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너무나 소중한 글들이 있다.

혼자서 읽기엔 아까운 글들....

아래 내용은 밑줄친 글 중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옮겨온 것이다.

 

바람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하는 긴장감, 그 노력을 사공에게 부여하고 '언젠가 바람은 불어 온다'라는 강한 신념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커다란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했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으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운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도 아니고 숙명론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알때 자기를 초월한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합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도처에서 어쨌든 오늘을 산다, 내일을 산다, 라는 것에 급급하여 어떻게 살까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 자체가 현대의 테마가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오감을 갈고 닦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크게 기뻐하고 깊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크게 웃고 크게 눈물을 흘리면 됩니다.

깊이 슬퍼하는 사람일수록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많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수록 크게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로 우울하고, 깊이 고민하고, 또 절망하는데, 그것 또한 인간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크게 웃고 크게 울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감정의 자유로운 진폭인 것입니다.

깊이 절망하는 인간만이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지독하게 고민하고 지독하게 번민하는 인간만이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웃는 건 좋지만 우는 건 좋지 않은 일로, 한 노모는 자기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라를 위해 잘 죽었습니다"라며 조용히 미소 짓고,

"내년 봄에 야스쿠니 신사 벚꽃 나무 아래서 만납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군국의 어머니를 다룬 미담으로 신문의 큰 표제가 되어 칭송받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런 풍조는 전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 중요한 것을 보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쭉 지내온 것이 최근 전후 60년이 아닐까합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한쪽 면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중시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일본인은 결정적으로 절망하는 데 서툰 국민이다. 또 타자를 미워하는 데 서툰 민족으로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이다"

절망하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 그리고 무언가를 증오하거나 통렬하게 반성하는 데도 능숙하지 않다.

 

유연한 마음은 죽음과 대결하여 그것을 부정하면서 생겨나진 않습니다.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삶을 응시하고, 그것을 맞아들이는 가운데 생겨나는 법입니다.

위기 속에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사실 이런 유연한 마음이 아닐까요.

강하게 버티는 것만이 살아가는 기술인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무거운 책이 있을까?

색인을 뺀 423 페이지중에서 50여 페이지를 읽고 포기한 유일한 책.

뮤지컬에 문외한인 사람이 이 책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변경을 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등장하는 많은 사람과 오페레타의 곡들, 곡과 극을 쓴사람들의 상이점,

,그 각각의 얽힌 사연들,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 이것을 쫓아가다가 지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니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음의 기회를 빌어 완독할 것을 다짐하면서 간단히 옮긴이의 글을 소개한다.

 

 "옮긴이 의 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 노래와 극이 합쳐진 악극 또는 음악극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음악극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숙한 장르가 아닌 것 같고, 실제로 사람들이 음악극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른바 고급 예술로 분류되는 오폐라를 빼 놓고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흔히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대중적 음악극을 접하는 기회는 음반이 아니라면, 뮤지컬 영화 또는

큰 성공을 거두어 세계 공연에 나선 블록버스터 뮤지컬 공연 정도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극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겠지만, 서양의 경우에는 음악극 전통의 중심에 음악 극장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음악 극장들이 여러 층의 관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수준의 음악극을 공연하면서, 관객들을 객석에 잡아두기 위해 노력하고 변모해온 것이 서양 음악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수십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극장과는 다른 새로운 매체, 즉 영화나 텔레비젼과 경쟁 또는 협력하는 것이 또 서양 음악극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 극장은 영상 매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현장감을 극대화 하거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영상 매체와는

구별되는 소수 집단의 상대적 친밀성을 강화하거나,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앤드루 램의 <150년 뮤지컬의 역사>는 이런 서양의 대중적 음악극의 1840년대 이후 150년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때로는 읽다만 소설의 남은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랜다."

이 소설을 이번 주 3일에 걸쳐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사소함에서 뭔가를 기대해 보는 것.

이것이 일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

 

"이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책 제목부터 뭔가가 있어 보인다.

인터넷에서 읽을 책을 찾다가 발견한 책이다.

 

이 책은 리처드라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어느날 몸이 갑자기 아파오고 병원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그는 예전의 외톨이 생활에서, 접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와 관계 형성이 되는 확장으로 변한다.

빵을 굽는 사람에게 자신의 멋진 차를 운전할 기회를 주고, 집을 나온 아줌마에게 잠자리, 차를 마련해 주고,

웅덩이에 빠진 말을 구해주고, 차 트렁크에 납치된 여자를 구해주고 모든 일들이 활동적으로 진행된다.

