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생각이 넓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 책이다.
허무함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기에 자신의 몸부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
웬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내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로 떠밀려간다.
내가 누군인지를 말하는 주변의 목소리들이 많아질 때, 혹은 개인의 비밀들이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와 여기저기 나딩굴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무심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어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익명의 대중에게 중계한다.
그렇게 사적 비밀이 서식 할 수 있는 시공을 지워버린다....
프라이버시가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와 또 이런 권리가 타자에게 승인되고 인정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비밀로써 지켜질 수 없다면
프라이버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서로 모순되는 행동양식을 구별하게 해주는 경계들에 관해 학신할 수 없었던 수컷 큰 가시고기가 보여준 그 기이한 행동이 점차 인간 남성들과 여성들의 가장 평범한
행위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급속하게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신호들이 혼란스러운 만큼 반응들도 혼란스럽게 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전혀 앞을 내다볼 수도 없고 통과할 수도 없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정보 덩어리가 유발하는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정보들도 모두 바로 여기에서 언제든 이용할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정보들은 그것을 꿰뚫고 들어가 완전히 이해하고 흡수하려는 그 대담한 노력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화가 날 정도로 교묘히 빠져나간다.
현재의 변화가 과거의 변화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 역사의 그 어떤 전환기에서도 지금 교육자들이 마주한 분수령에 비견될 만큼 중요하고 많은 변화를 초래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처럼 정보 과잉의 새계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방식은 결국 계속해서 배우는 일 뿐이다.
더구나 그런 정보 과잉 세계에서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삶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고 어려운 기술을 보유해야 한다.
결국 새해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희망을 기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것은 실상 템포가 빠르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기에 여러 유혹들과 위험들이
들끊고 있는 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그 두려움 자체에 대한 공포인 셈이다....
그러한 공포증의 견고한 핵심은 바로 불행의 순간에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버려진 채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라고 여기게끔 예상하게 하는 것이다.
휴대전화 없이 밖에 나가는 일은 마치 바지도 입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듯한 느낌이며 마치 벌거벗은 채 무방비 상태로 다니는 것 같다고.
더구나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몹시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자신이 아주 무능력하다고 생각되어 두 배로 창피하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위태로운 상황이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기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언제든지
필요하고 또 원한다면 곧바로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있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계속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공위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들이 출현한다.....
곧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보장하던 법률적인 틀이 그 지배력을 상실해 더는 점차 급성장하는 사회적인 삶을 순조롭게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게된 상태를 덧붙였다.
"우리에게 익숙해져버린 것들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하는 일,
다시 말해 어떤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실천에 맞춰 조직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사건의 맥락에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우리들의 사고를 조직화하는 그 사고 유형을 뒤바꾸는 일" 말이다.
"존재"로 부터 "당위"를 분리시키고 너무나 자주 모든 것들이 "존재"와 충돌하곤 하는 인간만의 특별하고도 독특한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란,
아무런 경계도 없던 곳에 어떤 경계를 그려내면서 시작되었다...
문화는 탄생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내내 이와 동일한 유형을 따라왔다.
문화는 지각하고 평가해야 하는 대상들이다.....
문화는 시작된 이래 쉴 새 없이 계속해서 그것이 아니었다면 한결같이 무작정 진행되며 변덕스러웠을 것을 차별화하고,
구조화하고 규칙화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어 존재해왔다.
문화는 인간의 여러 산택들을 관리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다루어온 것이다....
어떤 형태도 없던 덩어리가 '구조화'되면서, 어떤 구조가 주어진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알게 되고,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결국 경계들은 확신을 제공한다.
그러한 경계들은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어디로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고, 우리 스스로가 자기-확신을 지닌 채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셈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에 여행일정표를 창조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여행일정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들도 또한 창조하기 마련이다.
마치 예술작품들이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과정과 인생의 '전반적인 목적', 인생의 '궁긍적인 목적지'도 단지 '자기 스스로가 찾아야만 하는 일'이며,
이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은 그와 같은 통계적인 개연성을 거역한다.
성격은 바로 운명과 여러 우연적 사건들에서 그것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거나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는 그 전능한 힘을 빼앗아버린다.
달리 말해 채념하는 듯 수용하는 태도와 상황이라는 그 전능한 힘을 거역하겠다는 대담한 결단 사이에 바로 성격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카뮈가 정의하는 '지식인'이라는 것도 바로 "자신의 마음이 자기 마음 자체를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카뮈는 자신의 표현대로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비참한 고통이 나에게 '태양 아래의 모든 것들은 보기 좋았다'라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그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던" 셈이라고.
결국 카뮈는 자신이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했던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작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란 카뮈가 지적했던 것처럼,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카뮈는 결론 내렸던 것이다...
'좋은 글들 > 책에 있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하는 삶(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앙주 지음) (0) | 2019.04.02 |
---|---|
몬스터 콜스(패트릭 네스 지음) (0) | 2019.03.26 |
인공 생명의 탄생(J 크레이그 벤터 지음) (0) | 2019.03.04 |
징비록, 懲毖錄(류성룡 지음) (0) | 2019.02.22 |
90년대 생이 온다(임홍택 지음) (0) | 2019.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