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를 둘러싼 환경은 일반적인 부서와 다르다.

첫째, 프로젝트는 반복적이지 않다. 따라서 문제와 해결책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둘째, 잘 규정되고 정규적인 부서의 업무와 달리 프로젝트는 대체로 부서와 계층을 막론하고 진행된다.

셋째, 프로젝트는 몇 달동안에 걸쳐 계획되고 조직된다.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요소

목표 : 기대하는 사항이 무엇인가?

직무 : 대규모 프로젝트를 어떻게 세부적인 진행단계로 분리할 수 있는가?

일정 : 최종 기한이 언제인가?

예산 : 프로젝트에 필요한 비용이 얼마나 되는가?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요소

팀 : 자체 부서직원만으로 프로젝트 팀을 운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정 : 프로젝트는 그 특성상 지속적이고 확고한 경영관리가 필요하다

감독 :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감지하고 바로 잡아야 일정과 예산을 준수할 수 있다.

행동 : 일정이나 예산부문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이를 즉시 바로 잡아야 한다.

완료 : 프로젝트를 잘 관리하고 일정을 99%지키며 진행하더라도 마지막 단계를 잘 수행하지 않으면 기한을 맞출 수 없다.

 

유능한 PM의 조건

1.조직및 리더쉽 경험

  프로젝트 비용과 지출을 관리하는 능력

  일정을 진행하고 감독하는 능력

  팀을 잘 이끄는 능력

  최고 경영진은 물론 외부 인사와도 원할하게 소통하는 능력

  프로젝트 작업이나 사람들과 관련해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는 능력

2.필요한 인적자원을 연결하는 능력

3.다양한 인적자원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

4.커뮤니케이션 및 업무진행 능력

5.작업을 위임하고 감독하는 능력

  업무를 맡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위임한다

  위임을 받은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적절히 감독한다

  업무를 정해진 예산과 기한 내에서 완료한다.

6.신뢰성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필요한 7가지 질문

1.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무엇인가?

2.어떤 결과물을 원하는가?

3.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인가?

4.PM의 책임이 무엇인가?

5.PM의 권한이 무엇인가?

6.예산이 얼마나 되는가?

7.기한이 언제인가?

 

프로젝트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시작하려면 접근법을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팀을 이끌고, 업무 절차와 목표를 규정하며, 팀을 조직하는가에 따라 프로젝트 진행과정이 달라진다.

이 준비단계에서는 프로젝트 팀에 대한 PM의 목표와 운영방식을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다.

따라서 프로젝트 발표회의가 필수적이다.

 

책임 범위 명확하게 규정하기

개인의 자아를 충족하려는 열망과 팀의 우선순위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팀원에게 단순히 프로젝트의 직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를 책임단위로 나눠주는 것이다.

PM은 직무 범위를 정하는 동시에 핵심 팀의 구성원들이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목표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접근법의 장점은 팀원들이 자신들의 책임범위를 스스로 관리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PM의 역할은 최종 승인과 전 팀이 올바르게 운영되도록 지휘하는 것에 한정된다.

팀원들이 자신이 맡은단계를 실행하는 동안에 PM은 감독 역할은 물론 목표가 달성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이들의 상태를 계속 파악해야 한다. 또 PM은 품질.관리 감독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팀원에게 책임 범위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이러한 접근법은 각 구성원이 업무를 마무리하는 능력 면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해준다

더 밀접한 감독을 원하는 팀원에게는 그렇게 해주면 된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감시.감독보다는 가능한 한 최고 수준의 격려를 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 이 접근법은 PM이 팀을 믿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최대한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할수록 직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많다.

 

일정관리에서 발생하는 문제

1.모든 지연은 프로젝트의 나머지 일정에 영향을 준다.

2.기한을 지키려면 이미 발생한 지연을 다른 단계에서 흡수해야 한다.

3.항상 최종기한을 지키는 것이 이상적이다.

4.일정을 따르고 기한을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PM의 몫이다.

5.일정이 지연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면 최종 기한을 융통성 있게 조정해야 한다.

 

자동화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시스템

1.먼저 프로젝트 관리의 문제부터 해결한다

2.자동화 시스템에 도입할 반복업무를 파악한다

3.자동화 도입의 목적은 업무처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4.프로젝트의 목적과 자동화의 목적을 혼동하면 안된다

5.소프트웨어의 문제로 프로젝트의 절차를 변경하면 안된다.

6.프로젝트를 수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개발한다.

