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글이 많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도 활기 넘치고 건강할 때보다

인생의 짐을 완성하고 내려 놓을 때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을 때

어떤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는가 <내일은 못볼지도 몰라요> 김여환

 

완화치료란 삶의 끝자락에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 특히 통증을 완화시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의학이다.

 

인생이 삶, 죽어감, 그리고 죽음의 순서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한 달 후에는 떠난다는 것을 알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아운 일이다

오랜만에 면회오는 가족이 급격히 나빠진 환자 상태를 보고 대성통곡하는 일이 가끔씩 있기는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은 대체로 고요하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밤을 홀로 지세운 뒤에 찾아오는 평화일 것이다.

 

떠나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걱정을 하고,

다시는 못 본다는 미안함에 사소한 일에도 빙긋이 웃어준다.

등 뒤에 죽음이 왔다는 것을 알면서 보내는 시간이 어찌 쉬울까마는

남겨질 가족을 위한 사랑과 배려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렇게 떠난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 중 '수용'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죽음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언제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내일이 아닌 오늘,

호스피스 환자들의 한 달이 압축된 사랑과 배려의 죽어감을 흉내내본다.

 

혼자 가는 길을 함께하는 것이 죽어감의 시간이었다면, 죽음은 혼자 가는 것이다...

동화책의 마지막에는 "여기부터는 혼자 가야 해. 너무 슬퍼하지 마, 나는 그냥 강을 건너는 거야"라는

글과 함께 반려견이 혼자서 쪽배를 타고 묵묵히 노를 저으며 강의 저편으로 떠나가는 그림이 담겨 있다.

 

인생은 짧기에 소중하고 뜻깊고 알차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죽음은 삶을 새롭게 보아야 할 훌륭한 이유가 된다.

 

사람들이 죽음에 가까워져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고통을 느끼면서

진실을 감지하는 진정한 안테나를 갖게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 같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안다.

자신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닿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얻는다.

 

모든 면에서 존엄과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을 살아왔다면 죽음을 생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대로 죽는다.

의미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기술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오염될 위험을 막아준다.

공감은 소진될 수 있지만 연민은 무궁무진하다.

공감은 이따금 맹목적이 되어 우리를 타인의 고통으로 인도하면서 스스로를 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연민의 경우 타인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야 한다.

 

책임감 있게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서 타인을 돌보는 행위는 분명 위선이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신체적, 정서적, 영적 관리의 부족으로 인해

독성 가득한 쓰레기가 잔뜩 쌓이게 되고, 타인을 제대로 돌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삶에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답을, 의미와 진실을 찾는 순간들이 그렇다.

죽음의 시간은 그런 순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과정만큼 강렬한 체험은 아마 탄생뿐일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그토록 두려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죽음을 겪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만큼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도 없다.

 

죽어가고 있다는 깨달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란 인식을 동반한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아껴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리석은 일에, 불필요한 고통에 시간을 써버린다.

대부분이 삶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시간에 관한 한,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쌓아갈 수 있는 체험뿐이다.

당신은 지나가는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생각인가?

지금 지나가는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경우, '내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냉철하고 현명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스위치 역할을 한다.

 

시간의 변화는 그 기간에 달려 있지 않다.

죽음의 체험은 아주 단기간에도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삶은 우리가 그 시간 동안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체험이다.

날이 저물기를, 주말을, 휴일을, 은퇴를 기다리며 삶을 보낸다면 죽음의 날이 더 빨리 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간다.삶은 날마다 일어나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삶의 과정에서 선택하는 길은 죽음과 만나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죽어가는 이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길 잃은 심정을 여러번 느끼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도망칠 일이 아니다.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삶이라는 경이로운 곳에 이르는 난생처음 가보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말이나 행동과 다른 사람은 분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온전함은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잘 나타나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들이 정렬의 가정에 있다는 것은 아직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도 온전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성이 나 자신과 내 삶, 타인, 사회, 우주, 자연,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서 중심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삶의 종말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초월의 체험이다.초월의 체험은 늘 신성하다.

 

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자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내가 불교철학에서 배운 내용들 중에서 가장 큰 해방감을 준 가르침이다.

최악의 인간들도, 최선의 인간들도 행복을 갈망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삶이 끝나는 시점의 고독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진짜로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 때가 온다.

관계 속에서 진실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거짓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결국 알게 된다.

 

우리는 가끔 적을 통해 장애를 극복할 힘과 용기를 얻는다.

당신의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지만, 당신에게 최선을 요구하는 건 적들인 경우가 흔하다....

갈등 상황에 처하면 힘든 감정들과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이런 상황들이 당신에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또한 잠재되어 있는 힘을 발견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 나는 복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내적 힘을 통제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면 당신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놓친 기회들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결국 나는 홀로, 중재자 없이 죽음 앞에 선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내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건 내 죽음이니까.

그 벽은 내 죽음이지 내 아들이나 남편, 아버지, 어머니, 직장 상사의 죽음이 아니다.

내 인생길은 오직 나의 것이다...

삶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행복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저 기쁨과 즐거움을 떠올리지만,

완전한 행복은 커다란 고난을 극복하고 난 후에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긴박한 시간들을 피와 담, 눈물로 견뎌낸 후 상처투성이일지언정

참된 자신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하고 훌륭한 모습으로 우뚝 선다면 우리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말로 인한 화재에는 침묵이 요구된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은 삶을(그리고 마지막을) 향상시킨다.

오늘 당신은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매순간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삶을 잘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상 속에서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하기, 친구들과 함께하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스스로 선택하기,

일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의미를 지니는 일 하기, 그러면 어떤 후회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이유로 꿈을 꾸지만, 꿈을 잃었을 때 분별력을 잃어서는 안된다...

모든 존재적 상실, 그것이 하나의 관계든, 직업이든, 확신이든

모든 상징적 죽음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첫째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다.

둘째,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좋은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셋째, 이제 끝나버린 그 시간에 당신이 의미있는 영향을 미쳤다는 학신을 가져야 한다.

상실의 수용은 계속되는 삶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

마무리가 확실하지 않거나 아직 끝났다는 확신이 없으면 다른 계획, 다른 관계, 다른 일에 착수하기가 어렵다.

 

끝난 건 끝난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키워야 할 능력이다.

진실을 직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보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분노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기 위한 노력은 위대한 도전이다.

 

잃은 것을 놓아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실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관계가 끝났는가? 그럼 관계의 죽음을 실컷 애도하라.

일자리를 잃었는가? 일자리의 죽음을 애도하라.

아픔을 피하지도, 겁쟁이가 되지도, 체험을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충분히 아파하라...

상황에 최선을 다한 뒤; 마지막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의미있는 시간이었어! "

 

나 자신의 회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복이다.

기꺼이 새로 태어나고자 한다면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

 

죽음은 올 것이고 우리는 그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지만, 재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았는지'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이다.

삶의 끝에 이른 사람들을 보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가 과거의 동기를 상기시킨다면, '무엇을 위해'는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법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다.

 

<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혼자 가야해> 조원희

<죽음의 중지> 사라마구

<즉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브로니 웨어

< 네 가지 행복> 돈 미겔 루이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