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루는 3일동안 소환된 모든 기억들.
한 사람의 삶은 장례식장에서 되세겨지고, 정리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한번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전할 일들이 있다면,
삶이 충분히 가치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수하던 시절이 그랬다. 모든 것을 걸때 후회란 있을 수 없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두려움을 이기고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줄까.
내게는 아버지의 삶처럼 비창한 풍경으로 가인되었지만,
기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이엇을 것이다....
밀란 쿤테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당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신우형, 볼례누이, 복희 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민족이고 사상이고, 민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 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램이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가 쉬운 줄 아냐!"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꾾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속에 부활하는 거라고.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밤은 깊어가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나는 냉정한 합리주의자 아버지의 딸이니까.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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