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반드시 세번 이상 읽기를 권한다.

 

사회라는 시스템에 숨겨진 비밀스런 현실이다.

슬금슬금 무언가를 엮어가는 문화적 이면

-당신의 인생에 맹목적 순종과 체념적 평범함과 유기된 꿈이라는 형을 언도하는 사회학적 음모- 이것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노예제도가 존재한다.

오늘날의 노예제도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각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철창을 대신하여 자발적 채무와 평생의 노역이 우리를 가두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으로,

주 5일의 근로로 그 값이 치러지고, 인생이 황혼으로 스러져가기 시작할 때에야 자유가 주어지는 보이지 않는 각본이다.

 

모든 사람이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당신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그랬듯이 '빨간 알약'을 받아들인다면(즉, 아픈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위한 출구를 보여줄 수 있다.

 

[언스크립티드]는 당신이 한번 해볼 무언가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내야 할 무언가다.

 

일상화된 부산함이 나의 혼을 빼놓는 동안 거리를 흐르던 분주한 사람들의 세찬 흐름은 점점 자욱한 안개의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목적과 꿈과 야망을 품은 개성 있는 개인들, 누군가의 아들, 딸, 남편인 사람들, 그들이 모두 갑자기 논능으로 휘몰리는 단 하나의 유기체이기라도 한 양 흐릿한 단일 집합체로 변해버렸다.

 

파란 알약을 삼키고 평범과 무지의 삶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빨간 알약을 삼키고 자유롭지만 진실을 향해 번뜩 깨어나느냐,

그 영화의 어두은 디스토피아 안에서, <매트릭스>는 인간 종족에게 설정된 운영체계, 즉 기계종족에게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가상현실을 대변한다.

 

"도그마적 덫에 걸리지마십시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대중은 경제적 목적(도축, 털 깍기, 젖 짜기)을 위해 조직화되었다.

떼거리와 함께 무리지어 다니다 보면 떼거리를 위해 계획된 예측 가능한 결과만을 얻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압제는 희생자들이 부지중에 스스로에게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완벽한 노예는, 자기도 모르게 기쁨에 겨워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킨 자들이다.

 

각본화된 운영체계는 스스로를 코드화한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프로그램화된 모든 소프웨어가 그렇듯이, 각본화된 운영체계 역시 목적을 갖는다.

계율을 지키도록 길들여진 모범 시민으로 당신을 제조해내는 것이 것이 그 목적이다.

당신의 방어무기는 지식이다.

 

노암 촘스키는 말했다.

"사람들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상태에 마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용 가능한 의견의 스펙트럼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도 그 스펙트럼 안에서는 활발한 논쟁이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각본의 대변자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 대변자란 언론이다.

 

마치 스마트폰과의 관계가 진짜이고, 진짜 친구들과의 진짜 대화가 스마트폰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 같다.

물론 이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대화는 채 1분도 유지되지 않고,

모든 고개는 다시 스마트폰을 향해 숙여지고, 손가락들은 자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가면을 쓴 자아가 진정한 자아보다 더 중요해진다.

 

소셜 미디어는 더욱 위험하다.

소셜 미디어 도구들-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을 이용하면 우리는 손쉽게 자신의 모조품을 빚어낼 수 있다.

우리는 몸을 숨기고 무대 위에 유령을 세우고 있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들만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꽁공 숨김으로써 우리는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가짜 자아는 당신이 당신의 삶을 건설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자괴감 속에서 구경하게 만든다.

 

3주후면 잊혀질 스포츠게임을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그 사람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의미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에서 선전을 담당하는 장관의 자리에 앉았던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쟁이로,

새빨간 거짓말일수록 더 많이 반복해야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복은 '합의 오류'를 낳는다.

즉,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 어떤 입장 혹은 어떤 이념을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시간팔이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

 

당신의 죽음 시계가 당신의 팔뚝에 찍혀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당신의 죽음 시계는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투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외롭고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을 위해 지불하는 값은 아무리 높아도 비싼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돈이 없어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강한 직업윤리를 갖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비효과적이고, 낡은 제도 아래서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것이다.

