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부터 시작해 1965년 1월 독도밀약에 이어 6월의 한일기본 조약 체결에 이르는 시기는 실로 총과 칼이 아니라 말과 머리로 싸우는 '역사 전쟁'의 기간이였다.
14년의 기간에 7차에 이르는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내각이 여섯 번 바뀌었고,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장면 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으로 바뀌는 역사의 대전환이 있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선포한 평화선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사실상 철회되고 그 대신 독도밀약이 성립되는 과정은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이라는 것이다.
영토는 한민족의 문화적 정치적 지정학적 정통성의 바탕이다.
따라서 영토에 대한 도전은 인류가 행한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며, 그 갈등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독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2차 셰계대전이 끝나고
이를 정리하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서 독도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해 9월8일, 이 조약이 조인되기 한 달 전에 당시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였던 딘 러스크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는 서신을 한국정부에 보냈다.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가 독도는 한국에 영유권이 잇다는 판단을 포기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중에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역사학자 육당 최남선이 한일회담에 임하는 한국 대표들에게 경솔하고 부적절한 조언을 한 것이다.
1948년 한국에 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역임한 유진오가 한일회담의 대표단에 들어가게 되어,
영유권 협상을 앞두고 당시의 권위있는 사학자 최남선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최남선은 "목포, 나가사키, 상해를 잇는 삼각형의 가운데쯤에 파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영유권도, 독도영유권과 함께 주장해두라"고 조언했다....
연구태세를 비롯한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진오는 이 주장을 연합국 측, 즉 미국에 공식으로 제기한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파랑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당시 이미 체계적으로 외교를 전개하던 일본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던 영유권 외교전에서 한국의 주장이
일본의 주장에 비해 진정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인식되고 만 것이다.
뜨거운 민족애와 영토주의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애국심은 인류의 미덕으로 칭송되는 하나의 감성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관적인 판단, 냉정한 사실파악의 결여, 치밀한 외교전략의 준비 부족 상태에서 여과 없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최남선의 조언,
그리고 이를 외교정책에 반영한 당시의 한국정부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이러한 행동이 일부 인사들이 무책임한 낭만주의나 영웅심과 결합할때, 그 후손은 큰 대가와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엄연히 자치단체를 구성해서 사는 쓰시마, 영토에 관한 한 한국인 이상의 열정과 경계심을 가진 중국인들이 사는 간도.동북삼성에 대해
'우리 땅'이라는 논조가 한국에서 제기될 때마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흔들지지 않은 정보와 지식의 덩어리가 있는지 걱정하게 된다.
빠르게 굴러가는, 그리고 멈출 수도 없는 역사의 마차 위에 올라탄 당시 한일의 건력자들은 이 중대한 사안을 어설프게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하느니
차라리 다음 세대의 지혜와 영단에 맡기자고 생각한 측면도 있다.
이른바 '독도밀약'이란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 5개월 전 정일권 국무총리와 고노 이치로 국무대신이 맺은 비밀 약속을 가리킨다.
이는 국교 정상화를 위해 영토문제를 영구히 '봉인'하는 '미해결의 해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밀약 체결에 관여한 것은 한국 측은 정일권, 김종락 일본 측은 고노 이치로, 우노 소스케, 시마모토 켄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밀약을 승인한 박정희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 총리 등 7명이다....
협상과정을 되짚어 보니, 독도밀약이라는 것은 단지 영토문제에 관한 약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전후 한일관계사의 축소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현대국가로서 출발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가지는 두 개의 밀약이 선행되어야 했다.
하나는 '청구권 자금'과 관련하여 1962년 11월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간에 맺어진 '오하라-김 메모'이고.
또 다른 하나가 독도 다케시마에 관해 1965년 1월 고노와 정일권이 체결한 '독도밀약'이다.
고노와 우노, 김종락 3인이 머리를맞대고 짜낸 방안이 '미해결의 해결'이라는 것이다.
이 '미해결의 해결'은 당시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명안'이라고 칭찬받고 있다.
고노 이치로 최종 제안. 독도에 관한 1원칙과 4개 조항
독도 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1.양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
2.그러나 장래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쌍방 모두 다케시마를 자국령으로 해 선을 긋고,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3.한국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비원의 증원과 시설의 신설, 증설을 하지 않는다.
4.이 합의는 이후로도 계승해나간다.
"그 문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태웠어."
김종락은 왜 그 역사적인 문서를 태워버린 것인가? 이에 대하여 그는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신뢰를 받던 이너 서클의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단죄하고자 하는 신군부에게 오해를 받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김종락이 독도밀약의 내용이 기재된 문서를 불태우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였다고 한다.
전두환이 보내는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언제든지 자택에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에서 위협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양한 논의와 교섭 끝에, 고노 이치로가 매듭지은 문서는 1965년 1월에 서울에서 정일권에게 건네지고,
이것이 다시 박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그 회합이 이루어진 곳은 범양상선의 주인이었던 박건석 저택의 홈바였다.
그 문서를 본 시마모토는 그 문서가 공판 타이프로 찍혀 있었다고 분명히 기억한다. 그 문서는 원본이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노트에 내용을 베끼려고 하자, 그것을 동경에서 가져온 우노 의원이 "화를 내면서 제지"하고 나서, "원본이니까 주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문서를 검토한 후 재가했으며, 나중에 대통령의 지시로 김종락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 문서를 박정희 서거 후 태웠다는 것이다.
독도 밀약을 빚어낼 당시 한일 양국의 정치가들은 외교교섭이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의리와 인정을 중요시하는 나니와부시 정치문화를 대표하는 오노의 진면목을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나카가와 이치로의 평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나카가와는 오노로부터 다양한 정치적 유산을 계승했다. 의리와 인정, "반보쿠는 남자야"라는 의협심이 있는 삶의 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금원과
업계나 대만과 한국의 인맥도 나카가와가 물려받게 되었다.
한국이 서구화되면서 가치관이 변하는 가운데 일본과 거리가 더 벌어지는 또 하나의 경향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함에 있어 서구인보다 더 서구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 속에서 일본인의 1인당 평균소송 건수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형상 민사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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