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책을 읽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이 책의 요약 부분을 음악과 곁들여 읽노라면 모든 감성이 살아나는 듯하다.
글만으로도 만족했던 책인데, 거기에 맞는 음악까지 곁들여지니 감정은 더욱 풍부해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극마저도 추억으로 이겨내고 어엿한 청년이 어른이 되어 잘 살아갔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아픔을 벗어나 남은 인생이 부드러워졌기를.(2017년에 적어보다)
언제였던가. 엄마와 영주가 학교로 찾아 왔던 그날, 선생님은 예쁜 글씨를 쓰셨고 지저귀는 어린 새 같은 영주는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그 글씨들을 읽었다.
어린이들은 신나게 박수를 쳤고 엄마는 교실 문 앞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누르며 겸손한 웃음을 띠고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던 행복한 날이였다.
그러나 그때는 훗날 박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은혜만 베풀고 자취 없이 떠나가실 줄도 몰랐고, 엄마가 광인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깊고 소중한 찰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신명나게 손바닥이 부풀도록 박수만 치고 있었다.
지금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이 한 몸을 던질 것이라 약속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나는 몸을 던져 그들을 지켜야 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나씩 하나씩 그들을 잃어갔다.
이제 마지막 남은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대로 엄마마저 보낸 수는 없다고 두 주먹을 움켜쥐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선생님 이름을 불렀다.
"동구야, 너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시골 생활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엄마를 보지 못하는 것, 박 선생님이 찾아올 수 없는 것, 영주의 자취가 없다는 것. 그 세가지가 시골 생활의 어려움이다.
그 생각을 하니까 목이 메어왔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준비한대로 대답했다.
"이 집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나요."
아버지는 나의 대답에 깊이 공감했다. 이 집에 사는 한, 우리 중 누구도 영주에 대한 환청과 환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차가왔다. 이제 코끝에도, 차가운 바위에 오래 얹혀 있던 엉덩이에도 감각이 없다.
새들도 모이를 다 찾아 먹고 자취 없이 제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곤줄박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늙은 향나무 둥치에서 씨이씨이 삐이삥 하는 만족한 지절거림만 들려왔다.
할머니가 목욕을 마치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걸릴테니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엄마, 엄마가 언제 쯤 돌아올까?
엄마를 생각하자 기운이 솟았다. 노루너미로 이사가기 전까지 몇 달 정도는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을테지.
엄마가 돌아왔을때 기진한 몸으로 청소에 다시 매달리지 않도록, 오늘은 장독대에 튄 흙탕물이나 깨끗이 닦아놓아야겠다.
나는 창문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사장님의 부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나섰다.
대문이 닫히면서, 아름다운 정원의 정경이 차츰 좁아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광채의 선이 되었다가, 갑자기 시야에는 녹슨 철문의 모습만 들어왔다.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차가운 철문을 힘주어 당기며 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아름다운 정원. 안녕, 황금빛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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