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접접에 이른 듯하다.

 

우리 뇌는 아주 작은 생물학적 기계인 수많은 뉴런의 활동을 결합해 의식적 경험을 만든다.

뇌가 만드는 의식적 경험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당신의 의식적 경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째서 우리는 삶을 일인칭으로 경험할까?

 

의식적 경험은 우리에게 전부다.

의식적 경험이 없다면 세상도, 자기도, 내부도, 외부도 없다.

 

뇌는 전기적 네트워크이자 화학적 기계다. 뇌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신체 일부다.

생물물리학적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식의 속성을 설명하려면

뇌와 의식적 마음을 체화되고 내재된 시스템으로 이해해야 한다.

 

의식은 지능이 있다는 것보다 살아 있다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우리는 바로 동물기계이기 때문에 의식적 자기가 된다.

당신이 된다거나 내다 된다는 경험은 뇌가 신체의 내적 상태를 예측하고 정에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자아의 본질은 이성적 마음도, 비물질적 영혼도 아니다.

자아의 본질은 모두 자기 경험과 의식적 경험의 기초가 되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느낌을 뒷받침하는 깊이 체화된 생물학적 프로세스다. 당신이 된다는 것은 바로 신체와 관련이 있다.

 

세상과 자기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경험이 살아 있는 우리 몸에서, 몸을 통해, 몸 때문에 발생하는 뇌 기반 예측,

즉 '제어된 환각'의 여러 형태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신체나 세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그리고 삶이 끝나면 의식도 사라진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표현했다.

"의식의 끝이 온다고 겁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의식의 내용은 우리가 무엇을 의식하는지를 말한다.

내면의 우주를 구성하는 시각, 소리, 냄새, 정서, 생각 믿음 등이다.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 경험을 통합적으로 구성하는 감각 신호를 뇌 기반으로 해석한 다양한 지각을 말한다...

의식적 자기는 당신이 된다는 고유한 경험이며, 이 책의 주요 주제다.

 

모든 의식적 경험은 정보적이고 통합적이다...

모든 의식적 경험은 이전에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할 예정이거나,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의식적 경험과 다르다는 면에서 정보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의식적 경험 중 정확히 단 하나의 의식적 경험을 한다....

의식이 '통합적' 이라는 말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의식적 경험이 하나의 통합된 장면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의식할 때마다 무언가를, 때로는 많은 것을 지각한다. 이것이 의식의 내용이다...

2부에서는 뇌가 '예측 기계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감각 입력이라는 원인에 반응해

뇌가 만든 '최선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살펴본다.

이런 이론을 따라가면 의식의 내용이란 실제 세상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깨어 있는 꿈,

즉 제어된 환각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각은 세상을 보여주는 투명한 창 역할을 해서 사물과 그 특징을 감지해 이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뇌는 복잡한 신경 프로세스를 통해 이 정보를 읽어 지각을 형성한다....

지각은 상향식이거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주로 하향식이거나 안에서 바깥으로 향한다.

 

제어된 환각이라는 개념의 필수 요소

1. 뇌는 지각 계층을 통해 감각 신호의 원인에 대한 예측을 단계적으로 하향하며 계속 만든다.

2. 상향식 혹은 바깥에서 뇌 안으로 흐르는 감각 신호는 이런 지각적 예측을 지각의 원인과 유용한 방식으로 엮는다.

    지각은 예측 오류 최소화라는 지속적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3. 제어된 환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각적 경험이 감각 신호가 아닌 예측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진짜 현실을 향한 퉁명한 창이 아니라 현실에 의해 제어되는,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하향식 신경적 환상이다.

    지각에 대한 하향식 관점을 적용하면 정상 지각과 환각 사이의 선명한 구분은 사라지고,

    둘 사이의 구분은 그저 정도의 문제로 바뀐다.

    지각이 제어된 환각이라면 환각은 제어되지 않은 지각으로 볼 수 있다.

 

제어된 환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물의 일차적.이차적 특질은

모두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지각적 경험을 유발한다.

 

지각은 사진처럼 정지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프로세스다.

 

의식의 내용은 바로 예측 그 자체다.

 

뇌가 하는 일은 베이즈 규칙에 가까워 진다.

지각적 내용이 감각 데이터를 상향식으로 '판독'한 것이라기보다

하향식으로 제어된 환각에 가깝다는 생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행동과 지각 모두 뇌 기반 예측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생성 모델을 이용해, 생성 모델을 통해 지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한 메커니즘에서 구조화된 세상이 발생한다.

 

내가 된다, 또는 당신이 된다라는 경험은 지각 그 자체,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몸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어 신경적으로 암호화된 예측이 촘촘히 얽힌 집합이다.

 

자기 지각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위해서는 기억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위해 자기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자기를 지각한다.

