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신비롭고 달아나기 쉬운 것이어서

늘 새로이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위험하고 우리를 열광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체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논증이다. 자유의 사상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갈리레이,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부르노, 스피노자, 로저 베이컨 등에서부터 근대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성의 신봉자들이 종교적 권위나 세속적인 권력의 본질인 무지.편견.폭력.아집.교만.교활. 포악. 위선.궤변. 협박.허위.광신.잔인등과 싸워온 기록은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이었다.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말하며 '자유로운 사상' 이란 어떤 사상인가를 이 두권의 책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나의 글은 논증으로 무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나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이 민족에 대한 일본 통치가 20년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해보는 일이 있다. 일제의 통치술이 비상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해방 전 어느 시기에 이 민족은 이미 사실상 거의 일본인이 다 됐던 것이 아닌가 싶다.

베트남 민족은1867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지만 식민군대와 100년 후에도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일 만큼 끈질겼다. 알제리 민족은 1830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120년이 지난 뒤에도 8년간의 독립전쟁을 벌일 나큼 민족의식이 강했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에, 인도는 1600년에 각기 식민지가 되어 가장 긴 식민 통치를 받았던 나라지만 300년 후에도 독립전쟁을 벌일 만큼 동화되지 않고 자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35년간은 이에 비하면 거의 잠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우리는 민족적 에네르기를 사실상 거의 상실했던 것이 아닐까. 과거의 원나라와 청나라의 헐술했던 지배에서 되살아난 것을 가지고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하기에는, 일제 말기의 실태는 너무도 일본화해 있었다는 것이 나의 숨김없는 심경이다.

 

얕은 재주나 술수는 우직한 성실만 못하다.

 

참지식인은 비판을 생명으로 한다. '비판'은 시와 비를 반으로 쪼개어 보여준다는 뜻이다. 지식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진리를 밝히고, 진리를 억압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식인이 가진 힘이란 이성적인 사고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용기뿐이라고 생각했다. 비판할줄 모르는 지식인은 육체적 고자와 같다.

 

세계의 정치개력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어요.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면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의 지나친 정밀화.세밀화에 집착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에요. 경험적으로 그렇쟎아요?

 

내게는 분명히 중요한 흔적을 남긴 분이 있다. 그것은 현대 중국 작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이다. 루쉰은 문학의 형태로 실천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행동화한, 흔치 않은 지식인 중의 한 분이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가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루쉰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 사화적 조건으로 말미암아서 고난 받은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의무감은 '인간에 데한 사랑'에서 싹 튼 것임은 물론이다. ....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루쉰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 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루쉰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 남한에는 너무도 원칙이 없고 북한에는 너무도 원칙이 강하다는 사실, 남북 각기 교조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민족의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간다'는 말처럼 통일문제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집요함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는 신앙으로서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라고 말한 까닭은 내 나이가 올해 예순다섯인데, 더 나이가 들게 되면 장담할 수는 없다는 뜻에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무종교로 살다가 죽음에 임박해서 '무슨 거사'니 '무슨 베드로'니 또는 '무슨 신도'로 둔갑할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어주고 불러준 그대로의 이름으로 생명의 위대한 어머니인 땅로 되돌아갈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예수와 부터의 사상과 행덕을 기리는 데는 남에게 빠지지 않으려는 사람이지만, 그 두분의 이름을 빌려서 행해지는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형식은 경멸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추악할 수 있을까? 세속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된 종교들!. 어쩌면 그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잔인무도한 행위를 본 뒤로는 차라리 신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 눈길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 내가 오늘 걷는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니

이를 두고 강준만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 말을 더 잘 실천에 옮긴 인물은 백범이라기보다는 리영희다. 백범은 죽기 전 일 년여 동안은 전 민족의 칭송을 받을 정도로 똑바른 걸음을 보였지만, 해방 직후 적어도 2년간 너무나 흐트러진 걸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시종일관 똑바로 걷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 리영희의 독특성이 두드러진다. '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매화는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창조와 실패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앎을 터득하게 되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의 매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창조하거나 실패를 다루는 데도 유용하다.

 

저자가 말하는 템플릿은 '본뜬 자'와 같은 것이다. 곧 이미 머릿속에 갖추어져 있는 본뜬 자와 새로 접하는 현상을 서로 비교하면서 일치하면 안다,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고 받아들이는 인식 방법 중의 하나다.

 

자신이 직면한 사실과 현상이 두뇌 템플릿과 일치하는 순간, 그 이해의 정도에 따라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소의 일치'와 '구조의 일치', 그리고 '새로운 템플릿 구축'이 그것이다.

 

보통 눈앞의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나 구조의 템플릿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지않으면 뇌는 요소나 구조의 일치로 이해하지 못한다.