그에게는 이혼한 마누라가 있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먼 길을 거쳐 찾아온다.

그동안 무심했던 마음과 갈등이 해소되고, 어느 순간 이혼한 아내도 찾아와 세사람은 같이 있는 시간도 갖는다.

그리고 어느날 비가 많이 와서 그는 식탁위에 의지하게 되고 그 식탁은 바다로 떠내려간다.

식탁 위에 있는 그의 위로 헬리콥터가 날아들지만 잠시 기다리라는 얘기를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 이후는 의문으로 마무리 된다.

갑자기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난다.

 

이 책은 나의 인생을 구한 것일까?

아니면 책 주인공 리처드의 인생을 구한 것일까?

섬세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의문이 든다.

시간을 두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결론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소설에 나오는 몇 가지 내용을 옮긴 것이다.

 

"당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핑크 레이디인가요?"

"간호사예요. 이십 년 전에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했어요. 두 번째 직업이죠."

"왜 돌아왔죠?"

"남편이 죽었는데 솔직히 밤에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요.

잠도 오지 않고, 그러다가 생각했죠. 밤에 일하면 어떨까. 그러면 집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정신병원에 들어갈 일도 없겠지 하고요."

 

"내가 이런 전화를 하는 건 우리 사이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고, 한 번도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은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법이야.

촌스러운 소리인 줄은 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

 

오후에는 비가 내린다. 계절에 맞지 않는 폭우이다.

하늘이 시커멓고, 온통 어두워서 그들은 촛불을 켜고 명상을 한다. 그리고 앉는다.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다.

리처드는 앉은 채 잠이 든다.

그러다가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퍼뜩 깨어난다.

 

언덕을 오르다보니 수영하는 여자의 집에 '판매' 표시가 붙어 있다.

그는 남 몰래 기뻐한다. 잘 됐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오겠구나. 새로운 뮤즈가.

 

"그저 당신에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내 인생을 다시 열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난 해방된 느낌이에요. 구원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느닷없이 농산물 코너에 나타나서 날 돌봐줬고, 보답도 바라지 않았어요.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마음 써주지 않았어요. 마음 쓰는 건 내가 하는 일이었죠!."

이것이 리처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미친 모자장수의 찻잔'을 타고 논다.

"그래서 왜 날 데려가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로 갈지 몰랐다."

"내가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걸 몰랐어요?"

"자식을 둬본 적이 없었잖니."

"하지만 아빠도 한때는 아이였쟎아요. 아버지도 있고 어린 시절도 있었잖아요."

심문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떨어져나가고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뺑뺑 돌리려는 것 같다.

리처드는 생각한다. 좋아 그렇게 하렴. 난 그래도 싸지.

그들은 한 번도 나눠보지 못한 대화를 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도망칠 순 없어. 누구에게나 역사가 있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왜 널 필요로 하니? 돌봐줄 자식이 없대?"

"때로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해줄 수도 있는거죠."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 생각은 직관적인 사고에 의존하는 시스템1과  냉정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시스템2의 영향을 받는다.

시스템1은 빠르게 동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시스템2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장점이 있지만 게으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어떤 일을 대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책은 우리 인간 사고의 시스템을 정의하고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얼마나 직관에 따라 결정되는지를 보여준다.

고통이라는 것도 합리적으로 볼때 적은 양의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객관적이지만,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의 강도에 따라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오류를 보인다.

심지어 행복이라는 것도 누군가 행복하느냐를 물으면 인생 전체에 대해서 행복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오늘 아침 출근길의 교통 체증상태에 대한 마음으로 행복을 말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한 번쯤은 시스템1에 의해서 판단하고 있는게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게 적을수록 감정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판단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합리화 한다는 것.

인간은 자기 기억조차도 조작한다.

 

1달이 넘는 시간을 쉬엄쉬엄 읽어왔다.

이 책은 인간을 한층 깊이 분석한 무게있는 책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더욱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시대의 발전에 맞추어 독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과거의 학습만으로는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다.

아래 내용은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 담은 것이다.

 

직관은 결함을 수반한다.

 

무엇에 지나치게 열심히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멀게 된다.

우리는 명백한 것조차 못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못 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오랜 진화의 역사속에서 주의 할당능력은 섬세하게 개발되어 왔다.

