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쉽게 믿고 그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이를 탐구하는 자세가 있다면 헛된 것에 현혹됨이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했듯 "비범한 주장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
세이건은 아마 유명한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스에게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비범한 주장에 필요한 증거의 무게는 그 주장의 이상함에 비례해야 한다."
혹시 몬티 파이선의 <브라이언의 일생>을 본 적이 있는가?
영웅 브라이언은 불행히도 메시아로 오해받는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군중에게서 미친 듯 도망치다가 그만 호리병박을 떨어뜨리고 샌들 한 짝을 잃어버린다.
그러자 숭배자들이 두 라이벌 집단으로 갈리는 '종파 분립'이 일어난다.
한 집단은 신성한 샌들을 추종하고, 다른 집단은 신성한 호리병박을 추종한다.
기회가 되면 꼭 관람해보라. 엄청 재미있는 데다 종교가 시작되는 방식에 대한 완벽한 풍자이다.
특정 종교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종교를 다음 세대에 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자, 이렇게 도덕적 가치관은 '공중에' 감도는 것이고, 그것은 100년 심지어 10년 이면 바뀐다.
하지만 도덕적 가치관은 우리의 진화적 과거 외에 실제로 어디에서 올까? 그리고 왜 바뀔까?
변화의 일부는 카페와 술집, 그리고 저녁 식탁에서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에서 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운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본받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소설이나 신문 사서을 읽고, 팟 캐스트나 유튜브 장면을 듣고 생각을 바꾼다.
다윈은 성공적인 돌연변이는 거의 항상 작은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진화에 중요한 것은 작은 돌연변이이다.
다윈은 위대한 점은 인간 선택자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자연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수억 년 동안 해왔다.
어떤 돌연변이 유전자는 동물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유전자는 개체군 내에서 출현 빈도가 높아진다.
다른 돌연변이 유전자는 동물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걸 더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개체군 내에서 빈도가 점점 줄어 들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DNA는 몸의 발생을 감독하고, DNA는 다시 수세대에 걸쳐 자연선택의 '감독'을 받는다.
따라서 자연선택은 간접적으로 몸의 발생을 감독하는 셈이다.
DNA는 컴퓨터 코드처럼 디지털 코드이다. 그리고 DNA,는 부모의 디지털 정보를 자식과 그 뒤의 수많은 세대로 전달한다. 하지만 전달되는 그 정보는 청사진이 아니다. 그 정보는 어떤 의미로든 아기의 지도가 아니다. 부모의 몸을 스캔한 것이 아니다. 유전학 실험실에서 그 정보를 읽을 수 있지만 아기를 출력할 수는 없다. 인간의 DNA 정보를 아기로 바꾸는 방법은 DNA를 여성의 몸 안에 넣는 것 뿐이다.
DNA가 아기의 청사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기를 만듣는 방법에 관한 지시 세트로, 청사진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오히려 케이크를 만드는 레시피와 비슷하다.
우리가 모르는 틈새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걸 신으로 메우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대마다 성가시게도 과학이 나타나 그것을 메우곤 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그중 가장 큰 틈새를 메웠다.
그리고 우리는 남아 있는 틈새도 결국 과학이 메울 것이라고 생각할 용기를 내야 한다.
과학적 진실은 두렵고, 그것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 길릴레오의 박해자들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단적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여러분은 두렵고 어리둥절한 과학의 결론을 마주할 용기를 내야한다.
그리고 그런 용기를 낼 때 그 모든 경이와 아름다움을 경험할 기회가 온다.
확실해 보이는 것들은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떠나 야생의 진실을 포용할 용기가 필요하다.
신이 우리를 창조한 것보다 우리가 신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러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뗏목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지적 용기다.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심사숙고하고 이렇게 말할 용기,
"설마 그럴리가. 그래도 틀릴 셈치고 그 가능성을 조사해 보자."
진정한 설명이 아주 간단하다는 사실은 그것을 끈질기게 조사해 자세히 알아내는 데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연 선택이 그 모든 똑똑한 사람들을 비켜간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그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힘든 일을 하기에는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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