생소한 사물을 처음 접할 때 이런 상황에 처하는데, 눈앞의 사물과 일치하는 두되 템플릿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른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후 자신이 모른다고 인정한 사물에 흥미를 갖거나 반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불만을 느낀 사람은 모르는 사물을 알려고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때 기존에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던 요소와 구조를 활용해 새로운 템플릿을 만드는데, 바로 이것이 세번째 유형인 '새로운 템플릿 구축'이다. 요컨대 자신이 직접 만든 새로운 템플릿을 통해 모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두뇌 템플릿을 만드는 과정도 수초화 현상과 매우 흡사하다.

어떤 사물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뇌에는 뇌신경의 수초화 현상으로 인해 사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회로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성실한 노력파일수록 더 그러하다. 이처럼 사고 정지 상태에서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그냥 외우자'고 강요하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도

점점 모르게 된다.

 

예전에는 정보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을 생략하고 중요한 뼈대만 뽑아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전했고, 또 그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고 옳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전달 방식을 오늘날의 학교 수업과 교과서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지식의 생략과 압축화에는 심각한 함정이 있다. 곁가지를 생략하고 간력하게 단순화시키는 만큼 처음 접하는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새 템플릿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논리 전개에 따라 A,B,C,D 순으로 차례대로 하나씩 생각하는 사고법을 '순차 사고'라고 한다면 A에서 D까지 한 번에 생각해내는 사고법을 '비약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직관으로 안다는 것은 비약 사고를 의미한다. 직관으로 꿰꿇는 사람은 A를 본 순간, 망설임 없이 D3까지 달려간다. 말 그대로 비약 비상한다. 게다가 지름길로 쏜살같이 달려가면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경험의 횟수가 많다는 사실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단순히 '한 적이 있다!' 혹은 '보았다!'는 정도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자신의 단순 경험을 떠벌리는 사람을 나는 시쳇말로 '짝퉁 베테랑'이라고 부른다.

 

직감을 사용해도 사고의 바로가기는 가능하지만 직감으로 도출한 대답에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이처럼 직감이란, 대상의 요소와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는 사고법인데, 바로 이 점이 직관과 직감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감과 직감은 비슷하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이라는 판단기준이 존재하는 직감에 비해, 감은 과거의 판단 기준이 없다.

이 점이 바로 직감과 감의 뚜렷한 차이점이다.

 

결국 좁은 세계에서만 통하는 진실을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만고의 진리로 믿는 것이

형식 논리의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두자.

 

형식 논리에서 비롯된 조잡한 논리 전개는 본인의 공부 부족이나 단순 실수뿐 아니라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형식 논리를 이용하는 등 다양한 장면에서 접할 수 있다.

 

또 '궤변의 논리'도 이와 유사하다.

(가)라는 조건에서 'A->B"가 성립하는 현상이 있을 때, 조건이 (가)에서 (나)로 바뀐다면 'A->C'는 성립하지만 'A->B'는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조건이 (나)로 엄연히 바뀌었는데도, 조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A->B'가 성립한다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덤벼든다. 달리 말한다면 궤변의 논리는 조건을 몰래 바꿔치기 해서 설득을 꾀하는 거짓 행위다.

 

직관 사고는 늘 의식하면서 훈련을 쌓아야 하는 사고법이자 마음가짐이다.

평소 자신의 행동이나 주위에 있는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숫자로 파악하는 정량화 훈련이 직관 사고의 도움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꾀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만이 뭔가 다른 것을 보았을 때 바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해당 문제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각 부분이 어떤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따져보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정리나 공식, 해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가공한 템플릿과 해당 문제를 서로 비교 대보하는 마지막 '짝짓기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혼자 힘으로 과제를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것이 기획할 때, 제품을 만들 때, 또는 뭔가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은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를 자문하는 일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간혹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자마자 대담무쌍한 개혁을 단행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 있다.

실은 이런 경영자는 말단 직원 때부터 과제 설정의 훈련을 통해 자신이 최고직에 오르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구체적인 구상을 가슴에 늘 품고 있던 사람이다.

 

평소 자신이 지금 맡고 있는 업무의 과제는 무엇인지, 스스로 의식하면서 과제를 설정하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제 설정을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동안 분명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구조가 조금씩 보이게 될 것이다. 구조를 파악하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대로 무엇을 모르는지 제대로 알게 된다. 진정한 이해와 참된 창조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자.

 

어떤 사실과 현상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를 파악하려면, 같은 내용을 남에게 설명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첩은 내 활동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창조란 하루하루의 활동에서 탄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상을 만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룰 때 무엇을 생각했는가?

모든 창조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활동 가운데 찬란하게 꽃핀다.

그러기에 창조의 씨앗인 오늘의 활동을 수첩에 정성스럽게 기록하는 것이다.

훗날 선명하게 재현할 수 있게 창조의 씨앗을 기억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존의 성공 방정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새로운 성공 방정식도 보이지 않는, 암중모색의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이 난문의 답을 찾는데 앎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기로 했다.