 

'열받으라'는 속된 말이 암시하듯, 각본탈출은 꾸밈없는 삶과 자유에 대한 것이다.

삶이란 당신의 존재를 큐레이팅하면서 당신의 시간과 생각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것이다.

- 일로부터의 자유

- 결핍과 경제적 곤궁으로부터의 자유

- 하이퍼 리얼리티의 영향으로부터의 자유

- 헛된 희망과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

 

대오각성은 뇌리에 영원히 새겨지고 망각되는 법이 거의 없다.

자신이 대오각성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아마도 당신은 아직 그 사건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봐요, 저 개 어디 잘못된 거 아니에요?

직원이 대답했다. "아, 못 위에 드러누워서 아프다고 저러는 거예요."

황당해하며 손님이 묻는다.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는 거죠?"

직원이 대꾸한다. "아직 덜 아픈거죠!"

 

시스템이 얼마나 거지같은지 경험해보고 나서야 그것을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불이 뜨겁다는 경고로는 충분치 않다. 불에 데어봐야 불이 뜨거운 걸 안다.

 

문제는 평범의 안락함이다.

그 멋진 차, 월급날이면 꼬박고박 들어오는 보수, 주말의 미식축구 게임을 관전하는 그 재미,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간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당신은 결정해야만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당신의 꿈? 아니면 양키즈의 홈 10연전 중 세번째 게임을 관전하는 것? 당신의 장기적 행복?

 

죽은 꿈의 드넓은 공동묘지는 적당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더 많은 좌절을 만든다.

그것은 언론, 카지노, 주정부의 복권 금고도 마찬가지다.

이 바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꿈의 추구 자체가 가치있는 꿈이라는 사실이다.

꿈은 과정이다.

실패와 시도와 시련, 꿈을 좇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시도와 시련을 통해 우리는 자기 성장, 자기 인식, 자기 발견을 이룩한다. 꿈을 판다는 것은 당신의 꿈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꿈이 살아나면 당신이 살아난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검증할 자유가 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집단적 사고를 통해 우리의 신념을 확인받으려 든다.

그리고 그결과, 우리의 신념은 비판을 비켜나가고 세월을 초월하여 존재하면서 같은 결과를 거듭거듭 초래한다.

 

오래된 신념은 반드시 의혹의 도마에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콩깍지를 제거해야 한다.

의심의 눈으로 각본화된 오래된 생가과 사고 과정들을 리셋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바꾸어 새로운 행동을 하라.

 

성공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다.

지름길의 환성을 떨쳐내고, 과정을 중시하고, 해야할 일을 하라...

과정 중시 원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반복이다.

위대함은 많은 작은 것들을 매일 실천하는 데 있다.

 

당신의 목표가 천만 달러라면, 새로운 목표는 천만 달러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려면 돈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야 한다.

 

와이즈맨은 불운한 사람들이 일상적 틀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직업 행로를 걷는다.

반면에 운이 좋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다양성을 불어 넣는다.

행운을 바라는가? 변화를 주고, 색다른 것을 하고, 바퀴를 돌려라.

 

헛질문쟁이! 조언을 열심히 구하면서 정작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우리의 확신은 갈등적 증거를 만났을 때 오히려 더욱 강회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벌어자는 정치적 논쟁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차트, 그래프,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되었든, 자기 옳음은 변화 거부와 함게 손잡고 다닌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부자들이 있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빈자들도 있다.

부자들만이 탐욕이나 사악함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라는 종족 자체가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다.

문제는 당신의 눈에는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는 점이다....

당신은 도적적이고 윤리적인 동시에 부자일 수 있다.

 

진짜 변화는 정체성과 자기로부터 온다.

책이나 유튜브의 반복시청을 통해 시동이 걸리는 외부 동기부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당신은 먼저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따라온다.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고 그것이 되어라. 그러면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새로운 정체성이 '나는 작가다'라면 매일 몇 문단씩 글을 쓰라.

이전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말고 노력 위에 노력을 쌓아가라.

그렇게 노력의 상승곡선을 그려가라...일단 피드백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축하한다.!

모든 것이 쉬워지고, 졿은 습관이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도 변화를 눈치채게 될 것이다.

