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를 말한다면, 현상에 매여 사는 사람인가, 현상을 너머 사는 사람인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생명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육체라는 현상을 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 때문에 육체의 현상, 곧 육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현상은 단지 육체에 그치치 않고, 육체적인 현상으로 넓게는 행동, 생각 , 말 등이 된다.

 

우리이 육체가 살게 되는 것은 생명 때문이지만, 이 생명 때문에 살게 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살게 된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생명 때문에 우리는 살게 되는 것이기에, 따라서 생명을 알아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정작 이 생명을 알아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을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의욕의 모든 근본은, 필요와 결핍, 즉 고총인 것이다.

다라서 이미 인간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로 해서 고통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의욕이 너무나 쉬운 만족에 의하여 그것이 소멸되어서, 의욕의 대상이 제게되어 버리면, 그는 무서운 공허와 지루함에 빠진다.

즉 그의 본질과 그의 현존 자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된다.

이리하여 그의 생은 진자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실은 이것들이 그의 생의 궁극적인 요소이다.

 

이 세상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 덧없음이다.

그 뜻으로는 몇 세기라는 세월도 다만 일순이란 순간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따라서 덧없음, 그 자체의 연속성 따위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이 폐허에서 꽃핀다는 것은 삶의 연속성보다도 오히려 죽음의 연속성을 증명하고 있다. -카프카-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경험할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것을 우리의 사유의 선천적인 범주들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지각한다.

그러나 지각되지 않을 때의 한 사물은 어떤 모습일까?

물자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비감각적 지각 경험을 결코 할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은 감각된 대상들이다.

... 물자체의 개념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켜주지 않고 우리에게 인식의 한계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삼위일체란 성령인 아버지와, 여기에 태어난 성령인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으로 맺어진 관계, 이를 소위 삼위일체라고한다.

 

직관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고 직접적인 지각이며 그러한 것에 머물러 그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 종교 역시 그러하다.

종교는 우주의 존재와 행위에 관한 직접 경험 및 개개의 직관과 감정에 있어서 성립되고 있다.

이들 직접 경험 각각은 다른 것과 관련되거나 혹은 의존하는 일이 없이 그 자신으로 성립하는 활동이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천의 사람들이 동일한 종교적 직관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동일한 직관을 나란히,

혹은 전후하여 어떻게 보았는가를 확정하려 한다면 각자는 틀림없이 서로 다른 윤곽을 그릴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어떤 고도의 교묘한 문구로 번역해 놓는다고 해서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한 것은 매우 교묘하게 붙여댄 이름이고, <초월적인 실재>란 말은 더 얼토당토 않으며,

심지어 우리는 <만물의 근거며 종말>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 대신으로 듣고 있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있는 이름표처럼 가장하고 나와서 우리는 속이는 것이고, 이런 표현이 어던 실물을 시사하는 것처럼 사용되어 있으나,

실상 그런 표현은 우리를 당장 고대 사고의 문제속에 빠뜨리거나, 으미 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바보 천치가 되게 한다. -세계기독교 사상전집-

 

자연을 이해하는 데있어서 신이라는 가설은 이미 실용가치가 없어졌다.

도리어 더 참되고 더 좋은 해석을 방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지에 있어 신은 지배자라기보다는 꺼져가는 석양의 실루엣과 같다.

 

하늘이 없는데 첫째 날이 있고, 해도 달도 없는데 낮과 밤을 명명하고, 첫째 날과 둘째 날을 운운한다.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수긍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에덴 동산이라는 낙원에서 농부처럼 여러 나무를 심었다고,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백치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러한 것들을 누구나 마땅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너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 그치고, 마음은 부합함에 그친다.

기는 마음을 텅 비우고서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도는 오직 텅 빈곳에 모이니, 마음을 텅 비우는 것이 심재이다.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분별을 통한 인식이다. 그러나 분별인식은 제한적이기에, 인식의 대상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 번째는 실상의 직접적인 인식이다.

