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반드시 세번 이상 읽기를 권한다.

 

사회라는 시스템에 숨겨진 비밀스런 현실이다.

슬금슬금 무언가를 엮어가는 문화적 이면

-당신의 인생에 맹목적 순종과 체념적 평범함과 유기된 꿈이라는 형을 언도하는 사회학적 음모- 이것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노예제도가 존재한다.

오늘날의 노예제도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각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철창을 대신하여 자발적 채무와 평생의 노역이 우리를 가두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으로,

주 5일의 근로로 그 값이 치러지고, 인생이 황혼으로 스러져가기 시작할 때에야 자유가 주어지는 보이지 않는 각본이다.

 

모든 사람이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당신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그랬듯이 '빨간 알약'을 받아들인다면(즉, 아픈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위한 출구를 보여줄 수 있다.

 

[언스크립티드]는 당신이 한번 해볼 무언가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내야 할 무언가다.

 

일상화된 부산함이 나의 혼을 빼놓는 동안 거리를 흐르던 분주한 사람들의 세찬 흐름은 점점 자욱한 안개의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목적과 꿈과 야망을 품은 개성 있는 개인들, 누군가의 아들, 딸, 남편인 사람들, 그들이 모두 갑자기 논능으로 휘몰리는 단 하나의 유기체이기라도 한 양 흐릿한 단일 집합체로 변해버렸다.

 

파란 알약을 삼키고 평범과 무지의 삶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빨간 알약을 삼키고 자유롭지만 진실을 향해 번뜩 깨어나느냐,

그 영화의 어두은 디스토피아 안에서, <매트릭스>는 인간 종족에게 설정된 운영체계, 즉 기계종족에게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가상현실을 대변한다.

 

"도그마적 덫에 걸리지마십시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대중은 경제적 목적(도축, 털 깍기, 젖 짜기)을 위해 조직화되었다.

떼거리와 함께 무리지어 다니다 보면 떼거리를 위해 계획된 예측 가능한 결과만을 얻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압제는 희생자들이 부지중에 스스로에게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완벽한 노예는, 자기도 모르게 기쁨에 겨워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킨 자들이다.

 

각본화된 운영체계는 스스로를 코드화한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프로그램화된 모든 소프웨어가 그렇듯이, 각본화된 운영체계 역시 목적을 갖는다.

계율을 지키도록 길들여진 모범 시민으로 당신을 제조해내는 것이 것이 그 목적이다.

당신의 방어무기는 지식이다.

 

노암 촘스키는 말했다.

"사람들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상태에 마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용 가능한 의견의 스펙트럼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도 그 스펙트럼 안에서는 활발한 논쟁이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각본의 대변자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 대변자란 언론이다.

 

마치 스마트폰과의 관계가 진짜이고, 진짜 친구들과의 진짜 대화가 스마트폰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 같다.

물론 이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대화는 채 1분도 유지되지 않고,

모든 고개는 다시 스마트폰을 향해 숙여지고, 손가락들은 자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가면을 쓴 자아가 진정한 자아보다 더 중요해진다.

 

소셜 미디어는 더욱 위험하다.

소셜 미디어 도구들-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을 이용하면 우리는 손쉽게 자신의 모조품을 빚어낼 수 있다.

우리는 몸을 숨기고 무대 위에 유령을 세우고 있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들만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꽁공 숨김으로써 우리는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가짜 자아는 당신이 당신의 삶을 건설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자괴감 속에서 구경하게 만든다.

 

3주후면 잊혀질 스포츠게임을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그 사람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의미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에서 선전을 담당하는 장관의 자리에 앉았던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쟁이로,

새빨간 거짓말일수록 더 많이 반복해야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복은 '합의 오류'를 낳는다.

즉,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 어떤 입장 혹은 어떤 이념을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시간팔이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

 

당신의 죽음 시계가 당신의 팔뚝에 찍혀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당신의 죽음 시계는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투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외롭고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을 위해 지불하는 값은 아무리 높아도 비싼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돈이 없어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강한 직업윤리를 갖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비효과적이고, 낡은 제도 아래서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것이다.

 

'열받으라'는 속된 말이 암시하듯, 각본탈출은 꾸밈없는 삶과 자유에 대한 것이다.

삶이란 당신의 존재를 큐레이팅하면서 당신의 시간과 생각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것이다.

- 일로부터의 자유

- 결핍과 경제적 곤궁으로부터의 자유

- 하이퍼 리얼리티의 영향으로부터의 자유

- 헛된 희망과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

 

대오각성은 뇌리에 영원히 새겨지고 망각되는 법이 거의 없다.