새 정체성을 증명해 보임에 잇어서 매일 1퍼센트의 전진을 이룩하면서 1년을 보내고 나면 당신은 새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며 과거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결과는 위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헌신에 점화 플러그가 있다면 그것은 목적과 의미일 것이다.

목적과 의미는 역경과 비난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목표와 달성이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의미와 목적은 무대공포증을 떨치고 연단에 올라 말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성공의 비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변화의 고통을 회피하면 당신은 결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어렴풋하게라도 알지 못하고서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삶에서 아무런 목적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한다

 

가장 위대한 행복의 비밀은 자율이다.

자유, 자기 인생에 대한 통제감을 가능케 할 능력,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능력, 이동성,

스스로 결정하고 승인하는 능력, 은행 앞에서 찾아왔던 나의 각본탈출 순간을 떠올려 보라.

 

잘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주는 요인 중 우리가 지금까지 고려해 온 그 어떤 요소도

자기 인생에 대한 강력한 통제감보다 더 확실한 행복감을 주는 것은 없다.

반도체의 기본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우리가 아는 CPU, D램, 낸드, GPU 등의 반도체 칩은 전부 모스팻(MOSFET)을 기반으로 한다.

 

D램은 사용자로부터 명령과 주소를 받는 부분, 주소를 해독하는 부분,

데이터 저장소와 읽어온 데이터를 잠시 보관해두는 래치 등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구성된다.

 

현대의 CPU들은 다층의 캐시 메모리와 디코더, ROB, 대기소, 연산 포트, 연산기 등

다른 기능을 하는 조그마한 하드웨어들로 연결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복잡한 설계는 사람이 손으로 직접 하기가어렵다.

수십억 개가 넘는 트랜지스터를 하나씩 손으로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검증도 곤란하다.

따라서 칩의 설계를 도와주는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툴,

해당 설계를 특정 제조기술에 맞춰주는 PDK(Process Design Kit)툴 등이 필요하다.

 

가장 아래쪽 웨이퍼와 가까운 쪽에는 반도체 소자(흔히 PMOS, NMOS로 불림)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미세하게 제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제조하는 과정을 FEOL(Front End of the Line)이라 부른다.

그 위로는 금속 배선층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이 각 소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사이사이 절연 물질이 채워져 있고, 필요에 따라서 소자와 직접 접촉하거나 다른 금속들과 연결되는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BEOL(Back End of the Line) 이라 부른다....

한편 BEOL에서 위층으로 갈수록 미세함이 떨어지고 배선도 굵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첨단 공정에서도 구세대 장비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

 

컴퓨터는 크게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

중앙에서 연산을 처리하는 CPU와 수행되어야 할 코드 및 연산 결과를 저장하는 메모리 그리고 HDD, SSD 등의 보조기억장치다. 이 중 보조 기억 장치는 D램의 가격과 휘발성 한계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태어났다...

연산 결과를 받아 기록하는 고성능 메모리였던 D램과 S램은 전력이 끊길 경우 데이터가 손실되는 특징이 있었을 뿐이다.

 

플래시 메모리는 전압펌프를 가동한 뒤 절연 공간에 전하를 집어넣을 때까지 수십~수천 마이크로초로 D램보다 천 배 이상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대신, 전하가 절연 공간에 갇혀있는 방식이므로 전자로 움직이는 소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원을 차단하더라도 데이터가 그대로 보존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전원이 나가도 데이터가 유지되는 특성(비휘발성)은 보조기억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훌륭한 특징이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는 사용을 매우 어렵게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었는데, 바로 덮어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할 때 데이터를 썼던 영역에 다시 데이터를 쓰기 위해서는 지우기 작업을 한번 해야했다...

또한 플래시 메모리는 데어터를 지우는 단위와 쓰고 읽는 단위가 달랐다.

