변화란 마치 뜨개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완성을 위해서는 꾸준하게 지치지 말고 일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한 번에 한 걸음씩"의 입장을 지켜내며,

인내심을 가지고 개혁의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변화의 의미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헌법에 근거하여 설득했다.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는 범주 속에 트랜스젠더를 함께 넣는 것도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LGB"는 성적 지향에 관한 것이지만, "T(트랜스)"는 젠더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적 범주를 지칭하는 라벨을 붙이는 것에는, 언제나 그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 문화 종교 정치적 차별만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경험하면서까지 오랜 성전환 과정을 거쳐야 하는 트랜스젠더라고 규정되는 사람들,

이 모든 이가 다양성을 지닌 인간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인간됨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인류에 철학과 종교가 등장하게 된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런데 내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행복의 추구'라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존재다.

이 죽음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이 죽는다. 식물과 동물은 소멸할 뿐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 유한한 삶에서 무엇을 소중한 가치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성찰하게 한다...

철학은 '행복의 추구', 종교는 '구원의 추구'라고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유한한 삶에서 나에게 행복이 경험과 의미를 주는 소중한 그리고 진정한 관계를 가꾸고 있는가.

 

모든 고립이 외로움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할 사람이 없기에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상태의 고립이 있다.

즉 나의 행동에 "함께" 공조하고 연대하는 사람이 없을 때의 경험이다.

공포와 두려움을 권력 유지의 무기로 삼는 정치나 종교는 개별인들이 고립에 처하도록 하면서

그 고립감이 주는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을 조종하게 된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음'의 상태이다. 동시에 이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사유는 바로 고독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고독은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그 대화가 바로 사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고독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한 우선적 전제조건은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이다.

자기 신뢰를 통해서 자신과 또 다른 자기와의 대화인 비판적 사유가 가능하게 된다.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자 사랑을 할 수 없다.

 

외적인 고립이 정신 세계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로 자기만의 정원을 끊임없이 가꾸는 일이다.

그는 그 오랜 고립과 시간에 끊임없는 독서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낮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립과 외로움이 줄 수 있는 파괴성을 넘어서서 비판적 사유와 성찰이 일어나는 '고독'의 시공간을 창출했고

27년 6개월이라는 길고 긴 고립의 시간 동안 새롭게 변화된 세계의 낮꿈을 일구어 냈다.

 

고독의 시간에 자신과 만나는 것은 타자와 "함께-살아감"의 중요한 토대가 되기에, 함께-살아감의 소중한 예식이기도 하다.

'고독 연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살아감이란 무수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질병과 같은 외적인 문제들,

또는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과 씨름하는 내적인 문제들 등 우리 각자의 삶에 '문제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지금' 절실하게 시름하는 문제가 끝나면 이제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 문제의 색체와 농도가 다를 뿐,

언제나 지금 나의 삶에는 외적인 문제들, 그리고 내면적인 문제들이 나의 세계에 자리 잡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제없는 삶을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문제들과 씨름하는 삶을 살 것인가"로 질문의 구성을 바꾸어야 한다.

 

이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만이,

우리 각자의 삶이 지닌 무의미성과 부조리를 넘어서는 용기와 열정을 지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삶이 비처럼 나 자신에게 쏟아지게 하련다.

 

타자들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죽음들이 '나'를 이 삶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 죽음들을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것은, '문제없는 삶'에 대한 동경과 기다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나의 삶을 살 것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들을 용감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어떠한 문제들과 씨름하며 살 것인가. 이 근원적인 물음과 매일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살아있음의 과제이다.

 

의도적 헌신이 없는 삶이란 실존적 심연으로 우리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

목적의식이 없는 삶은 불안을 가져 온다.

의미로운 삶이란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내면은 끊임없이 자신이 새로운 탄생을 믿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탄생의 능력은 새로운 해의 시작에 새로운 결심을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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