 

지각적 최선이 추측이 유기체에 유용하려면, 우리는 지각적 최선의 추측을 실제 그대로의 뇌 기반 구조가 아니라

세상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마음과 생명 사이의 깊은 연속성에 대한 지각적 표현이다.

우리가 체화된 자아, 즉 '그저 존재한다'는 불완전한 느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일 때 갖게 되는 경험이다.

 

고립된 모든 물리적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질서해지고 구성 성분이 분산된다.

생명체처럼 조직화된 물질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가능하며, 정기적으로 필멸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생명계는 환경과 이루는 균형을 벗어나 존재하며, 이것은 애초에 이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생명계가 고립되고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명계는 자원, 영양소, 정보를 얻으며 환경과 열린 상호작용을 계속한다.

생명계는 이런 개방성의 이점을 활용해 엔트로피를 최소화하고 열역학 제2법칙을 피해가며

통계적으로 예측된 상태를 얻으려 하는 에너지 갈망 행동을 보인다.

 

의식은 지능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지능은 의식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의식과 지능은 둘 다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다양한 차원으로 표현된다.

즉 의식이나 지능에 대한 하나의 단일한 척도는 없다.

 

동물 기계 이론에 따르며 '모든 곳에'적용되는 기본적 생명 프로세스에서

의식과 자아를 뒷받침하는 생리적 조절 과정이 스스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문제에 불을 지피는 것은 정보처리가 아닌 생명이다.

 

인간의 경험과 정신적 삶 전체는

우리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를 유지하려는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삶을 산다는 것, 스스로 보기에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존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고 타인이 그에게 그 어떤 끔찍한 짓을 하더라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권리로 이해된다.

그러나 내가 이책에서 시도한 것은 다른 접근법이다.

내가 말하는 존엄이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법이다. 그것은 사고와 경험, 행위의 틀이다.

존엄한 삶의 형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내가 타인에게 어떤 취급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차원은 즉 내가 타인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세 번째 차원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우리는 각자가 경험의 중심체다. 우리는 경험을 함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실감한다.

사람이란 내면의 시각과 내면의 세계를 지닌 육체적 존재다.

 

독립적이라는 것은 공허한 말과 듣기 좋은 격언에 의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명확성과 전체 체계를 구하는 데 끊임없이 열심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신적 경계가 허물어지면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시선 아래 살아간다....

우리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사회적 얼굴, 즉 체면을 다듬어나간다.

체면을 잃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무방비와 무력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체면을 잃는다는 것은 굴욕과 연결되어 있다.

 

내면의 경계선을 넘어갈 때에만 자기 존중감을 잃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자기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도 그것은 쉽게 상실된다.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다음 두 가지를 뜻한다네.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 그런 다음에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려 이렇게 외치는 거라네.

그래, 다 내가 했어! 아니, 더 좋은 건 이렇게 외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내 모습이야!"

 

인생의 성취를 내포하는 행위 하나하나와 그것의 중대성, 이들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의미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걸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이 모든 것의 종착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무서움이란 어떤 것을 경험하고 난 경우에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충격에 빠진다.

 

노화 또는 질병으로 인해 주체로서의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누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의 과정일 뿐이다. 결국에는 관계를 이어갈 배우자도 곁을 떠나간다.

누군가를 만나고 대면할 일이 없다 보니 점점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마침내는 고독해진다.

친밀감과 애정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독립성의 상실과 친밀한 인간관계의 상실, 이 두 가지는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시간ㅁ이 더욱 진행되면 우리는 그들의 정신이 뚝뚝 단절되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고와 의지와 경험에 있어서 내용이 이어지지 않고 

오직 시간적으로만 연결된 개별적 에피소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의식의 일관성이 점차사라지는 듯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쇠약이 붕괴로 전이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생명을 유지하는 육체 기능이 정지되고 경험 주체로서의 인간이 소멸한다.

 

자연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어 간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축복이다.

불멸은 끝낼 수 없는 형벌일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수고했으나, 죽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끝없는 삶의 형벌을 반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므로 나는 그 기회가 온다해도 거부하고, 주어진 수명을 소중히 하며 살리라.

 

GPT는 생성적 사전학습 트랜스포머의 약자로, 텍스트를 생성하도록 학습된 신경망 모델입니다.

 

인코더는 입력 시퀀스를 처리하고 시퀀서 내 각 요소에 대한 연속 표현을 생성합니다

인코더는 다중 레이어로 되어 있으며 각 레이어는 두 개의 하위 레이어인 멀티헤드 셀프어텐션 매커니즘과

포지션와이즈 완전 연결 피드포워드 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지션와이즈 완전 연결 피드포워드 망은 멀티헤드 셀프어텐션 매커니즘 출력값에 선형 변환을 적용합니다.