플래시의 데이터 삭제 단위는 블록이라고 하는데, 보통 그 최소 사이즈가 데이터 쓰기/읽기 단위의 수백~수천 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데이터가 번쩍 터지듯이 없어지는 이런 특성 대문에 플래시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플레시 제조사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블록 0번은 불량이 없을 것과 침 내 불량 블록이 몇 개 이하일 것이라는 정도만 보장하여 판매한다. 플래시 메모리 구매자는 직접 플래시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해당 정보를 기억하고, 자신의 프로그램이 해당 영역에 접근하지 않도록 직접 관리하는 번거로움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플래시 메모리는 대부분 컨트롤러와 결함되어 운영되며, 컨트롤러 안의 조그마한 소프트웨어를 탑재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 한편 이 메모리는 노어와 낸드라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노어 플래시의 경우는 한 번에 접근할 수 있는 크기가 D램과 비슷한 수 바이트 정도로 작았던 반면,

낸드는 반드시 한 번에 수 킬로바이트씩 접근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C언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컴파일이라는 과정을 거쳐 CPU가 알아듣는 언어인 기게어로 바꿔줘야만 한다

 

프로그램이 주변기기에 접근하여 사용하기 위해서는 접근시키는 드라아버라는 작은 소프트웨어가필요하다.

 

시장에는 물리 연산 전용카드가 등장했다.대규모 단순 수치 계산을 위해 VGA를 사용하려는 회사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상황을 본 엔비디아가 CUDA라고 불리는 VGA 기반 프로그래밍 라이브러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프로그래머가 VGA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또다른 생태계가 자라날 조짐이 생겨났다.

 

대규모 단순 병렬 연산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다.메모리는 각종 학습 자료를 빠르게 공급하는 고속도로와 대형 트럭과 같은 역할이었고, 이렇게 들어온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부품 역시 수요가 높아지게 된다. 데이터가 들어오는 속도가 빠르더라도, 처리 속도가 느리다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팹리스 중 하나인 엔비디아와 같은 GPU 제조사들에게도 큰 기회가 열렸다...아이러니하게도 현대 AI는 소수의 유능한 코어를 통해서가 아닌, 다수의 무식한 연산을 통해 작동하는 형태로 발전했다.기계학습은 인공 신경망을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여기에는 분기 연산보다는 단순한 숫자열의 곱과 합 등의 연산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CUDA는 마치 개발자들에게 자신이 CPU 위에서 C언어 등에서 개발하는 듯한 익숙한 느낌으로 GPU 기반의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현재 머신 러닝에서 많이 쓰이는 프로그램인 텐서플로가 원래는 엔비디아의 GPU가 아니라 자체 TPU를 내부에서 사용하기 위한 프레임워크롤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계획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구글은 TPU를 만들고 나서 이 칩의 성능과 전력 소모량, 아키텍처까지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이 칩에 사용할 사용자 라이브러리인 텐서플로를 오픈소스로 전환했고, 전 세계 개발자들이 자신의 알고리즘을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실제 구글이 사용했던 학습 데이터 세트도 공개하고 있다.

고성능 라이브러리, 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CPU, GPU, TPU 등 어떤 하드웨어를 기준으로 개발하건 간에 코드를 재작성할 필요가 거의 없는 수준의 재사용성을 제공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AI 알고리즘이 GPU에 맞는지, CPU에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하드웨어만 바꾼 채 자신의 기존 텐서플로를 쓰면 된다.

흩어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책방을 찾았다.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학교 교정의 구석에 앉아 집중하여 읽었다.

현재에 집중하며, 미래를 열어가는 자세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심정을 털어놓고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마음으로 추스리고 갈무리하였다.

이렇게 하길 잘 했다.

 

항상 '왜?'라는 생각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라.

타협하고 후퇴하지 마라.

시선은 늘 앞으로, 미래로.

 

야구나 인생이나, 한시도 멈춰 있는 순간이 없다.

순간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본은 똑 같다...

그래서 인생에 나타나는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인생이란 결국 순간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내일 마주치는 순간들, 매 순간에 한 결정과 행동이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된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오는 것이었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결국 어떤 한계를 마주하든 돌파하는 것은 '의식'의 문제다...

어제의 한계가 열 개였다면 오늘의 한계는 스무 개인 셈이다.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그 틈에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약점도 사라진다. 살길이 생겨나고, 스스로에 대한 동기가 생겨난다.

