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을 보면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이 명확하게 이해된다.

일제시대, 6,25 등의 상황과 연계해보면 어찌 이리도 같을수가 있는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외국의 속국이 되고자 하는 자들, 전쟁이 나면 먼저 도망치는 자들...그들을 앞세우며 편을 드는 자들..

그에 반해 독립운동을 했으나 아직도 타국을 떠도는 후손들을 생각하노라면, 평화로운 세상을 거저 누리며 악한 무리들을 경계해야 함이 확실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문제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징비록>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장면은 도망가는 사람들에 관한 장면이다.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고, 대신들이 임금을 버리고 도망가고, 고을의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고 적의 무리가 되는 등,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적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제 한몸이나 식솔들을 챙겨 도망치기 바쁜 사람들은 흔했다.

더욱이 오랫동안 이러한 대규모 전란을 겪어 본 적이 없던 조선의 병사들은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의 병사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에 채찍질하여 두 차례나 직접 적진을 향해 돌진하려고 하였지만 뚫지 못하고 돌아와서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

박홍과 원균은 적을 멀리서 보고도 달아나버리니 제대로 한번 싸우지도 못하였다...

그 후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적을 추적할 때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험난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총병 신립은 지략이 없는 사람이다."

신립은 날래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나 있었지만 계책과 전략에는 서툴렀다.

옛 사람이  말한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후회하여도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훗날의 경계로 삼을 만하기에 상세히 적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의 포로 송환 노력과 각자의 탈출 노력 등이 합쳐져 전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은 6000여명 정도였다...

선릉과 정릉을 파헤치고 도굴한 범릉적을 해결하지 않고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 재개는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쓰시마 주에서는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릉적을 앞장서서 찾아내 조선으로 압송했다.

조선에게 범릉적의 체포와 처형은 선왕의 능묘를 훼손당란 일에 대한 속죄와 승전을 기념한다는 두 가지 명분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주도한 유영경은 가짜일지라도 범릉적을 처치하면 능침 훼손의 치욕도 갚을 수 있고 승전도 기념할 수 있으니, 범릉적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그들을 처형하고자 했다. 선조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덕형은 이들이 가짜라는 것을 명분삼아 외교적 효과를 노려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범릉적은 처형되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은 외교적으로 화해하게 되었고 조선의 사절은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어 훗날 조선통신사의 지속적인 파견의 단초를 마련했다.


당시 대신들과 신하들은 피난길에도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민심의 동요를 틈타 자기 당파의 정권 장악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류성룡 역시 이 와중에 파직되고 말았는데 이는 서인인 정철과 윤두수의 복귀와 선조의 동인 책임론에 의한 성격이 짙다....

유배지에 있던 정철을 불러들인 선조는 윤두수를 좌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동인 세력을 물리치고 서인 세력으로 교체해 전란 중의 어려운 정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인 세력은 다시 홍여순과 이원익 등 동인 세력을 탄핵하려고 하고 동인 세력은 윤두수를 질책하는 등 다시 어지러운 당쟁이 되풀이 되었다.


우리 군대가 버리고 온 수많은 군수품과 장비들이 길을 가득 메워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왜군은 그것들을 모아 모두 불살랐다. 이광은 전라도로, 윤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 우도로 달아났다.


이때에 우리나라는 연달아 사신을 요동에 보내어 급보를 알리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명나라의 속국이 되겠다고 애걸하고 있었다.

왜군은 이미 평양을 함락시켰고, 왜군의 형세는 마치 물병을 쏟은 것과 같았다.

아침저녁 사이에 왜군이 압록강에 이를 것이라고 예견하는 등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기 때문에 명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까지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평양성에 들어간 왜군은 몇 달째 성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평양과 가까운 순안이나 영유조차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민심이 다소 안정되었고,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명나라 원군을 맞이하여 마침내 국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진실로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전란 중의 백성은 엄하게 다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단지 성심성의껏 깨우치고 타일렀을 뿐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았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로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연해 일대를 지켜냄으로써 군량미를 적절히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명령 및 연락체계를 통일 시킴으로써 중흥에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요동의 금주, 복주, 해주, 개주와 천진 등지가 전란을 입지 않게 되었다.