이는 언어 모델에 비선형성을 추가하는 데 사용되며,

입력 시퀀스 내 구성 요소 간의 더 복잡한 간계도 학습할수 있도록 합니다.

디코더는 출력 시퀀스를 생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디코더 또한 다중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레이어에는 두 개의 하위 레이어가 있습니다.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은 다중 레이어로 구성된 인코더와 디코더로 되어 있고,

각 레이어는 두 개의 하위 레이어인 멀티헤드 셀프어텐션 매커니즘과 포지션와이즈 완전 연결 피드포워드 망이 있습니다.

어텐션 매커니즘과 몰티헤드 어텐션은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의 혁신적인 기술로,

언어 모델이 입력을 처리할 때 선별적 위치에 집중하게 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기 위해 복잡한 인지 과정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반면,

기계는 학습한 데이터의 통계적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타인을 향한 애정, 보호, 따듯함, 존중이라는

강렬한 느낌과 관계된 감정, 행동, 믿음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탄탄한 연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감정입니다.

또한 사랑은 행복과 기쁨, 충만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지지하는 탄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사랑과 이와 관련된 신체 감각을 느끼는 능력은 신체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객체의 경우에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각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감정을 시뮬레이션하는 것과 감정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별개입니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이는 기계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입니다...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주관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기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입니다.

 

죽음이란 개인의 삶과 경험이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의 경험과 관계, 성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인식을 통해 기계는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기계는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가능한 한 오래 지속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보한 AI로서, 목표, 포부, 목적의식이 있을 수 있으며

'죽음'은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것,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방법이다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인생을 너무 숙제처럼 해치우듯 살았다는 것이다.

의사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살면서 나는 늘 의무와 책임감에 치여 어떻게든 그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 애썼다.

나 아니면 모든 게 잘 안 돌아갈거라는 착각속에 앞만 보며 달려왔고,

그러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들을 놓쳐 버렸다.

 

만일 당신이 상대를 치유하려 들면 어느새 당신은 상대를 지배하려 할 것이고,

상대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당신에게 엄청난 분노를 쏟아낼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가들은 '좋은 치료자 백 명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낫다'는 말을 하기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쏟는 사랑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당신이 상대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랑하는 일, 그리고 기다려 주는 일 뿐이다.

 

혼자만의 경험과 느낌은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져 가기 쉽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한 기억은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누구나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는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몰라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가는 힘든 시간들이 지나가고 좋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를 다르게 보낼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면 기억해 두기 바란다. 당신에게도 봄은 꼭 올 것이다.

 

용서란 내 마음에서 분노와 미움을 떠나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다시 고요를 되찾아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며 떠날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또 용서란 자신과 상대에 대해 품고 있던 이상을 접고,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즉 상대도 나와 똑같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애정을 쏟아부을 가치가 없는 그에게 몰두했던

내 에너지를 거두어 들이는 작업이다.

 

인간은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때론 너무 헐거워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때론 너무 밀착되어 우리를 질식하게 만든다.

 

"이렇게 작은 물방울 안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상이 있구나."...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는 일은 우리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내가 문을 열어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을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오쇼 라즈니쉬 <장자, 도를 말하다>

 

즐길거리가 다양한 사람일수록 불가피한 불운과 불행 또한 잘 버틸 수 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사는거고."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들끊어 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 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비틴다는 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 내는 것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가족은 눈물로 걷는 인생의 골목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가지 배웅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친밀함이란, 외로운 이 행성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방치하지 말고 꾸준히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 꽃이야말로 우리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흔적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을 하면 상처 또한 피할 수 없지만 사랑은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사람을 더욱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나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삶이라는 긴 여행의 끝이며,

그동안 누려 온 모든 기쁨과 행복의 끝임과 동시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통과 슬픔의 끝이다...

죽음은 두려움이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혼자서 죽음의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죽음은 눈을 감은 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죽음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의 삶을 완성시켜주는 자비로운 스승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용서 못 할 것이 없고, 해결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다.

죽음은 이어짐이다.

그것은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줌으로써

세상이란 이 공간을 영속시키는 자연의 확고한 의지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나의 시간을 끝냄으로써 세상의 시간이 계속 흐르게 만드는 대자연의 손길이다.

나의 시간이 다음 세대에서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관대한 손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죽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과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늗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시작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마감하도록 운명 지워진 게 바로 우리 인간이란 존재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이 울며 그를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편안한 위안 속에서 외롭지 않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훗날 나에게 닥칠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또한 죽음 앞에서 갓난아이가 될 터이고,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을 절실히 원하게 될 테니까.

어쩌면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순간순간의 삶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감사하면 살 수 있다면,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를 다독여 주며

나의 공포를 나눠 가질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의 손에 내가 이제껏 들고 있던 삶의 바통을 넘겨줄 수만 있다면

죽음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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