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게."

그렇게 살아보자

 

"인간은 결국 감정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당장은 시그널이나 기호일 뿐이라 해독이 필요하다.

 

내가 갈 길을 알주는 실마리, 그것은 '감정'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에게 아직 감정이란 달팽이가 침 흘린 흔적만큼이나 흐릿하고 모호하며 무엇보다 믿을만 하지 못하다.

쏟아내고 펼쳐 선명한 햇살을 쬐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일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만큼은 드러내자.

아니 척하고, 그런 척하고,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를 내려놓고  솔직해지자.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사람은 쓸모있는 일만 하고 살면 숨구멍이 막힌다.

 

맺음이 끝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까지가 끝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옳지 않을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란 무엇이었을까....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배신당할까 신뢰하지 않고 버림받을까 사랑하지 않는다.

거부당할까 다가가지 않고 실망할까 기대하지 않고 실패할까 시도하지 않는다.

배신당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거부당할 일도 실망할 일도 실패할 일도 없다.

그래서 행복한가. 아프지 않아서 횅복한가.

마음에 상처가 없고 흉터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의 마음에는 상처와 흉터가 없지만 광휘와 내력 또한 없다.

아픔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노라 마음이 보내는 신호인데

상처도 흉터도 없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 머문 적 없다는 소리가 된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심리학의 원리>를 쓴 윌리엄 제임스는 육체에 변화가 나타날 때 그 변화에 대한 느낌'이 감정이라고 말한다.

감정을 인지한 다음에 육체의 변화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육체의 변화가 나타날 때 느끼는 것이 감정이라는 얘기다.

 

사랑을 해서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가슴이 뛰어서 사랑을 한다.

몸의  지각이 먼저이고 두뇌의 감지는 나중이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즐겁다....

소중한 것이 생겨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느껴서 소중한 것이 된다.

 

사고와 유추는 새로운 정보를 고유의 기억과 연결해서 그 결과를 상상하는 과정이다...

이런 뇌의 생리를 들여다보면 과거와 미래, 현재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늘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니간 때와 앞으로 올 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분명하게 표현하기만 해도 격한 느낌이 누그러질 수 있다.

 

그러다간 최후의 것마저 빼앗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후의 것이란 '자기 자신'이다. 무기력의 징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우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타인이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행동하지 않으면서 희망을 품는 것...

"삶이 이대로라면 복수할 수밖에."

나는 로트렉처럼 복수를 다짐했고 동시에 그가 인정머리 없는 수준만큼 처절한 가난뱅이가 되기를 저주했다...

복수를 꿈꾸며 일어서는 것이 슬픔의 늪에 빠지기보다 차라리 이롭다.

분노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정당한 신호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 등이 모욕이다.

왜 이런 착각이 생기는가? 이 역시 뜻풀이에 있다. '교만해서'.

 

정리하자면 멸시, 경멸, 무시, 비웃음, 업신여김, 깔봄, 얕잡아봄 등을 비롯해 모욕이란 잘나지 못해서 잘난 체하느라

타인을 실제보다 낮추어 보는 착각에서 하는 눈빛, 표정, 말투, 몸짓 등이다.

여기에 이르니 모욕은 굉장히 모자라는 마음이다. 그들의 착각은 그들의 것이다.

내 감정이 전염돼서 내가 나를 낮추어보는 착각은 하지 말자.

그들이 착각하는 나에 대해 해명하거나 변호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그들의 것이므로 내가 바라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

노래 부르며 내 갈 길을 가면 되겠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은 내가 간 길이 내가 그들에게 하는 답이 된다. 말이 아니라.

모욕을 당한다고 자신의 본질이나 실력이 깍이지 않고 추켜세운다고 올라가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나이다. 기분만 날씨처럼 나빴다가 좋았다가 할 뿐이다.

 

생명의 특성이자 장점은 일관성이 아니라 변화이다.

일관성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억지스럽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자신의 과거 의견을 계속 가지고 있을 뿐 그 시점부터 정신 또한 멈취버린 사람에 불과하다.

결국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말>

 

존경할만한 인물이 없는 세상이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혹시 타인을 존경할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까.

존경하는 마음이란 세상과 사람을 고귀하게 보는 시선이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마음이며

계속 배우려고 하는 자세다.

"오늘 얼마나 감탄했는가?"

 

자신감은 소질이 아니라 그간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춰 도움을 청하는 것까지가 노력이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데 시도해 보지 않고 혼자 애쓴다면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과녁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면,

그 분야에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갖추는 데 다시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당신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게."

서리가 내렸다

 

연금 제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책이다.

 

국민연금은 만60세가 되기 전까지 납부하고 출생 연도별로 60~65세부터 수령할 수 있다..

1965~1968년 생은 64세, 1969년생 이후부터는 65셉주터 구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퇴직연금의 경우 2012년부터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가 가능해졌고,

2016년 7월부터는 구내에 상장된 해외 ETF에[도 투자가 가능해졌다.

 

퇴직 연금 중 DC형과  IRP, 그리고 개인연금 중 연금저축펀드를 본인이 직접 운용할 수 있다.

 

퇴직연금은 3종류가 있다.

확정급여형(DB형, Defined Benefit), 확정기여형(DC형, Defined Contribution)  개인 퇴적연금 IRP다.

퇴직연금의 특징을 살펴보면 DB형은 과거 퇴직금제도와 동잃하다.

