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하나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자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명확히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 바로 자기만의 삶을 사는 방식이여야 한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

 

앎이 늘어갈수록 내 자유가 공동체의 자유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도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철학적인 시선은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이것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지성적 활동이기 때문에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여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한다.

세상에 다른 흐름을 제공하기도 하고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이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이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튼튼해진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빛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진실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인 높이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 사람을 산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종속적 삶을 산다.

자신에게 또 물어보라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한다.

 

인간의 동선,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파악한 다음에 언어의 수사적 기범을 사용해 감동을 생산해내고, 그 감동을 매개로 그것을 알게 해주려는 시도가 바로 문학이다.

사건들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 하면 사학이 된다.

세계를 관념으로 포착하여 그것을 색으로 표현하면 미술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음악이 된다.

형상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알려주려는 시도가 바로 예술이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시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서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한 체계다.

하나의 철학이 생산될 때에는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이 함께 붙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수입될 때에는 시대적 매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들어온다.

 

철학적 높이에 도달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일이지 관념으로 포착해낸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지성을 발휘하는 단계로 올라서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 철학의 활동이지 이미 훈련된 결과들을 슴과옥조처럼 품어 안는 것이 아니다.

 

철학하는 일이란 남이 이미 읽어낸 세계의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읽을 줄 아는 힘을 갖는 일이다.

 

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자신이 사고자 하는 방향과 바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굼을 대신 꾸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없다.

꿈은 나만의 고유한 동력에서 생긴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대개 생각의 결과들을 믿음의 체계로 바꿔서 그것들을 신봉하면서 산다.

이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만 세상과 접촉한다. 이때 인간이 상실하는 가장 큰 자질이 바로 '예민함'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자신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있는 힘 위에 세운다.

정해진 어떤 이론이나 가치관, 어떤 질서에도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자기이게만 하는 것 위에 서 있을 때, 이 사람을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이때 발휘되는 그 사람만의 힘이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관찰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은 관찰을 하고, 호기심이 작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불안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이것을 해소하여 편안함으로 바꾸려 한다.

독립적 주체는 불안을 편안함으로 바구려 하지 않고 불안 그대로 감당한다. 그대로 품어버린다.

우리가 쉽게 믿음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편안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믿고, 모든 문제를 그 믿음의 기준으로 해석하면 항상 명료하다. 믿음을 가지면 편안하다.

하지만 믿고 편안하면, 인간은 딱 거기까지다. 믿음의 내용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탁월한 인간은 항상 '다음'이나 '너머'를 꿈꾼다.

우리가 '독립'을 강조하는 이유도 '독립'으로만 '다음'이나 '너머'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이나 '너머'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이 힘들어서 편안함을 선택하면, 절대로 '다음'이나 '너머'를 경험할 수 없다.

이때 불안을 감당하면서 무엇인가를 감행하는 것이 '용기'다.

탁월한 높이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불안을 자초하거나 감당한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쉽게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

 

철학적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그의 웅변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철학적 사고는 특권과 기성 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차분한 균형 상태를 즐기기보다는 불안한 불균형을 과감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 불균형을 생산해야 한다.

 

정해진 믿음에 갇힌 사람은 평생 낡은 세상 한 귀퉁이를 잡으려 노력하거나 이미 낡아 빠진 것과 옳고 그름을 다투느라 정력을 소진한다.

하지만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개방적 자아는 낡은 것과 사우는 데 정력을 쓰지 않고 새로운 것을 여는 일에 몰두한다.

어느 쪽이 자유이고 참된 삶인지는 이미 명확하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진보가 어렵다.

겨쟁 구도속으로 들어가 있느 한, 우리는 경쟁이 벌어지는 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새로움, 고유함, 선도력은 시도되지 못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경쟁 구도 속에서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행복하지 않고 피곤할 따름이다.

경쟁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이유다. 분명 '자약'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감이 항상 자신에게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자약'하면 이미 존재하는 경쟁의 틀 속으로 들어가려고 급급해 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만 집중한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삶에 집중한다.

 

분명한 것은 종교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철학은 회의와 반성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이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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