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슬픔과 기쁨이 책 제목이지만 거리감은 있어 보인다.

일은 사람을 몰두하게 하기도 하지만, 고뇌의 대상이기도 하다.

부족함이 없어 아무것도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한가함과 무료함에 죽고 말 것이다.

일은 우리를 지탱하게 살아가게 한다. 그러나 일에 파묻혀 산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옥이 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프래임 안에 상자를 내리는 부두 노동자, 광장에서 거래를 하는 상인, 오븐 앞에서 빵 굽는 사람, 창가에서 바느질 하는 여자, 궁에 모여 장관들을 다 보여주지 않던가.

이 포괄적인 장면은 일이 인간의 벌집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는 자리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어둠 속에서 물류 단지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어린 시절 한밤중에 깨어나 문밖의 발소리나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과 비슷하다. 그때 우리는 집안의  낮의 질서가 밤에 이루어지는 그런 노동들에 의해 지탱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이 의미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노동자들은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라는 오래된 임무에 전념하고 있다.

이것이 주로 주변적인 만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소비자 경제에서는 공교롭게도 어릿광대짓과 쉽게 혼동될 수 있는 일련의 행동으로 나타날 뿐이다.

 

의미있는 존재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때때로 우리는 인간의 여러 기능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적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몇 가지 소박한 욕구가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지원과 사랑에 대한 꾸준하고 강한 갈망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완전히 마무리된 뒤 미술관에 걸린 반들거리는 그림들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림 한 점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엄청나게 다양하고 지저분한 장비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테일러는 5년 전 여자 친구의 죽음 뒤에 시골길을 걸어다니다가 이 나무를 만났다.

발을 멈추고 나무 옆을 달리는 담장에 기대어 쉬다가,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무의 뭔가각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외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일을 제대로만 해내면 그의 인생은 막연하기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받고, 그의 곤경들도 승화될 것 같았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공감하고 상상하려고 노력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 그대로 미리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측도 할 수 없는 자연환경에 끌렸다.

그가 헌신적으로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자아를 옆으로 밀어놓고, 우리와는 다른 것, 우리를 넘어선 모든 것을 인식하려는 시도다.

 

사실 여러 해의 노동의 결과를 사방의 벽에 걸어 놓고 한눈에 훓어볼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우리의 모든 지능과 감수성을 한 장소에 모아둘 기회는 더군다나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물리적 상관물을 찾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집단적인 기획물 속에 희석되고, 그러다 보면 작년에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진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디로 간 것이고, 도대체 무엇이 된 것인지 궁금해하다가 결국퇴직 기념 파티같은 분위기에 젖어 우리의 사라진 에너지들을 바라보게 된다.

 

사무실에서 하루가 시작되면 풀잎에 막처럼 덮인 이슬이 증발하듯이 노스텔지어가 말라버린다.

이제 인생은 신비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감동적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우울하지 않다.

현실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무대다.

 

그는 아무 할 일 없이 방에 혼자 있어본 지 100년이 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권태가 연민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민을 느낄구석이라고는 정말이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여기던 사람에게.

 

실제로 사회가 발전할수록 파괴된 것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는 것 같아요.

거기에서 그들 자신의 성취의 덧없음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리고 구원을 얻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폐허는 권력과 지위, 소란과 명성을 향한 우리의 욕망과 정면으로 충돌하지요.

폐허는 있는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부를 추구하는 우리의 풍선같은 어리석음에 구멍을 냅니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건들과 난잡하게 뒤섞이도록 해주는 것에, 파리로 엔진 오일을 팔러가는 동안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의 사업의 몰락을 아름다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에, 그것을 단순한 지적 명제로 여기게 해주는 것에 감사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근시안적으로 행동한다.

그 안에 존재의 순수한 에너지가 들어 있다.

밤이 올때쯤이면 죽을 것이라는 커다란 사실을 외면한 채, 서둘러 칠한 붓이 남긴 페인트 한 방울을 피해 창턱을 계속 열심히 가로지르려는 나방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엾은 불안을 상대벅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 놓아 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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