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가을 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보이게 될 뿐이다."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 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가 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 거대한 현시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스코트는 자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곤 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나무의 꼭대기가 언제나 꼭대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지들이 점점 더 높이 자란다.
전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꽃이 핀다. 나는 크리슈나와 즐거운 여러 해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자.
내가 주고받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주고받도록 하자.
예술의 재능 또한 그 사람의 생활 방식, 규범, 성격에 정직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해블록 엘리스는 이렇게 썼다.
"진정한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온 삶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름다움에 맞추는 사람이다."
생텍쥐베리는 이렇게 썼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 보는 데에 있다."
해 뜨면 일하러 가고
해 지면 쉴 곳을 찾네.
목을 축이는 우물을 파고
먹을 걸 주는 땅을 일구며
거준 것을 나누네.
왕도 부럽지 않네 -중국 기원전 2500년 -
에머슨은 1870년 이렇게 썼다.
"우물을 파고, 돌로 된 분수를 세우며 길 옆에 나무들을 심어 작은 숲을 이루게 하고, 과일 나무를 심으며, 튼튼한 집을 짓고,
늪지를 메꾸거나 길가에 돌의자를 만들어 땅을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곳으로 만드는 사람은 비록 그 일로 자신은 이익을 얻지 못해도
그 뒤 오랫동안 자기 나라에 쓸모있는 자산을 이룬 것이다."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허바드가 1908년 쓴 <<건강과 부>>에서 보인 의견과 아주 일치한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있는 것을 얻게 해주고,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더 보태거나 더 낫게 할 수 없는 세가지 습관이 있다.
그것은 일하는 습관, 건강을 관리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이다. 당신이 만약 남자이고 이러한 습관을 가진 데다 같은 습관을 가진 여자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천국에 있는 것이며, 여자 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 지는 언덕'이라 부르는 곳에 봉우리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종종 거기에 올라가 혼자 또는 코스트와 같이 명상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존재의 진실한 모습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곳을 떠나게 되어 슬펐다.
<<헨리 애덤스의 교육>>에서 '스승의 가르침이 미치는 효과는 영원하다. 그 영향이 어디서 멈추는지는 말할 수 없다'는 말을 인용했다.
순회목사 존 웨슬리가 1750년에 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찾아내어 보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때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사람들이 농장일을 생활 양식으로 생각할 때 물질 자원뿐만 아니라 내적인 자원도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
존 버로우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는 사람은 삶의 토대가 될만한 사상과 경험의 밑천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빈곤하여 메말라버릴 것이다."고 말했다. 땅을 살 만한 돈을 은행에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신'이라는 말을 쓰는가? 우리는 그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왜 '전체로서의 존재' 또는 '위대한 전체'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다음의 정의가 최선인 듯 싶다.
'신의 본질은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허친슨이 1925년에 쓴 소설 <<커가는 목표>>에서 묘사한 주인공처럼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프로이드는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뒤의 당연한 결과로서 나는 지쳐 있다네.
나는 이제 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결되어 있던 유기적 요소들이 이제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네.
대체 누가 그 요소들을 강제로 계속 붙어 있게 하고 싶어하겠나?"
스코트는 즐거운 회상에 젖은듯이 예이츠의 시구를 인용했다.
"노인이란 지팡이를 짚고 누더기 옷을 걸친 볼품없는 것..... 죽어가는 짐승에 붙들어 매인 .... 그리고 이 불합리-오!, 가슴이 찢어지네-
이 우스꽝스러움, 개꼬리같이 내게 매달려 있는 이 나이먹음을 어쩌면 좋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먹음>>에서 "노인에게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휘트먼은 꽤 이른 나이인 70세에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배는 긴 항해를 할만한 형편은 못 되지만, 깃발은 여전히 돛대에 달려 있고 나는 아직 키를 잡고 있다."
이제 말을 걸 사람이 많이 남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이가 여기에 있지 않을 날이 머지 않았다
"사람을 삶에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끈이 약해짐에 따라 삶의 단계도 희미해져 간다.
사회적 측면도 점점 흐릿해진다.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삶과 매어주는 힘도 줄어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에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망명일기>>에서
"노년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예상치 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고 썼듯이, 그 전 해 봄 나는 나이든 사람들 무리와
북네덜란드 지방을 힘들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있었다.
죽음없는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육체적 삶? 죽음과 소멸은 모두 하나로 만든다. 관계들은 뒤얽힌다.
저마다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영속하는 것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할아버자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섞이는 것이다.
죽음은 몇 십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좋은 글들 > 책에 있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지음) (0) | 2011.02.14 |
---|---|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토드 부크홀츠) (0) | 2011.02.13 |
리영희 평전(김삼웅 지음) (0) | 2011.02.05 |
안다는 것의 기술(하타무라 요타로 지음, 황소연 옮김) (0) | 2011.02.04 |
Professional 소프트웨어 개발(스티브 맥코넬 지음) (0) | 2011.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