심각한 위험이나 가장 유망한 기회에 관심을 갖고 재빠르게 반응하면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현대인에게도 비상사태 시에 시스템1이 개입해서 자기 보호 행동에 전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게으름은 우리 본성 깊숙이 박혀 있다.

 

나 또한 산책하면서 사색할 수는 있지만 단기 기억에 과부하가 걸리는 정신작업을 하진 못한다.

더 빠른 걸음으로의 전환은 논리 정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급격히 저하시틴다.

 

자제력에는 주의와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각과 행동의 총제는 시스템2가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의 말대로 정신 에너지란 단순한 은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신경 시스템은 다른 대부분의 신체 부위에 비해 더 많은 포도당을 소비한다.

노력이 필요한 정신활동은 특히 포도당 소비를 늘리는 듯하다.

 

시스템1은 빠르면서도 자주 정확한, 직관적 판단의 원천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믿게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거짓말을 정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낯익음은 진실과 쉽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2는 게으르며, 정신적 노력은 회피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가능하다면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간결히 하라.

수용자들이 수고하고 노력해야 할 듯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내어 간소화해야 한다.

 

좋은 분위기일 때 사람들은 더 직관적이고 창조적이 되는 반면, 경계를 풀고 논리적인 오류에 빠져들 확률이 높아진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는 신체적.의도적 인괴성의 분리 준비는 종교적 믿음이 사실은 보편적인 것에 가깝다는 걸 설명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마음의 세계와 분리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육체와 신체가 없는 영혼을 상상하게끔 해준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인지하는 두 가지 인과관계 모드는 많은 종교들의 두 가지 핵심 믿음을 자연스럽게 수용시킨다.

이 믿음은 1)무형의 신이 물리적 세계를 창조한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과

              2)우리가 사는 동안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일시적으로 통제하며, 우리가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것이다.

블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두 인과성의 개념은 진화적인 힘에 의해 별개로 조성되면서 종교의 기원을 시스템1의 구조에 통합시켰다.

 

시스템1은 속기 쉽고 무엇이든 쉽게 믿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스템2는 의심과 의혹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정합적 패턴으로 통합하기가 훨씬 쉽다는 사실을 종종 깨달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개입되면 결론이 논거보다 영향력이 커지는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의심을 지속하기란 확신에 빠지기보다 힘들다.

'적은 숫자의 법칙'은 우리가 가진 의심보다 확신을 선호하는 성향을 드러내준다.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의 지속성과 정합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시스템1은 여러 증거 조각들에 기초해 풍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사실보다 앞서간다.

서둘러 결론 내리려는 기계는 적은 숫자 법칙을 쉽게 믿으려 할 것이다

 

나는 교관들이 '불행한 우연적 상황'의 덫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벌은 아무 효과가 없었는데도 교관들은 훈련 성과가 나빴을 때 생도들을 벌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이야기도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수많은 사건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내가 이 문장에서 '알다'가 잘못된 사용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엄청나게 위험하며 치명적인 착각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과거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데서 착각의 본질은 그 싹을 띄운다.

이런 생각은 미래 역시 알 수 있다는 뜻이지만, 사실 우리는 이해한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모른다. 과거든 미래든 말이다.

이런 착각을 유발하는 단어가 '알다' 하나만은 아니다. '직관'과  '예감'도 이미 사실로 판명난 과거의 생각을 위해 준비된 단어들이다.

 

인간 사고의 한계는 그것이 과거의 지식 상태나 수정된 믿음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새로운 세계관(아니면 세계에 대한 관점의 일부)를 갖게 된 사람은, 생각이 바뀌기 전에 소유하던 믿음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전에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한다.

이처럼 특정 사건의 결과를 보고 난 후, 자기는 이미 진작부터 그런 결과를 확실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믿는 현상을 '사후확신 편향'이라고 한다.

 

허술한 증거로도 충분히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념 중에는, 그저 우리가 사랑하고 믿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증거도 대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감안하면 자신의 믿음에 갖는 신뢰는 불합리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미래가 예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매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과거 때문에 약해진다....

우리는 자기 예측력의 한계를 수용하길 어려워 한다.

 

그리고 오늘 느지막이 생각했을 때 이해되는 일이 이미 어제 예측 가능했다는 강력한 직관을 억누르기는 힘들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계획 오류는 만연되어 있는 낙관적인 징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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