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주의자들은 두 가지 사실을 역설했다.

첫째, 부란 중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금은(화폐)의 획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 농업만이 부를 창출해 낼 뿐 상공업을 비롯한 산업은 가치 생산을 해낼 수 없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않은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결실도 얻게 된다".

 

역사라는 기차가 굽이길을 돌 때마다 지식인들은 차 밖으로 튕겨 나간다고 마르크스는 말한 적이 있다.

맬더스는 인구변천의 제3단계와 제4단계를 예측하지 못했다.

실제 수치들이 맬더스의 그래프를 비껴 갔을 때, 맬더스는 이미 기차 밖으로 튕겨졌다.

 

"정치 경제학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성급한 단순화와 일반화에 있다.

포괄적인 경험들을 통한 충분한 여과 과정을 거친 이론만이 타당성과 유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맬더스는 농업혁신의 영향을 간과했고, 인구증가의 원인에 대해 피상적 분석을 했다.

 

프라이데이는 오두막을 지을 경우, 포기해야 할 물고기의 수가 로빈슨보다 적고, 로빈슨은 물고기를 잡을 경우 포기해야 하는 오두막 수가 프라이데이보다 적다. 이때 포기하는 물고기와 오두막의 수효를 "기회비용"이라 한다. 두 사람은 제각기 기회 비용이 적은 분야를 생산해야 하는데, 그 분야를 "비교우위"를 지닌 분야라고 한다. 즉 프라이데이는 오두막짓기에, 로빈슨은 고기잡이에 각각 비교우위를 지녔다.

 

리카도는 당시의 경제관례를 쇄신하고 '지대'의 정의를 개량했다. 여기서 우선 지대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통상 경제학에서 일컫는 지대란 리카도가 정의한 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지대, 즉 단순한 '임대료'와는 구분된다. "경제학적 지대"란 토지, 노동, 자본등을 임대자가 현재의 용도대로 쓰기 위해 소유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최저액수의 초과액을 말한다. 즉 '안줘도 되는데 지불하게 되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세이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한 상품의 가격이란 그 상품을 생산해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지주들에게 돌아갈 몫들의 합산이다.

따라서 상품의 생산에 드는 모든 비용은 곧 누군가 벌어들일 수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지주들은 상품의 생산공급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므로 일터로 돌아와서는 그날 번 돈을 물품 구입에 지출하게 된다. 즉 세이의 법칙은 한마디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제3권을 덮었을 때...나는 이미 다른 인간이 되어 있었다. 벤담이 이해하고 적용시킨 '공리 원칙'은 내가 그 동안 지녀 왔던 단편적인 지식들과 신념들을 한데 연결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모든 이치가 드디어 맞아 떨어지고 내 사상은 비로소 일관성을 띠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의견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그냥 믿음이라 해도 좋고 신조라 해도 좋으며 철학이라 해도 좋다.

이는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의 종교, 즉 인생의 근원적인 목적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감화와 그 감화의 확산인 것이다.

내 머릿속은 지금 그 종교를 통해 인류의 지평을 비꿔 놓을 착상으로 충만하다.  - 존 스튜어트 -

 

헤겔은 철학의 목적이 아이디어들의 전개를 통한 지식의 습득에 있다고 보았다.

역사는 인간의 정신활동의 소산이다.

물질 세계, 즉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사회 제도등은 정신세계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갈 뿐이다.

 

포이어바흐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 의하면 신이란 단지 인간의 욕망, 필요, 속성등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신이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변증법은 흔히 "모든 명제나 관념은 필연적으로 그 반대명제와 부딪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반대 명제란 논리적으로 합당하면서 동시에 원래 명제에는 모순되는 명제를 말한다.

이 관념들간의 모순은 제3의 명제인 합성 명제의 탄생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로 화합한다.

그 합성명제는 다시 그것의 반대 명제와 부딪쳐 새로운 합성명제가 생겨난다. 다만 말 많은 역사가들이 같은 소리를 지루하게 되풀이할 뿐.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서문에는 다음의 명언이 실려 있다.

"물질적 생활 능력은 사회적, 정치적, 지적 생활 형태를 좌우한다.

의식이 생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셜의 한계이론은 경제학에 적용시킨 진화론이라 할 수 있다.

기업가도 소비자도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이 차근차근 상황을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개인도 기업도 정부도 물가변화에 적응한다. 세상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적응에 실패하면 도태된다.

경쟁의 압력이 심하면 과감히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러한 마셜 이론의 최종결과는 애덤 스미스의 뉴턴식 분석법 결과와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셜은 그 과정에 있어 경제배역을 맡은 개개인의 결정들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한계이론은 미시경제학 발전의 터전을 개척했다고 할 있다. 이윤이 비용을 초과할 경우 개개인은 자신의 위치를 검토해 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마셜은 개개의 기업들이 어떻게 환경변화에 대처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이 미시경제학의 핵심이다.

 

베블런의 이론은 오늘날 사회적 성공의 황금률을 제시하는 한 방제회사 광고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이 땀 흘리는 모습을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지 마십시요."

땀 흘리는 자는 평범함과 나약함을 노출시킨다. 힘 안들이고 성취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실력자다.

여유있고 우아한 성공이야말로 삶의 목표다. 수플레 요리사가 문을 세게 닫는 소리에 놀라듯 귀족들은 땀만 봐도 부르르 떤다.

 

인간은 '필요'와 '욕구"를 구분해야 한다.

당신은 알프스 우유를 욕구하는 것이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냥 우유일 뿐이다.

욕구는 필요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필요는 당신의 내부에서 생겨나지만 욕구는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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