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개념과 인식에 대한 통찰을 넓혀주는 책이다.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평지에서 산 친구는 살아온 시간이 더 짧아서 덜 늙어 있다.
모든 물체는 자기 주의의 시간을 더디게 한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주의의 시간을 늦춘다.
평지에서 시간이 더 많이 지연되고, 산에서는 덜 지연되는 이유는 산이 지구의 중심과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개 때문이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러한 시간의 지연 때문이다.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곳, 예를 들어 행성 사이의 공간에서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고 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의 표면에서는 사물이 자연스럽게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쪽으로 향한다.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역행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명석한 독일인답게 '엔트로피'라는 명칭을 붙인다.
델타S >=0, 읽을 때는 '델타 S는 0과 같거나 그 이상이다.'라고 읽고, '열역학 제2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기초 물리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는 유일한 방정식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질량에 의해 늦춰진다는 것을 깨닫기 10년 전에, 시간이 속도 때문에 늦춰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는 걸어다닌 친구의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른다...
많이 움직이면 많이 움직일수록 시가은 더 천천히 흐른다...
'고유 시간'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에 따라 인접해 있는 물질의 질량이 많고 적은지에 따라 달라질 뿐아니라,
이동하는 속도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고작해야 10분의 1초 정도를 간신히 구분할 수 있으므로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하나의 거품에 비유하고,
그 속에서의 현재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미래 속의 공간 영역에 가두는 것, 이것이 블랙홀이다.
시공간이 중력장이고, 중력장이 시공간이다.
뉴턴이 예상한 것처럼 물질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양자역학 때문에 얻은 발견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인데,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입자성: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된다....
다시 말해,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입자성을 띌 수 있고 최소 시간 간격이 있다는 생각을 뉴턴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원자로, 즉 짧은 기간 때문에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수많은 부분들로 구성된다."
시간의 양자 중첩성: 양자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내일 전자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자는 한번 나타났다 곧이어 다시 나타나는 동안에 정확한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감정과 생각으로 산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을 때 대화를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피부를 스치면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
이렇게 위치와 속도가 '교환되지 않는 것,
즉 아무 영향없이 위치와 속도의 순서를 서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양자 변수의 '비가환성'이라 부른다.
이 비가환성은 양자역학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다.
비가환성은 두 물리적 변수를 측정함에 있어서 순서, 즉 시간성의 기원을 결정한다.
물리적 변수를 측정하는 일은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이 상호 작용의 영향은 측정 순서에 따라 달라지며, 이 순서는 시간 순서의 기본 형태이다.
상호 작용의 영향이,
세상의 시간 순서의 기반을 형성하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서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속도는 다른 물체와의 관련 속에서 한 물체가 갖는 특성이다. 상대적인 양인 것이다.
관찰자의 관점을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잃게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객관성에 집착하다가 우리의 세상 경험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던지는 모든 시선은 어쨌든 특별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든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과 뇌, 공간의 어느 지점, 시간의 어느 순간 안에 있다.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본' 새계의 시간 구조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측면, 즉 우리가 세상 안에서
세상의 일부로 존재함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우주의 탄생 초기에는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사실을 그냥 관측 자료로 받아들이고 말면 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낮은 엔트로피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에너지원이 아니라 낮은 엔트로피 근원들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없으면 에너지는 균일한 열로 약해지고, 세상은 열평형 상태에서 잠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도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소 구름들이 응축한 후에야 핵융합 과정을 촉발시키는 지점까지 가열이 시작될 수 있다.
수소를 태워 헬륨으로 만드는 핵융합 과정의 점화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이다.
우주의 모든 역사는 이렇게 엔트로피 증가가 멈추고 점프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 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
우주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과정이다....
우주를 섞는 거대한 손은 따로 없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섞일 뿐이다.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통로들이 열려 이를 통해 무질서가 퍼져나갈때까지,
광할한 영역들은 질서정연한 배열 속에 갇혀있다.
세상에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역사를 쓰는 것은,
몇 안되는 정리된 배열에서 무질서한 무수한 배열까지 모든 사물들의 불가항력적인 혼합이다.
우주는 조금씩 붕괴되는 산과 같다. 매우 서서히 무너지는 구조물과 같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아주 복잡한 사건까지, 우주의 초기 낮은 엔트로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점점 성장하는 엔트로피의 춤이 진정한 생명의 여신 시바의 춤인 동시에 파괴자인 것이다.
미래가 아닌'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 뿐이다.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우리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
1. 우리 각자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성찰하고 받은 엄격하게 통합된 방식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2. 우리 자아의 기초가 되는 두 번째 요소는 마차의 예와 같다.
우리는 세상을 성찰하면서 그것을 실체들로 조직화 한다...
세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결같고 안정적인 연속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그룹화하고 분류한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나는 내면적 성찰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자아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주체라고 생각한 경험은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수많은 생각들에 기초한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나의 일차적인 경험은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존재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반영이다...
3. 우리의 자아를 세우는 데 세 번째 요소는 기억이다.
나는 내 인생이 담긴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넓은 의미에서 뇌는 과거의 기억을 수집해 지속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하는 메커니즘이다.
우리가 현재의 한순간만 포착한다면 어떻게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인지력이 기억과 예측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철학>에서 인간은 하늘의 움직임과 스스로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하므로,
본인과 세상의 공존을 통해 시간을 인지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음을 듣는 순간, 이전의 음이 '보존'되고, 그 다음에는 보존된 음이 보존되고,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로말미암아 현재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과거의 연속인 흔적들을 포함하게 된다.
후설에 의하면 이러한 보존 과정을 통해 현상이 '시간을 구성'한다...
결국 시간의 내적 의식이 존재의 지평임을 확인하게 된다...
뇌는 결국 외부 세상과 우리 마음의 작동 구조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는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은 뇌의 작용이다.
우리가 이러한 작용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것은 뇌 전체가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들에 기초해서 작동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기억으로 뭉쳐져 있는, 엔트로피 증가는 대역사의 산물이다.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재들이 아니다. 이성은 개념을 밝히고 오류를 찾아내는 데 필요하다.
그런데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포유류로서, 사냥꾼으로서, 사회적이 존재로서의 내면 구조에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성은 위와 같은 두려움들이 연결되는 사실을 밝히기만 할 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애초에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정작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동기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 동기들에 명목을 부여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동기가 있다.
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