평균임금 30일분에 근속연수를 곱해서 재원을 정한다.

반면 DC형의 경우 매년 임금 총액의 12분의 1, 즉 한달 평균 임금이 근로자 계좌에 입금되고,

이를 근로자 개인이 직접 운용하게 된다.

DB형은 운용 주체ㅐ가 회사이고, DC형과 IRP는 운용 주체가 개인이다.

 

IRP는 근로자가 퇴사하거나 이직할 때 받은 퇴직금을 본인 명의의 퇴직 계좌에 모아 두었다가 은퇴후

노후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A회사, V회사, C회사를 다니고 난 뒤 퇴직금을 받게 되면 IRP 계좌에 모두 모아주었다가

은퇴 후 퇴직연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핵심이다.

한편 IRP는 퇴직금과 별도로 연간 1,800만원 한도 내에서 추구 납부가 가능하다.

아울러 연금 저축과 합산하여 연간 900만원까지 세액공제 혜택이 있다.

정리하면 IRP 계좌는 퇴직금을 모아두는 장소와 더불어 개인연금의 개념으로 추가납입하는 용도,

이렇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퇴직금을 일시금(현금 수령)으로 수령할 때는 퇴직 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퇴직 연금 계좌로 이전해 연금으로 받게 되면 연금 소득세를 납부하게 된다.

연금 소득세는 연금 개시 후 연차에 따라서 퇴직속득세율의 60~70퍼센트만 부과된다.

 

연금 저축과 IRP에서 연간 1,200만원이상 연금을 수령하면 종합소득세를 납부하게된다.

 

세금은 매매에 따른ㅇ 매매차익과 배당금에 해당하는 분배금으로 나눌 수 있다.

국내 주식형 ETF는 비과세다.

기타 ETF는 배당소득세 15.4퍼센트를 원천징수한다.

해외 상장 ETF는 매매차익이 양도소득세에 해당한다.

분배금은 세 가지 유형 모두 공통적으로 배당소득세 15.4퍼센트를 원천징수한다.

 

세금 납부를 일정기간 연기해주는 제도, ETF(기타 ETF)를 운용해 수익(매매차익, 분배금)을 얻었다면

매도할 때 수익에 대한 세금 15.4퍼센트를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연금 계좌로 투자하면 일반계좌와 달리 매도시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연금을 받을 때 나이에 따라서 3.3~5.5퍼센트 연금소득세만 내면 된다.

일반 계좌의 15.4퍼센트보다 10퍼센트 포인트 이상 낮은 세율이다.

게다가 매도할때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원금의 크기가 커지며,. 운용할수록 이익도 커진다.

깨달음을 주는 글이 많이 있는 책이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 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아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더니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만약 강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게 되는 것이다. -도스토엡스키-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이제 내가 만든 이 이론에 왜 '로고테라피'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얘기하겠다.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설문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학생 16퍼센트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는 첫 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실존적 좌절: 실존의 의미

-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

- 존재의 의미

-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사람은 어느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히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근래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됐는데,

그것은 그간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스스로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몰르 정도가 됐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의 공허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서'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조건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다.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라.

그것이 세상을 가장 잘 사는 고령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이다.

 

심신이 건강하고 홀로 생황이 가능한 나이를 '건강 수명'이라고 한다.

건강 수명은 남성이 73세, 여성이 75세이다...

평균 수명은 남성은 82세, 여성이 88세이다...

가장 많이 사망하는 나이는 남성이 85세, 여성이 90세였다(2005년)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 드디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라는 생각도 한순간, 이번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잘팡한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몰라서 '삶의 보람'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고령자가 많다.

삶의 보람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필자는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보람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람있는 삶은 행복하지만, 지나치게 매달리게 되면 사라졌을 때 반동이 크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낸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흥미로운 일에 도전하자.

 

과거의 싫었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 기억을 잊고 싶어하지만,

잊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오히려 그 기억에 집중하여 점점 더 괴로워진다.

이럴 때는 너무 잊으려고 애쓰지 말고 다른 일에 시선을 돌리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즉,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으로 덧씌우는 것이다.

눈앞의 재미있는 일에 의식을 집중하다 보면 싫었던 기억은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 편한 고독을 즐기는 것이다.

 

인지장애는 '건망증'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에는 '방향감 장애'가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는 장소나 시간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 길을 잃거나 현재 시각을 파악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는데,

한밤중에 깨어나 아침이라 생각하고 외출하려는 행동이 그 하나의 예이다.

'방향 감각' 다음에는 '지능 저하'가 나타난다.

이미 가벼운 지능 저하는 있겠지만, 이 단계에서는 '눈에 띄는' 지능 저하 현상을 보인다.

사람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텔레비젼을 보아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생을 헤쳐온 '지혜'는 쇠퇴하지 않는다.

건망증은 생겼어도 인생 상담은 오히려 능숙해지거나 쉽게 욱하지 않아서

손주를 돌보는 일을 젊은 부모보다도 더 잘해내기도 하듯이,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능력도 따라온다.

 

'아마도'라는 표현을 서야 겠지만, '죽음'은 괴로움이나 고통보다는 그저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닐까 추측한다.

즉, 잠에서 깨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쓸쓸함이나 불안감은 당연히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자연현상이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80세가 넘은 고령자는 그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자기답게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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