 

작업 흐름도 규칙 설정

1.항상 선행기법을 사용해야한다

2.활동과 성과의 경로가 타당해애 한다

3.선행활동 또는 성과완료 후 다음 활동이 발생해야 한다

4.동시 진행되는 성과를 신중하게 구상 설명하며 관리한다

5.연계가 약한 지점을 확실히 통제한다

6.결정단계를 작업흐름도에 기입할 때는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한다

 

수평 네트워크 도표

프로젝트를 수평으로 정밀하게 표현할 때는 수직 작업 흐름도에 나온 활동단계를 활용하고 여기에 정보를 추가하면 된다.

일정관리 체계를 활요하고 여기에 정보를 추가하면 된다. 일정관리 체계를 몸통으로 본다면 수직 작업흐름도는 활동 순서의 골격일 뿐이다.

이 골격에 살을 봍여서 완성하려면 다음 사항을 파악하고 추적해야 한다

.각 단계 기한

.각 단계의 필요 사항과 제약

.각 단계를 실행할 팀원 또는 하부팀

.연계가 약한 지점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이동해 성과로 이어지는 작업 흐름

.프로젝트를 통해 나올 성과의 정의

 

네트워크 도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팀원간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2.정확한 순서를 정할 수 있게 해준다

3.연계가 약한 지점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4.책임 범위를 분리해 준다.

5.동시에 발생하는 활동의 흐름을 보여준다.

6.프로젝트 활동과 시간관리를 연계해준다

7.각 단계의 성과 즉 보고서와 양식, 기타 문서를 포함한다

8.핵심 팀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준다

9.일정 편차를 감지하고 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

10.대안을 파악하게 해준다

 

PM은 진행과정을 2가지 차원으로 보고해야 한다. 첫째 PM은 팀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이는 팀원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개인의 의욕을 고양시키며, 팀에 참여하려는 PM의 열의를 보여주는 기회이다.

또 새로 발생하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며, 충돌이 일어난 일정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둘째, PM은 상부에 보고한다. 여기서 상부란 프로젝트를 지시한 경영진이다.

 

경영진에 보고하기

경영진에 하는 보고는 팀 회의에서 하는 보고에 비해 더 형식적이되 덜 상세하다.

이때 PM은 상세한 실행내용과 문제가 아니라 전체상을 폭 넓게 제시해야 한다. 전체 일정 및 예상에 대한 우려 및 여기에 연루된 문제를 경과 보고에 포함한다 복서의 주제를 4개 부분으로 폭넓게 제한한다.

.프로젝트 일정 및 기한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일정 및 예산 현황을 기술한다

.모든 편차와 그 원인 또는 일정 지연을 설명한다

.향후 예상을 요약한다.

 

일정 지연을 보고할 때 고려할 사항

1.기한을 일부러 이르게 설정했을 수 있다

2.경영진이 기한을 못 맞추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3.프로젝트를 시간에 맞춰 완료해야 경영진이 이를 참고해 다른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

4.PM의 역할 중 하나는 경영진에 최신 정보를 제동하는 것이다.

5.일정지연이 용납되는 이유가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가 아니라 프로젝트 외에 다른 원인일 수 있다.

6. 기한 연장을 요청할 수 있다.

7. 지름길을 찾아서 일정의 지연을 극복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예산과 일정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예산과 일정이다. 이 둘은 PM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핵심 팀원, 다른 부서, 외부 관계자, 경영진에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이다 예산과 일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 소통에 사용된다.

 

PM이 부딪치는 10가지 문제

1.팀이 잘 협동하지 않는다

2. 다른부서장이 부서직원의 동원을 거부한다

3.부서에서 효과적인 관리 기술이 프로젝트에는 효과가 없다.

4.프로젝트의 목표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했다.

5.프로젝트 실행 중에 경영진이 프로젝트의 범위를 변경한다

6.경영진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비능률적이다

7.일정을 관리하기 힘들다

8.기한을 지키지 못하여, 프로젝트를 늦게 완료한다

9.지출이 초과돼 프로젝트 예산이 부족하다

10.검토나 통제를 할 시간이 없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이 구조적 부조리에서 제일 먼저 당하게 되는 사회적 사건을 기아라고 할 수 있다.

 

지글러의 표현대로 "어린이 무덤"은 약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구조적 폭력을 상징한다.

 

숙명적인 기아가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아가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는거야.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이 개념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어.