이는 성공 해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안부하는 삶에서 탈피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삶, 곧 창조이다.

이때 창조의 뿌리가 바로 앎이다. 마찬가지로 실패의 뿌리에도 앎이 똬리를 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사고와 실패가 여러 분야에서 횡행하고 있다.

 

만약 "나는 학창 시절, 내 머리로 생각해나가는 소중함을 배웠다"고 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은사를 만난 행운아가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가 매우 복잡한 세계이기 때문에 진정한 앎이 필요하다.

앎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해법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민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아는 것이 그냥 힘이라면

제대로 아는 것은 창조로 이어주는 힘이다."

 

 

 

 

 

품질을 버리고 비용이나 시간을 줄이려는 시도는 대부분 비용을 높이고 일정을 늘리기만 한다.

 

반면 결함의 수를 적게 만드는데 주력한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일정관리를 할 수 있었고, 가장높은 생산성도 얻을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는 고치기 쉽다는 믿음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 오히려 해악이 돼버렸다.

 

과학자는 배우기 위해 개발하지만, 엔지니어는 개발하기 위해 배운다 -프레드 브룩스-

 

과학자는 무엇이 진실인지, 만들어 놓은 가설을 어떻게 테스트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지식을 더 확장할 수 있는지 배운다.

엔지니어는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것이 쓸모가 있는지, 받아들인 지식을 사용하여 실무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해 배운다.

 

SWEBOK은 전문 소프트엔지니어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능력을 구성하는 지식 영역들을 식별하였다.

.소프트웨어 요구 사항

.소프트웨어 설계

.소프트웨어 구축

.소프트웨어 테스팅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소프트웨어 형상관리

.소프트웨어 품질

.소프트웨어 공학관리

.소프트웨어 공학 툴과 방법론

.소프트웨어 공학 프로세스

 

반대하거나 논쟁하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내용을 그대로 믿거나 화술의 밑천으로 삼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다만 생각하고 생활하기 위해 읽어라   -프란시스 베이컨-

 

"미국의 학자" 강연에서 에머슨은 단순 사상가와 생각하는 인간의 차이점을 끌어냈다.

단순 사상가는 유일하게 하는 일이 생각하는 것인 사람을 의미한다.

단순 사상가가 책이나, 기사같은 것을 통해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데 비해,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직업을 가지면서

현실에서 역동적이고 가끔은 자기 반성을 통해 멈춰서기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생각하는 인간은 실천을 중시한다. "참된 학자는 행동의 기회를 놓치는 것을 힘의 손실인 것처럼 아까워 한다.

행동은 지성이 그 찬란한 결과를 생산하도록 도와주는 연료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에머슨은 생각하는 인간의

직접 경험이 천재성을 이루는 결정적인 요소고, 이 천재성은 단순 사상가가 아닌, 생각하는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생각은 행동없이 절대 진리로 승화하지 않는다.

독자는 누구의 말에 삶의 무게가 실려 있는지, 혹은 공허한 빈말인지를 즉각 알아차린다.

"나는 어떤 연사든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궁핍이나 유창함으로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즉시 알아차린다.

삶은 우리가 석재 공사를 위하여 타일이나 기단을 캐내는 채석장처럼 우리의 배후에 깔려 있다.

학교나 책은 들판이나 일터가 만들어낸 언어를 복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에머슨의 말에서 행동하는 삶의 중요성을 이끌어 낼수 있다.

 

골드러시 기간중에 성공을 거둔 기업들이 그 이후에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고 기술이 성숙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접근법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설득하는 수단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가려내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생각을 왜 하는가를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밀은 이런 반박에서 공리주의를 구하려 한다.

그는 벤담과 달리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질을 평가해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공리만으로 그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땀 한방울 흘리지 않는 사회의 이름을 걸고, 역사상 가장 막강한 병력이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자원군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책임을 면제해 준다.

이를 좋은 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 같이 나눠야할 희생을 면제해주면 정치적 책임의식이 약화되는 대가를 치른다.

 

군 복무에는 어떤식으로든 눈꼽만큼도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이 같은 국민인 소외계층사람들을

고용해 가장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 피 한 방울 흘리지않은 채 눈하나 꿈쩍않고 자기일을 계속한다.

 

칸트는 우리가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러는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는 이성적 능력이 우리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도 있다. 그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말한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벤담도 옳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벤담은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는 옳은 얘기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의 통치권자"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칸트는 이성이야말로, 적어도 때로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칸트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라고 칸트는 말한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법 그자체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인간은 목적이라는 공식이다.

 

매킨타이어는 젊은 독일인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 사람은 " 자기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믿는다.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이다.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따라온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연대의식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합의라는 윤리로도 포착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연대에는 도덕적 힘이 필요하다.

연대는 우리에게 부담을 안겨준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존재, 소속된 존재로 파악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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