 

나는 남들의 위로에 위로받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이다.

동정은 한 번뿐이지,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하던 사람도 한 번을 넘어 두 번, 세 번 실패하면 비난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의 위로는 진심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거기에 도취되어서는 더욱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남에게 위로받길 바라고 동정을 원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남에게 기대봐야 변할 수 없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다...

내가 발을 디뎌야 걸어갈 길이 생기고, 나라는 존재가 생기고, 나아갈 곳이 생긴다.

내가 강해져야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골똘히 고민해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내고,

긍정으로 바꿔가는 게 베스트다.

 

나는 '어차피' 속에서도 '혹시'라는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상상하고 그것들을 '반드시'로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 그게 내가 여태껏 해온 일이었다.

 

이긴 것은 지나간 것,

대비해야 하는 것은 내일의 것

 

노는 와중에도 내 앞의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만약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다면 그 즉시 일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냥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이겨내지 않나 싶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금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뒤에 가서는 인생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꾸는 것이 내 인생이었다.

 

지금은 어느 시기인가, 이 시기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그 다음은 또 어떤 시기가 올 것인가,

의식을 갖고 계속 주의를 기울이면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상식 속에 있는 사람은 남하고 아무리 경쟁해 봐야 이길 수 없다.

이미 나와 있는 답을 갖고 하는 승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건 백날 해도 승부수가 되지 못한다.

상식을 쓰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더 얻을 게 없다.

 

무엇에서든 비상식적인 승부수를 던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그 비상식은 곧 상식이 된다.

 

계속 생각하며 걷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다.

'와, 이렇게 어려울 수 있나' 싶은 문제도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온다.

어려워질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해결 능력이라는 게 육성되어 간다.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안되는 것은 세상에 없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 하는 것이고, 능력이 없으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 해서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그만둘 이유가 없다.

일본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아버지가 죽은 병사가 갖고 있었을 인간다움의 증거와 씨름하는 흔적에 마음을 빼앗겼다.

거기 드러난 정서는 최고의 반전 시로 꼽히는 윌프레드 오언의 [이상한 만남]의 정서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람한 팔뚝과 떡 벌어진 체격으로 적군의 신체적 힘을 우리의 신체적 힘으로 찍어 누르는 젊고 멋진 남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기계 뒤에서 싸운다. 젊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것은 검투사들의 결투가 아니다.

기관총을 쏘는 허약한 사람들이 맨손의 슈퍼맨보다 더 치명적이다.

우리는 맨 몸 격투의 흥분과 희열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가 파괴를 위해 고안해낸 가장 지독한 장비를 갖고 싸운다.

뜨거운 납덩이나 차가운 쇠와 충돌하면 사람의 몸은 종이장과 같다."

 

일본 사람들은 시끄럽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에서 쾌락을 찾는다.

허황된 꿈이라도 그 꿈을 놓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로맨티스트들이다.

'현실'은 추하고 형편없고 누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왜 그런 것들이 쾌락을 즐기는데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만사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가장 노골적인 모순 앞에서도 야단스럽게 굴지 말도록 사회화되어왔다면,

엄마의 포옹같은 것이 간혹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돈을 내고 하는 포옹은 포옹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돈을 낼 수도 있다.

포옹만큼 관능적이지 않더라도 이런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일본에서의 생활이 그토록 쾌적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본인들의 책임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서양에서는 가치있는 일이라면 잘해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본에서는 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 잘해내야 한다...

누군가에게 차 한잔과 디저트를 대접하면 진수성찬을 대접했다는 감사를 받는다.

반대로 성대한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갔는데 너무 차린게 없어서 부끄럽다는 인사를 받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형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이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형식에 자발적인 감성이 가득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모두가 그런 기대에 부응해 행동하고 있고, 그게 또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가장 공허하고 형식적인 행위들이 오히려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모순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런 태도에는

치명적인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된다.

그런 태도가 일본을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원천일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또한 일본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을 착취하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여기고, 어쩌면 가치 없는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을 대중이 내면화하는 것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런 유동적 가치관의 영향이 사회 지도층 레벨로 가면,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그 안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본분을 다해가며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일본인들이 이런 의식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피해자 의식이다....

