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끔껏 읽고 깨달아 온 모든 정신적 토대와 추구하는 방향을 응집해 놓은 책이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읽고 생각하고 살아온 모든 것의 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혁명들과 개인의 내적인 삶이 연결돼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진부한 말이지만 모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정보기술과 생명 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시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사회에서 관련성을 잃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다는 뜻)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혹시 그보다 더 뒤로 돌아가 고대 종교적 전통의 원천에서 희망과 지혜를 길어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우리의 두려움을 조절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 조금씩만 겸허해진다면 인류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다양한 실가닥들을 모아 이 혼돈의 시대에 처한 우리의 삶을 보다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바야흐로 옛이야기는 붕괴했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새 이야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필요한 기술은 무엇인가?
오늘날 과학과 종교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감안할 때,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계는 미틴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동화의 충격을 줄이고 재적용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정부가 일부러 자동화이 속도를 늦추기로 결정할 수는 있다.
기술은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기술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 같고 경제적으로 수익성이 있어 보이더라도 정부는 규제를 통해 막아낼 수 있다...
변화의 속도를 늦추면 사라지는 일자리의 대부분을 대신할 새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과학적 통찰이 우리 뇌와 작동방식에 대해 제시하는 견해는, 우리의 감정은 인간만의 어떤 독특한 영적 특성이 아니며 어떤 유의 '자유 의지'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 감정은 모든 표유류와 조류가 생존과 제생산의 확률을 재빨리 계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생화학적 기제라고 말한다.
감정은 직관이나 영감, 자유가 아니라 계산에 기반을 둔 것이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을 거라고 가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능과 의식은 상이하기 때문이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데 반해 의식은 고통, 기쁨, 사랑, 분노처럼 어떤 것을 느끼는 능력이다.
이 둘을 우리는 혼동하기 쉽다. 왜냐하면 인간과 다른 포유동물의 경우 지능이 의식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포유류는 느낌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컴퓨터가 문제를 푸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데이터 처리 매커니즘 안에서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산하며, 아주 효율적인 칩으로 기능하는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젖소는 좀처럼 인간적인 잠재력을 극대화할 줄은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자기 몸과 감각, 물리적 환경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논평가들은 흔히 그런 소외의 느낌을 종교적이거나 민족적인 유대감이 퇴조한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아마도 자기 몸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인간은 수백만년 동안 종교나 민족없이 살았다. 아마 21세기에도 그런 것들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절연된다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자기 몸 안에서 쳔안함을 느끼지 못하면 세계에서도 결코 평안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수만 년 앞선 석기시대 수렵.채집 부족들도 나름의 도덕규범이 있었다.
18세기에 유럽 정착민들이 호주에 상륙했을 때에도, 원주민 부족들은 모세나 예수, 무함마드는 전혀 몰랐어도 잘 발달된 윤리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인 식민주의자들은 폭력으로 원주민의 재산을 빼앗았음에도 자신들이 우월한 윤리 규범을 과시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도덕성이 사실은 진화과정에서 나왔으며, 그 뿌리는 인류가 출현하기 전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한다.
늑대, 돌고래, 원숭이 같은 사회적 포유류는 모두가 윤리규약이 있으며, 이는 진화 과정에서 집단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채택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율법들이 사실은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들이 건국되기 수백 년 전, 심지어 수천 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가나안에서 받아들여졌던 규범을 본 뜬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겸손의 가치를 받든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상상한다.
개인의 온순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모든 종교가 겸손을 보다 진지하게 여기면 좋을 것이다.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나는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IS의 신, 종교재판관의 신, '신은 동성애자를 미워한다'라고 쓴 배너 속의 신을 생각한다.
반면 존재의 신비를 생각할 때는 '신'이 아닌 다른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다.
IS와 십자군-이름, 무엇보다 자신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이름에 그토록 관심을 갖는 자들-의 신과는 달리,
존재의 신비는 우리 같은 유인원이 거기에 어떤 이름을 밭이든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어떤 신화나 이야기를 믿을 필요는 없다.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된다.
어떤 행동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사랑과 우정, 공동체 없이 누가 행복할 수 있을까?
혼자서 외롭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산다면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최소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가족과 친구, 공동체 구성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굳이 신의 이름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에 관한 궁극의 진실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궁극의 진실을 요구하는가?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 있다.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든,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가든 그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내게 의미를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우주에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나의 우주적인 소명이다.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답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다수의 과학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정신과 뇌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둘은 정말로 아주 다른 것이다.
뇌는 물질로 된 신경세포와 시냅스와 생화학 물질의 연결망이다.
정신은 고통, 쾌락, 분노, 사랑같은 주관적인 경험의 흐름이다.
생물학자들은 뇌가 어떤 식으로든 정신을 만들고, 수십억 개의 뉴런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이 어떤 식으로든 고통과 사랑같은 경험을 만든다고 가정한다.
명상은 자기 자신의 정신을 직접 관찰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일컫는다.
실제 수행이란 몸의 감각과 감각에 대한 정신적 반응을 철저하게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관찰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의 기본 패턴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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