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가기에 허상을 쫒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긴 우주의 시간에서 인간의 삶은 지극히 짧기에 욕망과 허상에 집착하는 것은 실로 덧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일상이 되면 스스로를 몰아 세우지 않고 벌어지는 모든 일에 담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하련다.
인간 각자가 소중히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도 나름 가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라질 것을 알기에 짧은 인생이 소중함을 알고 더욱 알차게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유교가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교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며, 불교은 뿌리를 뽑는 것이라는 견해다.
우리나라에는 우주의 기본 원리를 밝힌 비책 <천부경>이 있다.
단제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천부경>은 신라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사 사상의 연원이 되었으며, <주역>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천부경>의 시원은 중국의 요순과 동일한 시대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복희씨의 팔괘가 나왔으며, 그 뒤에 문왕의 <주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우주 만유의 인식 주체를 연구한 것으로 그는 인식 주체를 순수이성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진하고 수연한 이치에서 나온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에서 망상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불가에서는 우주의 생성을 업의 인으로부터 인과필정의 원리에 따른 계가 생겨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범어의 '카르마'를 번역한 '업'이란 말은 '만든다', '짓는다', '한다' 등의 활동을 의미한다.
결국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착한 생각도 하나의 업으로 보고 이를 선업이라고 한다.
업은 그 인에 대한 어떤 결과가 올 때까지 소멸하지 않는 업력불멸의 원리를 갖는다.
'탐심이 생기게 되면 부정관을 하라.' 이 말의 핵심에는 애욕에 대한 경책이 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한 거풀 벗기고 나면 그 속에는 오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눈앞에 천하의 양귀비가 있다 해도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는 오물을 상상해 보면 마음이 홀리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천하의 절세미인이라도 그 사람의 겉만 보지 말고 백골을 상상하면 탐심이 동하지 않게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허공에 이르면 하나가 된다.
허공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것에는 차별이 없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가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가 되지 않는다.
본래 빈자리라는 것을 확연히 봤거나 믿거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위기다, 불안이다 하는 것도 본연의 자리에서 말하면 본래 불안이 없으니 해소할 것도 없고 본래 위기가 없으니 안심할 것도 없다.
반면 부처님은 이 대몽을 깬 분이기 때문에 중생에게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만상은 실체가 없다. 전부가 환이요, 허상인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본래 진실해서 망상이 없는 자리는 천도이며, 진실무망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진실 무망한 데서 밝아진 것을 성이라 하고, 밝은 자리로부터 밝아져서 진실 무망인 것을 교라한다.
조사들이 부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과정에서 달마대사의 '사행관'을 간절해한다.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이나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위다.
셋째, 수연행은 연을 따르는 행위다. 연을 따른다는 것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일이 닥쳤을 때 응직, 불응직을 관해서 당연히 해야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끊어 버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법이 아니라 진리에 합한다는 의미다.
부처라는 것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부처가 거기 머무르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머물지 않는 것이다.
도는 진리를 나타내는 대명사다. 한마디로 길을 가리킨다.
이때 도의 근본이란 '바른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옛말씀에 도를 잃으면 덕이라도 갖추어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인을 잃으면 의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잃으면 예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선은 마음속의 생멸을 없애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 하면 더 일어난다.
따라서 이때는 '나'라는 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잠잠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때에만 생멸상이 사라지게 된다.
<원각경>에는 이 관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관, 환관, 적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먼저 정관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 환관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행동할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실상이라고 보지 않고 환 또는 허상, 즉 꿈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삼라만상을 꿈으로 보면 집착이 없어진다. 우리가 매순간 변화하는 현상적 꿈인 세계를 실상,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생긴다.
세 번째는 적관이다. 적관은 주관과 객관을 모두 수용한 공부법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봐도 일어나는 곳이 없고, 밖으로 우주 삼라만상을 봐도 삼라만상이 꿈 같은 것이어서 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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