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쓴 책. 1주일만에 만들어진 책.

많은 수사가 따르는 책이기에 읽어 보았다.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시간, 노력, 그리고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지인들과 가벼운 우정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삶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소수다.

이 사람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도전하고 최고의 자신이 되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한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투자하는 것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중요한 부분이다.

진정성은 진실하고 정직한 감정의 표현이며 진정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개방이 필요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이나 승인을 구하는 것은 검증 추구의 끝없는 순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될 수 있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 검증과 관계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가치로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타당성을 찾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성취와 진보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

 

부족한 감정을 느낄 때에도 행복과 성취감을 증진시키는 습관과 일상을 개발하는 것은 가능하다.

부족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 중 하나는 감사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삶의 단순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음으로서 우리는 더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현재의 순간에서 행복을 찾는 비결 중 하나는 마음챙김을 연습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판단이나 산만함 없이 그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는 연습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주변의 세상에 대한 더 큰 감사와 감사의 마음을 키울 수 있다.

 

삶이란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비와 모험이다.

많은 사람은 인생을 삶이 제공해야 하는 신비와 모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달성해야 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

단순히 하루를 견디기보다는 탐구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접근하라.

삶의 신비와 모험을 받아들이고, 흥분과 기대감을 가지고 매일 접근하라...

사람은 새로운 경험과 기회에 열려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목표나 이정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에서 성공과 목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외부의 기대를 버리고 우리 자신의 내적인 지도에 맞추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성취감과 의미를 느끼는 삶을 창조할 수 있다.

 

나 자신은 언제가 반드시 죽는다- 이 사실을 토대로 삶을 설계하라

- 여러분의 가치를 명확히 하라:

   여러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여러분의 목적에 맞는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의미있는 목표 설정: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명확한 감각이 있을 때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 현재를 살아라: 미래에 대한 목표와 계획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 두려움을 직시하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고 마비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

- 자기 성찰 연습: 규칙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반성하는 것은 여러분의 목적과 가치에 계속 연결되도록 도와줄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성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단지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당신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지치고 궁극적으로 성취감을 주지 못 할 수 있다.

 

삶이 목적을 찾는 것은 개인적인 여행이며 개인적으로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목적은 우리의 독특한 경험과 관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 삶에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핵심은 가치관이다.

가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나 신념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동, 결정, 궁극적으로 목적의식을 안내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성격을 인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그들에게 권위를 주는 것이다.

권력이 주어졌을 때 누군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 보면 우리는 그의 가치와 동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만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삶을 단순화하는 것은 산만함을 줄이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며,

존재감과 목적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을 만드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태도", 이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그 사람이 좋은 상태에 마물게 하며 잘 기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리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어떤 행동이 초래한 결과만 중시하는 "결과주의"로, 윤리철학의 한 학파다.

결과주의자에게 가장 좋은 행동이란 최대 선과 최소 악을 초래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은 보편 법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칸트>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라 오로지 자신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단순해져도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따를만한 '행복 창출 법칙'을 만들 방법 또한 없다.

 

인간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비록 자신은 해내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행한 수준 높은 덕을 보고 배운다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용감하지 않아도, 완전하게 친절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관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이 고단한 프로젝트가 가능할 것처럼 느껴진다.

 

'선한' 행위를 하기도 전에 남들이 알아주길 바란 내 행동은 그 행위가 행위 자체뿐 아니라 다른 역할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다. 행위에 대한 반응과 그로부터 내가 얻을 이익을 신경 쓴 것이다.

팁을 주는 행위는 더 이상 단순히 팁을 주는 게 아니라 어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고 그 목적은 이기적이었다.

불교 철학에서 진정한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깊이 집중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데 있다.

 

수치심은 스스로 느끼는 굴욕감으로 외부의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일단 망신을 당하면 행동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개념이 수용 가능한 개념으로 바뀌면서 결국 현실이 되는 것이다.

 

랜드는 독자들에게 도덕적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이득만 게걸스럽게 챙기라고 말한다...

"아인 랜드에는 딱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생각도 없고 글도 쓸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은 상당히 성가신 일이라는 점이다. 이건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보다 특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에 주의를 기울여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어떤 것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동시에 아래 두 가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1. 나는 이것이 좋다.

2.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한다. 그는 세계에서 구체화하고 자기 자신과 만나며 그 후에야 자신을 정의한다.

실존주의자로서 인간이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이 되어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자신이 만드는대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여기서 그나마 '낙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부분이다.

자신의 선택만이 인간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언제든 자유롭게 원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세상은 차갑고 무관심한 곳이며 의미를 부정한다.

사실 '의미'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최소한 무언가보다 더 '의미 있는'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에 떠다니는 크고 멍청한 바윗덩어리에 살면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무의 얼룩일 뿐이다.

고로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부조리하다.

