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법정스님

연말에 편지를 몇 통 받았다.
평소에는 서로가 잊은 채 소원히 지내다가도,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 이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은 해마다 카드를 보내주는데,
올해도 거르지 않고 '더 늙기 전에 스님 만나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소'라고 회포를 전했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 아닌가 싶다.

한 친구가 편지에 불쑥, 그곳 산중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선문답처럼 물었다.
이 물음을 받고 나는 문득 옛 은자의 시가 떠올라,
앞뒤 인사말 줄이고 다음의 시를 써서 회신으로 띄웠다.

山中何所有 (산중하소유)
嶺上多白雲 (영상다백운)
只可自怡悅 (지가자이열)
不堪持贈君 (불감지증군)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산마루에 떠도는 구름
다만 스스로 즐길 뿐
그대에게 보내줄 수 없네

옛날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한 은자에게,
그 산중에 무엇이 있기에 거기 머물러 세상에 나오지 않는가라고 친지가 물었다.
은자는 그 친지에게 답하기를, 자신의 거처에는 이렇다할 아무 것도 없지만
산마루에 떠도는 무심한 구름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런 경지는 혼자서나 조촐히 즐길 뿐
그대에게는 보내줄 수 없노라고 말한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그 은자의 욕심을 떠나 담담하고 소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구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보태겠다.
고려 말 태고 보우 스님의 문집에 구름 덮인 산을 노래한 '운산음雲山吟'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 위에 흰구름은 희고
산 속에 시냇물은 흘러간다.
이 가운데서 내가 살고자 했더니
흰구름이 나를 위해 산모퉁이를 열어 놓았네
흰구름 속에 누워 있으니
청산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걱정 근심 다 부려 놓았구려' 하네
나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산이여, 그대는 내가 온 연유를 아는가
내 평생 잠이 모자라
이 물과 바위로 잠자리 삼았노라
청산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네
왜 빨리 돌아와 내 벗이 되지 않았는가
그대 푸른 산 사랑하거든
덩굴풀 속에서 편히 쉬게나

옛사람들은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이런 운치와 풍류를 지니고 넉넉하게 살 줄을 알았다.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알고서 그 품에 안겨 동화될 수 있었다.
세상살이에 닳아지고 지치게 되면
산에 들어가 숲속에 쉬면서 자기 자신의 자취를 되돌아보곤 했다.

어느새 묵은 해가 기울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면,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한 해가 더 보태지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한 해가 줄어든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보태지는 쪽인가, 줄어드는 쪽인가.
그러나 보태지고 줄어드는 일에 상관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육신의 나이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최대한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세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그 자신답게 살아간다.

삶은 끝없는 변화이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과 세계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 수시로 변해가면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한숨 한숨 들이쉬고 내쉬는 생명의 숨결도 흐르는 강물처럼
낡은 것과 새 것이 잇따르고 있다. 이게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의 흐름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가 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목표도 지향도 없이 어디론지 끝없이 표류하고 만다.
덧없는 세월 속에서 의미 없는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우리 인간사가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우리 시대에 이르러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은 그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고 있다.
당당한 인간으로서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채
인간들 스스로가 그 설자리를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의 고리가 튼튼하면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개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를 물을 것 없이 조화와 균형이 곧 건강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는 그 조화와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의 가슴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삭막해서 생명의 싹이 움틀 여지가 없다는 소리다.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은 모든 것의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랑도, 다정한 눈빛도, 정겨운 음성도 가슴에서 싹이 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그 중심의 기능이 마비된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오늘의 문명은 머리만을 믿고, 그 머리의 회전만을 과신한 나머지 가슴을 잃어가고 있다.
중심에서 벗어나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가슴이 식어버린 문명은 그 자체가 크게 병든 것이다.
비인간적인 이런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우리 모두가 저마다 따뜻한 가슴을 되찾는 길 밖에 없다.
물질의 더미에 한눈 파느라고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따뜻하게 가꾸어 삶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따뜻한 가슴만이 우리를 사람의 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
따뜻한 가슴은 어디서 오는가.
따뜻한 가슴은 저절로 움트지 않는다.
이웃과 정다운 관계를 통해서, 사물과의 조화로운 접촉을 통해서 가슴이 따뜻해진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법정스님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더 풍요로워진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삶을 밝게 비춘다고 한다.
 

 

 

가끔씩 그대마음 흔들릴때는│이외수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지는 날이 없으랴
온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리라
가끔씩 그대마음 흔들릴때는
침묵으로 침묵으로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그루 나무를 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법정스님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

마르틴 루버가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다.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고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내어 읽어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
우리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지나 왔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 받았는지....

자식들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였는지,
혹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였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기계적인 무표정한 인간으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어 버린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어야 할 것인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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