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설득하는 수단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가려내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생각을 왜 하는가를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밀은 이런 반박에서 공리주의를 구하려 한다.

그는 벤담과 달리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질을 평가해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공리만으로 그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땀 한방울 흘리지 않는 사회의 이름을 걸고, 역사상 가장 막강한 병력이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자원군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책임을 면제해 준다.

이를 좋은 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 같이 나눠야할 희생을 면제해주면 정치적 책임의식이 약화되는 대가를 치른다.

 

군 복무에는 어떤식으로든 눈꼽만큼도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이 같은 국민인 소외계층사람들을

고용해 가장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 피 한 방울 흘리지않은 채 눈하나 꿈쩍않고 자기일을 계속한다.

 

칸트는 우리가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러는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는 이성적 능력이 우리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도 있다. 그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말한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벤담도 옳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벤담은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는 옳은 얘기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의 통치권자"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칸트는 이성이야말로, 적어도 때로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칸트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라고 칸트는 말한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법 그자체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인간은 목적이라는 공식이다.

 

매킨타이어는 젊은 독일인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 사람은 " 자기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믿는다.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이다.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따라온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연대의식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합의라는 윤리로도 포착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연대에는 도덕적 힘이 필요하다.

연대는 우리에게 부담을 안겨준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존재, 소속된 존재로 파악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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