 

부와 성공을 크게 이룬 사람은 그것을 스스로 확득한 것으로 본다는 얘기다.

이러한 믿음은 이 크고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세상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느기게 만든다.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면 적절히 보상받을 것이며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느김이다.

사실 이 중 많은 부분이 그냥 운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건 이 게임에 자신의 훌륭함을 넘어서는 다른 요인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자 자신이 인생의 제비뽑기만큼도 대단치 않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그들의 성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의 성공은 어느 정도 우연에서 기인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현재의 길을 가게 한 기회를 잡아챈 똑똑함과

능력, 재능에 찬사를 보내면 된다....

매일 일상에서 내가 요구받는 도덕과 책임은 평균보다 훨씬 큰 것이어야 한다.

대다수 사람이 내게 지는 의무보다 내가 그들에게 지는 의무가 훨씬 크다....

그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자신이 누리는 행운과 부, 사회적 위치, 세상을 두려움이나 고통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높은 윤리 기준을 세워야 한다.

동물에게도 자아는 있을까? 있다면 인간이 갖는 자아와는 어떻게 다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자아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과 철학의 영역이지만, 한계적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자신의 의지 혹은 바라는대로 살아갈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듯 하다

 

신경 과학은 자기감이 뇌와 몸 사이에 일어나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한 사람의 개성을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연결해주기 위한, 매 순간 자아에 대해 업데이트하는 신경 프로세스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우리는 자아가 환상이며 자연의 가장 정교하고 교묘한 속임수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조현병'은 사람을 조각조각 해체해버린다.

이러한 분열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자기 행동의 주체라는 느낌인 '주체감'의 상실이다...

그리고 자아에게서 정서적 기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기게 하는 '이인증'이 있다.

이인증은 자아를 창조하는 데에 정서와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페증'은 '발달하는 자아'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자페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유체 이탈'이나 '도플갱어'(자신과 몸이 똑같이 복제된 사람을 만나거나 보는 것)는 정신이 몸 하나에 담겨

내 몸을 알아보며 눈 뒤쪽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등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조차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아에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필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고무손 착각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양한 감각을 끊임없이 통합하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뇌는 우리 몸(외면과 내부의 모든 조직)에서 바깥세상에 관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 낸다.이러한 지도가 의식의 대상들을 구성한다.

 

'비교자'는 실제 느낌을 예상했던 느낌과 맞춰본다.

만약 둘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행동은 내 것이라는 주체감을 갖게 된다.

반면 불일치한다면 우리는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이나 외부에서 행한 것이라고 느낀다.

 

뇌는 자기발생적 촉각에 대한 반응을 억제한다(이것이 우리가 왜 스스로를 간지럼 태울 수 없는지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억제를 맡고 있는 뇌 영역은 자기발생적 움직임의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소뇌로 추측된다...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스스로 간지럼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아를 몸에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다른 신경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인증을 겪는 사람은 (대개) 몸 안에 머물러 있지만 몸으로 존재하는 생생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과 정서에 대한 현대의 신경과학적 정의는 무엇일까?

'정서'란 자극에 반응하는 몸의 생리학적 상태다.

이 상태는 심장박동과 혈압뿐만 아니라 몸의 운동동작까지 포함한다.

반면 '감정'이란 이러한 뇌-몸 복합체의 정서적 상태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다...

정서가 먼저 일어나고 그런 뒤에 감정을 느낀다.

 

뇌 어디에도 지각을 만들기 위해 입력 정보를 통합시키는 곳은 없다.

지각이란 끊임없는 예측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언제나 신호의 원인을 뇌가 추측한 결과다.

 

생리적으로 생존 가능한 한계 내에 머무르려는 프로세스가 바로 '향상성'이다...

"유기체는 자신의 상태가 생리적 한계 내에 확실히 머무를 수 있도록 놀라움을 피해야 한다."

 

"마음이론은 본질적으로 예측 작업이다"

주체감은 예측하는 뇌의 산물이다.

우리는 또한 예측이 잘못되었을 때 생생한 정서 경험을 잃을 수 있으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이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매 순간 지각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통일감이 있다.

몸에 존재하고 몸을 소유하며 내가 한 행동들의 주체가 나라고 느끼는 감각,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나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라는 느낌, 이 모든 것에서 일관성이 느껴진다.

경험들의 주체가 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말하는 '공시적 통합성'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기저에는 같은 사람 또는 같은 것이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통시적 통합성'이라고 부른다...

만약 자아라는 것이 없다면,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은 회상하는 사람에 속한 것처럼 회상될 수 없다.

기억이 온전히 기능하려면 반드시 자아가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당신이 만약(성찰이나 명상을 통해) 자아를 찾고 있다면,

자아는 일시적이고 계속 변하며 통합성은 겉보기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란 행위와 말, 움직임, 불평, 약속 등 인간을 만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한 것들을 통합하고

이해하기 위해 사실로 상정된 허구다.

