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가슴에 와닿는 글을 읽었다.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마음을 스쳐가는 여러 흔적들을 글로 정리할 때 그 감정은 오래 유지되고 추억이 된다.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방법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삶에서 글이 태어나고 글은 삶을 어루만진다.
좌우봉원: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
일상이 모든 것이 배움의 원천
"잘 쓰는 것보다 잘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몸과 마음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두려움이 있다.
작가는 자유로운 직업이다.
삶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어떤 원칙도 형식도 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다.
자기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만이 꾸준히 책을 펴낼 수 있다.
용병도 작가도 긴 생명력을 지니려면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벽을 넘어야 한다.
본디 작가는 글의 소재와 문장을 모으는 사람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정작 손을 뻗어서 잡아본 적 없는 글감을, 실제로 종이에 써본 적 없는 글귀를 낚아채 자신만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둬야 한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 법이다.
주변 사물과 현상을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일수록 일상에서 글감을 수월하게 건져 올린다.
우린 종종 지난날을 후회하며 탄식한다.
회한에 젖고 또 젖으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킨다.
회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간다.
"현재의 나를 알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사정은 다르지만 나 역시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추억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뻗어가며 기억의 고삐를 틀어쥐고 글을 쓴다.
존중받고 싶다면 당연히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글의 품격은 문장의 '깊이'뿐 아니라 문장의 '개방성'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유한 리듬을 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박자로 적절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강기? 괜찮아. 몸져눕지 않는 한 걸어서 올라가고 싶어. 계단을 오르는 게 내 일이야."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산다는 건 반복의 연속이다.
도돌이표처럼 거듭되는 일상을,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을 부단히 되풀이하면서 우린 세월 속을 헤맨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인생과 닮았다.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견딜 때 글과 삶은 깊어지고 단단해지니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문인 구양수는 글 잘 짓는 방법으로 삼다를 뽑았다. 그 유명한 다독, 다작 다상량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글쓰기의 기초 체력을 기를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무를 하수는 기본에 해당하는 그 '뻔함'의 가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상수는 뻔한 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 사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여룬 일인지 모른다.
글쓰기 노하우는 기술보다 습관에 가깝다.
때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습관이 글을 쓰는 건지 모른다.
습관이 스스로 미끄러지고 번지면서 내 삶의 여백을 진하게 물들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관은 빛의 굴절과 분산을 일으키는 프리즘처럼 고유한 각도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적 견해다.
주관이 스며든 글에는 작가의 개성이 묻어난다.
글쓴이의 독특한 꺽임 혹은 일종의 각이 느껴진다.
글쓰기는 개성이라는 노를 저어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 사이의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다.
개성이 부족한 작가는 지면과 화면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직선처럼 곧은 문장은 정직하기 그지없다. 정직하므로 의외성은 부족하다.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정신분석가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정의했다...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개성화를 실현하려면 자신이 건너온 세월을 신뢰해야 한다.
지나온 제 삶을 부정하면서 개성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개성의 주된 성분은 시간이다.
인생의 모든 걸 녹일 수 있는 세월이라는 용매에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과 경험을 풀어 넣고 휘휘저어서 특유한 빛깔의 용액을 얻게 되면, 우린 그걸 개성이라고 부른다.
장 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의 언어를 '사물의 언어'와 '도구의 언어'로 나눴다.
전자는 작가의 내면에서 아무런 목적없이 충동적으로 태어나는 투명하고 순수한 언어다. 시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후자는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독자 앞에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도구로 삼는 경우다. 산문의 언어가 여기에 속한다.
인생은 유한하고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삶의 끄트머리에 걸터 앉는 순간 '이제 끝이구나'하는 씁쓸한 체념과 함께 찡한 그리움이 밀려오고 그리움은 서서히 기억으로 옮아가기 시작한다.
삶이 헐려서 무너진 자리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건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이 곁을 떠나면
빈자리에 허전함과 서러움이 채워진다는 것을.
채움이 아닌 비움이 여운을 남기는 사례는 날마다 우리 곁을 지나간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억지로 기운을 내기보다 스스로 기분을 챙기면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게 현명하다.
잡념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데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다.
산책은 외부의 풍경뿐 아니라 내부의 풍경, 즉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산책은 보행을 통해 이뤄진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몸에 바르고 빰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음미하다 보면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천천히 흘러 보내면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어느새 내면의 소용돌이도 잦아든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의 개념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분했다. 둘은 흐르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인 시간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크로노스는 우리 곁을 자연스럽게 스쳐간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뻗어간다.
카이로스는 한 개인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시간의 주인인 '나'를 향해서만 흐른다.
"초고는 가슴으로 쓰되, 그다음은 머리로 써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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