직접적인 실상을 찾아야 한다면, 역시 우리는 첫번째의 경우인 분별의 인식을 떨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인식을 떨어낸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 자체의 온전한 실상을, 마치 칸트의 물자체를 인식하기 위한 것처럼 의식(분별 인식)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분별을 통하여 생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번째 생명을 인식은 하되, 제한적(상대적)인 생명 인식이다. 이것이 분별을 통한 생명인식이다. 분별을 통한 인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무한한, 즉 절대적인 생명의 인식이다. 물론 이는 분별을 떠난 생명의 인식이다.

           역시 분별을 떠나지 않고는 무한한 절대적인 생명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욕망의 성격상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욕망하는 대상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다라서 뭔가 부족한 생각이 드는 나머지 계속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욕망의 특성인 것이다.

언제인가 욕망이 대상(분명한 목적)을 제대로 만나기 전에는 욕망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히치너가 헤밍웨이도 그의 아버지처럼 자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매우 걱정하자, 헤밍웨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다짐했던 이야기들을 집필하는 일도, 좋은 시절 자신에게 약속했던 일들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예순두 살의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나?"

헤밍웨이는 지하실로 내려가 총이 있는 창고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그는 수많은 총들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12구경 2연발식 보스 권총을 꺼내어 총알 2개를 장착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 메리가 자신을 즉시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현관으로 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총부리를 입안 깊숙이 넣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자....

비록 이렇게 헤밍웨이처럼 자살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허망함에 고통을 겪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성향은 양면적이기 마련이다.

무한대의 욕망으로 가던가, 욕망을 잃어버린 탓에 절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면에 놓인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를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모든 행동을 떠나 살아야 하는 것은 죽은 듯이 사는 것,

이것은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을 바라지 않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살기 위한 행동을 떠나 사는 것),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이 사는 것이다. 이는 곧 금욕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지극한 도의 정수는 깊고 아득하며 지극한 도의 극치는 컴컴하고 잠잠하다.

그래서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정신을 고요하게 하고 있으면, 육체가 바야흐로 스스로 바르게 될 것이다.

반드시 고요하게 하고 바드시 맑아 그대의 육체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 그대의 정신을 움직이지 않으면 곧 오래 살 수가 있다.

눈으로 보는 바가 없고 귀로 듣는 바가 없고 마음으로 아는 바가 없으면, 그대의 정신은 바야흐로 그대의 육체를 잘 지켜 오래 살 것이다.

그대의 내심을 삼가고 그대의 외물에 대한 욕망을 버리게. 지혜가 많으면 실패하리라 -장자-

 

그래서 과도한 기쁨이나 고통의 근저에는 언제나 과오나 망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심정의 두 극단의 긴장은 통찰에 의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과도한 기쁨은 생활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망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즉 끊임없이 새롭게 고뇌를 만드는 소망, 혹은 불안의 영속적인 충족이다.

이런 종류의 망사은 각기 후에는 망상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고,

그 망상이 없어진 후에는 망상의 출현에 의해 기쁨이 생긴 것과 똑같은 정도로 쓴 고통을 가지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망상은 뛰어내리는 것 밖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높은 곳에 비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런 높은 곳은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치를 알게 된 후, 이것이 마치 자기의 성과인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타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도교든 밀종이든 입만 열면 전문 용어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먼저 경전상의 지식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앞 사람들이 수련한 성과를 가져다 자신의 성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알고, 원인을 결과로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불교수행법 강의-

 

예술가는 욕망이 끊어졌기에 이에 따라서 절망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금욕 수행자는 욕망이 없는 이 지점에서 더 나은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과 그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껏 거쳐온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우리의 인식은 생명과는 무관한 무지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비록 생명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현상 세계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나머지 생명의 인식 역시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세 번째는 제한적인 입장을 벗아난 인식으로, 곧 견성의 입장이 되어, 원초적인 생명, 즉 무한 생명을 인식하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제한적인 인식을 벗어나는 것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따라서 제한적인 인식을 벗아난 상태란 단지 무한 생명을 인식할 수 있는 터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흐름을 따라서 흘러가면 사람을 낳고 만물을 낳으나, 그를 거슬러 올라오면 조사를 이루고 부처가 된다.

흐름을 다라서 흘러가는 것은 만물과 내가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스승이 아니면 어찌하여야 할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하루살이같이 보고, 큰 진리는 하늘과 땅도 물거품과 같이 본다.

오직 생명활동을 주재하는 으뜸 신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본성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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