수백만의 일본 국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 짓고는 "시카타가 나이(할 수 없군)"라고 한마디 하고는 말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1850년 그의 추악하고도 매우 영향력 있던 [음악 속의 유대주의]라는 소논문에서,

위대한 예술은 단일한 문화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사람들만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지 시대에 대한 가장 깊은 고찰은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1914년 걸작 [마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구조에 대해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더 힘센 존재를 달래고 조종하는 기술은, 유치원 교실에서 시작해서 정부나 기업의 꼭대기에 오르는 데까지,

일본에서 성공하는 데 있어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힘 있는 자리에서 일본 사람을 상대해본 외국인이라면

일본인들이 얼마나 상대방의 기분을 능숙하게 맞춰주는지 경험해봤을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어머니라면 누구라도 아이가 이러한 유혹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아기 때부터

본능적으로 가르친다.

 

이들에게 일본은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아사아 사람들 전체에게 커다란 고통을 일으킨 원인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나라다.

이들은 일본의 권력층이 우익의 과거사 왜곡을 끊임없이 묵인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중국 공산당도 일본 제국 못지않게 손에 피를 많이 묻혔지만,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울분을 사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2)그것은 대부분 일본의 잘못이다.

3)일본은 그런 일일 절대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이고,

4)그 보장을 위해 되돌릴 수 없는 제도적인 조치를 취했으니 우리를 믿어도 좋다.

 

가계의 저축을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강력하게 몰아가고,

금융기관에는 정부가 발행한 금융상품(채권)을 사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카럴 판볼페런이 '현실의 관리'라고 이름붙인 현상이었다.

현실의 관리란 여러 제도와 관행이 합쳐져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모순을 알아차리지 않기로 의도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한 듯 보이는데서 종종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도 퇴근하지 않았다.

회사의 불은 그대로 켜져 있고 평소라면 모두 저녁 9시가지, 바쁜 때라면 자정이나 그 너머까지 일한다.

밤 10시가 넘으면 빌딩의 작은 옆문으로 사람들의 물결이 빠져나간다.

 

사상과 정보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힘이 작용했다.

세상이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한 현실을 부정하는 내용을 쓰거나 말한다고 해서 잡혀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결국은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뉴스의 배포는 기자클럽을 콩해 통제되었다.

기자클럽은 정치인, 정부 부터, 경찰과 같은 주요 정보원을 취재하는 기자들로 구성된 카르텔이다....

주요 일간지에 실리는 중대한 경제, 정치 사건에 대한 기사들이 복사기로 복사한 것처럼 다 똑같은 것은 그 때문이다.

미디어가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인에 대해 갑자기 하이에나 떼로 돌변해서 달려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들은 해당 인물을 모두의 먹잇감으로 삼아도 된다는 신호가 올때까지 참고 기다린다.

검찰청에 출입하는 기자 클럽에 검찰이 정보를 흘리는 것이 보통 그 신호다.

 

제정신을 얼마쯤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순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점점 더 필수 덕목이 되어가는 나라는 더 이상 일본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적나라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 문화가 완벽하게 구현한 악몽과도 같은 시각적 묘사는

전 세계 모든 사람, 특히 젊은이들에게 선명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를 통해 또한 일본이 얼마나 변화해오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산초메노유히], 이 드라마를 보노라면 일본 특유의 적나라한 감정 표현을 통해 등장 인물들이 서로에게 쏟는 애정과

사랑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심각하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재난이 닥치면 그간 부패해온 정치체제에 잠깐일지라도 가차없는 조명을 비추어 그 민낯이 드러난다.

체르노빌 원전 사건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재난 상황으로 인해 지도층의 담합과 부정행위와

무능함이 대중에게 그대로 드러나면, 그동안 공익에 들어가는 세금으로 자신의 살을 찌우던 무리가 놀라 달아나기 마련이다. 더러운 아파트에 갑자기 불이 켜지면 바퀴벌레 무리가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나는 것과 같다.

 

판볼페런 [일본 권력의 수수께끼]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마쿠라노소시]와 [겐지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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