맬서스는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아픈 일이기는 해도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단다.

지구상의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얘기였지.

 

'구조적 기아'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란다.

 

카림, 너 혹시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선진국에서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거나 해서 영양 과잉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거꾸로 다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있어.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시카코 거래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차드, 에티오피아, 아이티 같은 가난한 나라의 정부가 높은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따위는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매주 수백만 달러를더 벌어들이는 것이지.

배고픈 자들의 고통? 맙소사. 그들을 위해서는 유엔이 있고 국제적십자가 있잖아 하는 식이란다.

 

부유한 나라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법률이나 그 밖의 조치를 통해 농산물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있단다.

생산자들에게 최저 가격을 보장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지.

우리 주변의 예를 들어보자!. 게이노시 일가는 유능한 목축업자들이야. 그들이 사육하는 뿔이  매끈하고 등이 곧은 그뤼에르 종 얼룩소는 제네바 일대에서 단연 으뜸이지. 하지만 게이노씨는 이를 악물고 착유량을 제한해야 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야.

국가는 그에게 일정한 할당량을 정해주고는 그것을 초과해서 우유를 짜게 되면 벌금을 물게 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목축업자들이 다 마찬가지란다.

 

사람들이 기아의 실태를 아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거야.

그래서 그 지식위에 침묵의 외투를 걸친다는 거지.

오늘날 학교와 정부와 대다수 시민들도 이런 수치심을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 식민지 권력자들은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유럽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즉 유럽 시장에서 소비될 수 있는작물을 경작하도록 했어.

그리하여 식민지 차드에서는 종주국 프랑스의 직물공장에서 쓸 면화를 재배해야 했지.

그리고 가나의 삼림지대인 아산티에서는 영국의 초콜릿 공장을 위해 카카오 농사를 지어야 했고, 탄자니아는 사이잘삼을, 부룬디와 르완다에서는 차 농사를 지어야 했어........ 유엔 총회나 그 밖의 국제기구에서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어.

 

글쎄 말이야. 비옥한 땅을 자국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작물에만 돌리고 있으니......

더구나 수출 가격을 결정하는 세계시장에 대해서 세네갈은 자신은 아무런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아.

그래서 전통적으로 매우 근면한 농민들과 비옥한 땅을 가진 나라에서 식량부족 사태가 확산되고 있는거야. 

 

토지 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빈민가의 인프라 정비도, 농업지원도,

우물파기 프로젝트도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버릴 응급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증시는 완전히 비이성적으로 돌아간다.

증시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은 이윤 극대화, 손실에 대한 공포, 파산 리스크에 따르는 신경전,

그리고 정신 착란과 황홀경을 되풀이하는 무제한의 이윤추구 등이다.

 

1919년에 막스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헐뜯고, 민족주체성을 헐뜯고, 선거를 통해 확정된 제도,

그리고 영토적인 경계짓기와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적 규범을 헐뜯으면서 계몽주의의 유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 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1.우선적인 과제는 구호조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2.혁명적인 행동은 인도적인 구호를 뛰어 넘는다.

3.세계 나라들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해서 시급한 자원이 필요하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을 꺽어버릴수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농주의자들은 두 가지 사실을 역설했다.

첫째, 부란 중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금은(화폐)의 획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 농업만이 부를 창출해 낼 뿐 상공업을 비롯한 산업은 가치 생산을 해낼 수 없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않은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

 

역사라는 기차가 굽이길을 돌 때마다 지식인들은 차 밖으로 튕겨 나간다고 마르크스는 말한 적이 있다.

맬더스는 인구변천의 제3단계와 제4단계를 예측하지 못했다.

실제 수치들이 맬더스의 그래프를 비껴 갔을 때, 맬더스는 이미 기차 밖으로 튕겨졌다.

 

"정치 경제학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성급한 단순화와 일반화에 있다.

포괄적인 경험들을 통한 충분한 여과 과정을 거친 이론만이 타당성과 유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맬더스는 농업혁신의 영향을 간과했고, 인구증가의 원인에 대해 피상적 분석을 했다.

 

프라이데이는 오두막을 지을 경우, 포기해야 할 물고기의 수가 로빈슨보다 적고, 로빈슨은 물고기를 잡을 경우 포기해야 하는 오두막 수가 프라이데이보다 적다. 이때 포기하는 물고기와 오두막의 수효를 "기회비용"이라 한다. 두 사람은 제각기 기회 비용이 적은 분야를 생산해야 하는데, 그 분야를 "비교우위"를 지닌 분야라고 한다. 즉 프라이데이는 오두막짓기에, 로빈슨은 고기잡이에 각각 비교우위를 지녔다.

