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산업을 대표하는 용어였다면 이제 소비라는 용어도 하나의 축을 이룬다.

생산이 소비를 능가하면서 "계획된 진부화"라는 개념은 필요보다는 유행을 쫒는 소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바꾸는 스마트폰을 보면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닌 유행을 쫒아서 갈아타는 소비를 보여준다.

 

1840년에는 크리놀린(스커트를 부풀게 하기 위한 버팀대)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철사나 고래뼈로 만든 커다란 새장 모양의 틀을 스커트 안에 받쳐 입었다. 크리놀린 스타일 드레스는 사실 매우 위험했다. 해안가에 서 있다가 강한 바람에 스커트가 우산 같은 구실을 해서 몸이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프랑스 여배우는 무대에서 가스등에 기대고 있다가 스커트에 불이 붙어 타죽기도 했다. 그런 크리놀린 황금시대는 1857~1866년까지였고, 1868년부터는 버슬(엉덩이나 허리의 등 쪽이 부풀어 보이는 복장) 스타일이 나타났다. 방석같이 생긴 천 뭉치를 엉덩이에 대어 여성의 신체 굴곡을 과장해서 드러내고자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이번에는 크리놀린 대신 코르셋이 역할을 했다.

 

주민들은 자기 생활은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하면서도 창문 커튼 사이로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끊임없이 관찰한다. 질투심에 가득 차 날카로운 눈으로 아래위를 샅샅이 훑으며 남의 집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용인되는 한편, 그것이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갈등과 모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다니엘은 이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했다. 한쪽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연결된 금욕과 통제의 가치가 고양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쾌락주의와 즉각적인 만족에 근거를 둔 소비주의적인 윤리가 동시에 발전하면서 갈등과 모순이 나타날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역사학자 피터 스턴스는 서양의 역사에서도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를 증명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의 방대한 연구는 오히려 그를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서양의 역사에서 노인에 대해 "추하고,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따라서 눈엎에서 치워버려야 한다"는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빈곤을 수바하지 않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든느 것이 아니라 특권 계급, 즉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이 곧 성장을 생산해낸다는 통찰이다. 결국 성장 사회의 지속은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소비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학습되며 실행되는 것이다.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를 겪게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 사람들은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며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희망을 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1920년대 미국사회는 대량 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신용, 유행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활양식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 바로 '계획된 진부화'였다. '진부화'라는 개념은 이미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 계급론>에서 여러 차례 사용한 바 있는데, 이 개념이 1920년대 미국에서 가시회된 것이다. 대량생산 시스템 속에서 생산이 계속되려면 제품의 수명이 짧아져야 하고 멀쩡한 제품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에게 그것이 낡고 지루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야 했다. 계획된 진부화라는 것은 곧 새로운 유행의 창출이었다. 이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광고업자와 그들을 고용한 기업의 사명이 된다, 스투어트 유언은 광고업자나 기업가 엘리트들이 노동자들을 "소비를 위한 욕망"의 세계로 끌고 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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