자신이 대오각성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아마도 당신은 아직 그 사건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봐요, 저 개 어디 잘못된 거 아니에요?

직원이 대답했다. "아, 못 위에 드러누워서 아프다고 저러는 거예요."

황당해하며 손님이 묻는다.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는 거죠?"

직원이 대꾸한다. "아직 덜 아픈거죠!"

 

시스템이 얼마나 거지같은지 경험해보고 나서야 그것을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불이 뜨겁다는 경고로는 충분치 않다. 불에 데어봐야 불이 뜨거운 걸 안다.

 

문제는 평범의 안락함이다.

그 멋진 차, 월급날이면 꼬박고박 들어오는 보수, 주말의 미식축구 게임을 관전하는 그 재미,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간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당신은 결정해야만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당신의 꿈? 아니면 양키즈의 홈 10연전 중 세번째 게임을 관전하는 것? 당신의 장기적 행복?

 

죽은 꿈의 드넓은 공동묘지는 적당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더 많은 좌절을 만든다.

그것은 언론, 카지노, 주정부의 복권 금고도 마찬가지다.

이 바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꿈의 추구 자체가 가치있는 꿈이라는 사실이다.

꿈은 과정이다.

실패와 시도와 시련, 꿈을 좇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시도와 시련을 통해 우리는 자기 성장, 자기 인식, 자기 발견을 이룩한다. 꿈을 판다는 것은 당신의 꿈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꿈이 살아나면 당신이 살아난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검증할 자유가 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집단적 사고를 통해 우리의 신념을 확인받으려 든다.

그리고 그결과, 우리의 신념은 비판을 비켜나가고 세월을 초월하여 존재하면서 같은 결과를 거듭거듭 초래한다.

 

오래된 신념은 반드시 의혹의 도마에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콩깍지를 제거해야 한다.

의심의 눈으로 각본화된 오래된 생가과 사고 과정들을 리셋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바꾸어 새로운 행동을 하라.

 

성공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다.

지름길의 환성을 떨쳐내고, 과정을 중시하고, 해야할 일을 하라...

과정 중시 원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반복이다.

위대함은 많은 작은 것들을 매일 실천하는 데 있다.

 

당신의 목표가 천만 달러라면, 새로운 목표는 천만 달러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려면 돈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야 한다.

 

와이즈맨은 불운한 사람들이 일상적 틀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직업 행로를 걷는다.

반면에 운이 좋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다양성을 불어 넣는다.

행운을 바라는가? 변화를 주고, 색다른 것을 하고, 바퀴를 돌려라.

 

헛질문쟁이! 조언을 열심히 구하면서 정작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우리의 확신은 갈등적 증거를 만났을 때 오히려 더욱 강회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벌어자는 정치적 논쟁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차트, 그래프,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되었든, 자기 옳음은 변화 거부와 함게 손잡고 다닌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부자들이 있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빈자들도 있다.

부자들만이 탐욕이나 사악함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라는 종족 자체가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다.

문제는 당신의 눈에는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는 점이다....

당신은 도적적이고 윤리적인 동시에 부자일 수 있다.

 

진짜 변화는 정체성과 자기로부터 온다.

책이나 유튜브의 반복시청을 통해 시동이 걸리는 외부 동기부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당신은 먼저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따라온다.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고 그것이 되어라. 그러면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새로운 정체성이 '나는 작가다'라면 매일 몇 문단씩 글을 쓰라.

이전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말고 노력 위에 노력을 쌓아가라.

그렇게 노력의 상승곡선을 그려가라...일단 피드백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축하한다.!

모든 것이 쉬워지고, 졿은 습관이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도 변화를 눈치채게 될 것이다.

새 정체성을 증명해 보임에 잇어서 매일 1퍼센트의 전진을 이룩하면서 1년을 보내고 나면 당신은 새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며 과거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결과는 위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헌신에 점화 플러그가 있다면 그것은 목적과 의미일 것이다.

목적과 의미는 역경과 비난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목표와 달성이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의미와 목적은 무대공포증을 떨치고 연단에 올라 말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성공의 비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변화의 고통을 회피하면 당신은 결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어렴풋하게라도 알지 못하고서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삶에서 아무런 목적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한다

 

가장 위대한 행복의 비밀은 자율이다.

자유, 자기 인생에 대한 통제감을 가능케 할 능력,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능력, 이동성,

스스로 결정하고 승인하는 능력, 은행 앞에서 찾아왔던 나의 각본탈출 순간을 떠올려 보라.

 

잘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주는 요인 중 우리가 지금까지 고려해 온 그 어떤 요소도

자기 인생에 대한 강력한 통제감보다 더 확실한 행복감을 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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