 

리카도는 당시의 경제관례를 쇄신하고 '지대'의 정의를 개량했다. 여기서 우선 지대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통상 경제학에서 일컫는 지대란 리카도가 정의한 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대, 즉 단순한 '임대료'와는 구분된다. "경제학적 지대"란 토지, 노동, 자본등을 임대자가 현재의 용도대로 쓰기 위해 소유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최저액수의 초과액을 말한다. 즉 '안줘도 되는데 지불하게 되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세이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한 상품의 가격이란 그 상품을 생산해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지주들에게 돌아갈 몫들의 합산이다.

따라서 상품의 생산에 드는 모든 비용은 곧 누군가 벌어들일 수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지주들은 상품의 생산공급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므로 일터로 돌아와서는 그날 번 돈을 물품 구입에 지출하게 된다. 즉 세이의 법칙은 한마디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제3권을 덮었을 때...나는 이미 다른 인간이 되어 있었다. 벤담이 이해하고 적용시킨 '공리 원칙'은 내가 그 동안 지녀 왔던 단편적인 지식들과 신념들을 한데 연결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모든 이치가 드디어 맞아 떨어지고 내 사상은 비로소 일관성을 띠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의견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그냥 믿음이라 해도 좋고 신조라 해도 좋으며 철학이라 해도 좋다.

이는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의 종교, 즉 인생의 근원적인 목적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감화와 그 감화의 확산인 것이다.

내 머릿속은 지금 그 종교를 통해 인류의 지평을 비꿔 놓을 착상으로 충만하다.  - 존 스튜어트 -

 

헤겔은 철학의 목적이 아이디어들의 전개를 통한 지식의 습득에 있다고 보았다.

역사는 인간의 정신활동의 소산이다.

물질 세계, 즉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사회 제도등은 정신세계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갈 뿐이다.

 

포이어바흐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 의하면 신이란 단지 인간의 욕망, 필요, 속성등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신이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변증법은 흔히 "모든 명제나 관념은 필연적으로 그 반대명제와 부딪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반대 명제란 논리적으로 합당하면서 동시에 원래 명제에는 모순되는 명제를 말한다.

이 관념들간의 모순은 제3의 명제인 합성 명제의 탄생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로 화합한다.

그 합성명제는 다시 그것의 반대 명제와 부딪쳐 새로운 합성명제가 생겨난다. 다만 말 많은 역사가들이 같은 소리를 지루하게 되풀이할 뿐.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서문에는 다음의 명언이 실려 있다.

"물질적 생활 능력은 사회적, 정치적, 지적 생활 형태를 좌우한다.

의식이 생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셜의 한계이론은 경제학에 적용시킨 진화론이라 할 수 있다.

기업가도 소비자도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이 차근차근 상황을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개인도 기업도 정부도 물가변화에 적응한다. 세상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적응에 실패하면 도태된다.

경쟁의 압력이 심하면 과감히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러한 마셜 이론의 최종결과는 애덤 스미스의 뉴턴식 분석법 결과와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셜은 그 과정에 있어 경제배역을 맡은 개개인의 결정들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한계이론은 미시경제학 발전의 터전을 개척했다고 할 있다. 이윤이 비용을 초과할 경우 개개인은 자신의 위치를 검토해 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마셜은 개개의 기업들이 어떻게 환경변화에 대처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이 미시경제학의 핵심이다.

 

베블런의 이론은 오늘날 사회적 성공의 황금률을 제시하는 한 방제회사 광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이 땀 흘리는 모습을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지 마십시요."

땀 흘리는 자는 평범함과 나약함을 노출시킨다. 힘 안들이고 성취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실력자다.

여유있고 우아한 성공이야말로 삶의 목표다. 수플레 요리사가 문을 세게 닫는 소리에 놀라듯 귀족들은 땀만 봐도 부르르 떤다.

 

인간은 '필요'와 '욕구"를 구분해야 한다.

당신은 알프스 우유를 욕구하는 것이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냥 우유일 뿐이다.

욕구는 필요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필요는 당신의 내부에서 생겨나지만 욕구는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다.

 

 

 

 

 

 

 

 

 

저 가을 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보이게 될 뿐이다."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 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가 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 거대한 현시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스코트는 자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곤 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나무의 꼭대기가 언제나 꼭대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지들이 점점 더 높이 자란다.