 

"나에 대한 인지적 집착들이 그 자체로 일종의 병이자 장애의 근원이라는 것이 불교 사상의 핵심이다.

병은 바로 자아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들의 측면은 그것들의 단순성과 일상성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게."

그렇게 살아보자

 

"인간은 결국 감정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당장은 시그널이나 기호일 뿐이라 해독이 필요하다.

 

내가 갈 길을 알주는 실마리, 그것은 '감정'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에게 아직 감정이란 달팽이가 침 흘린 흔적만큼이나 흐릿하고 모호하며 무엇보다 믿을만 하지 못하다.

쏟아내고 펼쳐 선명한 햇살을 쬐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일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만큼은 드러내자.

아니 척하고, 그런 척하고,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를 내려놓고  솔직해지자.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사람은 쓸모있는 일만 하고 살면 숨구멍이 막힌다.

 

맺음이 끝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까지가 끝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옳지 않을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란 무엇이었을까....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배신당할까 신뢰하지 않고 버림받을까 사랑하지 않는다.

거부당할까 다가가지 않고 실망할까 기대하지 않고 실패할까 시도하지 않는다.

배신당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거부당할 일도 실망할 일도 실패할 일도 없다.

그래서 행복한가. 아프지 않아서 횅복한가.

마음에 상처가 없고 흉터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의 마음에는 상처와 흉터가 없지만 광휘와 내력 또한 없다.

아픔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노라 마음이 보내는 신호인데

상처도 흉터도 없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 머문 적 없다는 소리가 된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심리학의 원리>를 쓴 윌리엄 제임스는 육체에 변화가 나타날 때 그 변화에 대한 느낌'이 감정이라고 말한다.

감정을 인지한 다음에 육체의 변화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육체의 변화가 나타날 때 느끼는 것이 감정이라는 얘기다.

 

사랑을 해서 가슴이 뛰는 게 아니라 가슴이 뛰어서 사랑을 한다.

몸의  지각이 먼저이고 두뇌의 감지는 나중이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즐겁다....

소중한 것이 생겨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느껴서 소중한 것이 된다.

 

사고와 유추는 새로운 정보를 고유의 기억과 연결해서 그 결과를 상상하는 과정이다...

이런 뇌의 생리를 들여다보면 과거와 미래, 현재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늘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니간 때와 앞으로 올 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분명하게 표현하기만 해도 격한 느낌이 누그러질 수 있다.

 

그러다간 최후의 것마저 빼앗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후의 것이란 '자기 자신'이다. 무기력의 징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우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타인이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행동하지 않으면서 희망을 품는 것...

"삶이 이대로라면 복수할 수밖에."

나는 로트렉처럼 복수를 다짐했고 동시에 그가 인정머리 없는 수준만큼 처절한 가난뱅이가 되기를 저주했다...

복수를 꿈꾸며 일어서는 것이 슬픔의 늪에 빠지기보다 차라리 이롭다.

분노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정당한 신호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 등이 모욕이다.

왜 이런 착각이 생기는가? 이 역시 뜻풀이에 있다. '교만해서'.

 

정리하자면 멸시, 경멸, 무시, 비웃음, 업신여김, 깔봄, 얕잡아봄 등을 비롯해 모욕이란 잘나지 못해서 잘난 체하느라

타인을 실제보다 낮추어 보는 착각에서 하는 눈빛, 표정, 말투, 몸짓 등이다.

여기에 이르니 모욕은 굉장히 모자라는 마음이다. 그들의 착각은 그들의 것이다.

내 감정이 전염돼서 내가 나를 낮추어보는 착각은 하지 말자.

그들이 착각하는 나에 대해 해명하거나 변호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그들의 것이므로 내가 바라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

노래 부르며 내 갈 길을 가면 되겠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은 내가 간 길이 내가 그들에게 하는 답이 된다. 말이 아니라.

모욕을 당한다고 자신의 본질이나 실력이 깍이지 않고 추켜세운다고 올라가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나이다. 기분만 날씨처럼 나빴다가 좋았다가 할 뿐이다.

 

생명의 특성이자 장점은 일관성이 아니라 변화이다.

일관성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억지스럽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자신의 과거 의견을 계속 가지고 있을 뿐 그 시점부터 정신 또한 멈취버린 사람에 불과하다.

결국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말>

 

존경할만한 인물이 없는 세상이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혹시 타인을 존경할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까.

존경하는 마음이란 세상과 사람을 고귀하게 보는 시선이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마음이며

계속 배우려고 하는 자세다.

"오늘 얼마나 감탄했는가?"

 

자신감은 소질이 아니라 그간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춰 도움을 청하는 것까지가 노력이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데 시도해 보지 않고 혼자 애쓴다면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과녁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면,

그 분야에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갖추는 데 다시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당신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게."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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