전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꽃이 핀다. 나는 크리슈나와 즐거운 여러 해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자.

내가 주고받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주고받도록 하자.

 

예술의 재능 또한 그 사람의 생활 방식, 규범, 성격에 정직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해블록 엘리스는 이렇게 썼다.

"진정한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온 삶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름다움에 맞추는 사람이다."

 

생텍쥐베리는 이렇게 썼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 보는 데에 있다."

 

해 뜨면 일하러 가고

해 지면 쉴 곳을 찾네.

목을 축이는 우물을 파고

먹을 걸 주는 땅을 일구며

거준 것을 나누네.

왕도 부럽지 않네   -중국 기원전 2500년 -

 

에머슨은 1870년 이렇게 썼다.

"우물을 파고, 돌로 된 분수를 세우며 길 옆에 나무들을 심어 작은 숲을 이루게 하고, 과일 나무를 심으며, 튼튼한 집을 짓고,

늪지를 메꾸거나 길가에 돌의자를 만들어 땅을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곳으로 만드는 사람은 비록 그 일로 자신은 이익을 얻지 못해도

그 뒤 오랫동안 자기 나라에 쓸모있는 자산을 이룬 것이다."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허바드가 1908년 쓴 <<건강과 부>>에서 보인 의견과 아주 일치한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있는 것을 얻게 해주고,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더 보태거나 더 낫게 할 수 없는 세가지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일하는 습관, 건강을 관리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이다. 당신이 만약 남자이고 이러한 습관을 가진 데다 같은 습관을 가진 여자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천국에 있는 것이며, 여자 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 지는 언덕'이라 부르는 곳에 봉우리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종종 거기에 올라가 혼자 또는 코스트와 같이 명상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존재의 진실한 모습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곳을 떠나게 되어 슬펐다.

 

<<헨리 애덤스의 교육>>에서 '스승의 가르침이 미치는 효과는 영원하다. 그 영향이 어디서 멈추는지는 말할 수 없다'는 말을 인용했다.

 

순회목사 존 웨슬리가 1750년에 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찾아내어 보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때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사람들이 농장일을 생활 양식으로 생각할 때 물질 자원뿐만 아니라 내적인 자원도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

존 버로우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는 사람은 삶의 토대가 될만한 사상과 경험의 밑천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빈곤하여 메말라버릴 것이다."고 말했다. 땅을 살 만한 돈을 은행에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신'이라는 말을 쓰는가? 우리는 그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왜 '전체로서의 존재' 또는 '위대한 전체'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다음의 정의가 최선인 듯 싶다.

'신의 본질은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허친슨이 1925년에 쓴 소설 <<커가는 목표>>에서 묘사한 주인공처럼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프로이드는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뒤의 당연한 결과로서 나는 지쳐 있다네.

나는 이제 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결되어 있던 유기적 요소들이 이제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네.

대체 누가 그 요소들을 강제로 계속 붙어 있게 하고 싶어하겠나?"

 

스코트는 즐거운 회상에 젖은듯이 예이츠의 시구를 인용했다.

"노인이란 지팡이를 짚고 누더기 옷을 걸친 볼품없는 것..... 죽어가는 짐승에 붙들어 매인 .... 그리고 이 불합리-오!, 가슴이 찢어지네-

이 우스꽝스러움, 개꼬리같이 내게 매달려 있는 이 나이먹음을 어쩌면 좋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먹음>>에서 "노인에게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휘트먼은 꽤 이른 나이인 70세에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배는 긴 항해를 할만한 형편은 못 되지만, 깃발은 여전히 돛대에 달려 있고 나는 아직 키를 잡고 있다."

 

이제 말을 걸 사람이 많이 남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이가 여기에 있지 않을 날이 머지 않았다

 

"사람을  삶에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끈이 약해짐에 따라 삶의 단계도 희미해져 간다.

사회적 측면도 점점 흐릿해진다.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삶과 매어주는 힘도 줄어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에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망명일기>>에서

"노년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예상치 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고 썼듯이, 그 전 해 봄 나는 나이든 사람들 무리와

북네덜란드 지방을 힘들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있었다.

 

죽음없는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육체적 삶? 죽음과 소멸은 모두 하나로 만든다. 관계들은 뒤얽힌다.

저마다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영속하는 것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할아버자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섞이는 것이다.

 

죽음은 몇 십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