명나라 원군이 육로로 들어와 우리 군을 도와 왜군을 몰아내게 한 것도 모두 이 한산도 전투에 힘입은 것이다.

아아,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이 삼도의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에 주둔하여 왜군의 서쪽 침범로를 막았도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강화 협상 후 한양을 수복하게 되자, 일본군을 추격하려는 조선인 장수를 매질하고,

진군을 재촉하는 류성룡을 묶어서 무릎을 꾾린 후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죄를 따지는 등 치졸하고 악독한 행동을 했다...

이처럼 한국 내 주둔군의 역사는 매우 부정적인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부다의 주둔, 정묘호란 이후 명나라 모문룡 부대의 주둔, 병자 호란 이후 청군의 주둔은 물론이고, 근 현대사를 거치면서

청나라 원세개 부대의 민간인 학살,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 해방 이후 미군의 주둔에 따른 민간인의 피해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 측에서 제시한 강화 조건은 명나라와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강화 조건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

4.조선은 지난번에 군대를 파견해 정벌했다. 이제 점차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안주하기 위해 장수를 보내려고 했으나, 제시한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의 역의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대명과 팔도를 분할하여 그중에서 네 개 도와 한양을 조선국왕에게 주겠다...

5.네 개 도를 반환할 것이니 조선 왕자를 인질로 하여 일본으로 보내고, 대신 한두 명도 인질로서 왕자를 호종하게 할 것.

7.조선의 국왕은 만세토록 서약을 위반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할 것....


칠전량 해전의 참패는 그 결과가 매우 참담했다. 재해권을 상실한 조선 수군은 왜군의 저라도 진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왜군은 경상도는 물론이고

전라도로 밀고 들어가 남원성까지 진출해 더욱 가혹한 약탈에 나섰다...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부임했을 때 강력한 수군은 온데간데없고 칠전량 해전에서 도망처 나온 배설의 함대 12척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급기야 수군 폐지론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수군이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는 논리의 상소를 올려 수군을 보전시키고 이후 명량 해전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명량 해전은 칠전량 전투의 패전으로 호남이 뚫리면서 다시 한양이 무너질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또 한 번 조선을 구해낸, 이순신의 영웅적 활약상이 농축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명량 해협에서 이순신은 아군 12척의 배로 왜군의 배 120여 척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고,

이 전투의 승리로 다시 왜군을 교착 상태에 빠드려 더 이상의 진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1598년 11월 18일과 19일에 걸쳐 벌어진 노량 해전은 조명 연합군이 참전한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해전이자 최후의 전투였다.

또한 이 전투는 이순신 스스로도 마지막 전투라고 직감한 전투였다....

숙종 때 학자인 이여와 영조 대 학자인 이이명은 모두 이순신이 점차 자신의 공로가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 작정하고 죽음을 택했다고 서술했다.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전란이 종식되었고, 그 죽음 때문이었는지 이순신은 선무 일등 공신에 녹훈된 후, 정조 대에는 충신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아! 전쟁의 판세는 일정하지 않고, 전투에는 정해진 진법이 없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은 전법을 구사하여, 때로는 전진하고, 때로는 후퇴하며, 한거번에 들이치기도 하고, 흩어져 싸우기도 해야 한다.

적절한 전략을 끝없이 구사하는 것은 오직 장수에게 달린 일이다.

그런즉 천 마디 말이나 만 가지 계획이 다 소용없고, 오로지 뛰어난 장수 한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국가에서는 평상시에 장수를 선발해두었다가 유사시에는 그에게 임무를 맡겨야 한다.

장수를 선발할 때에는 잘 골라서 전적인 권한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경상도의 수군 장수가 박홍과 원균이었고 육군의 장수는 이각과 조대곤이었는데 이들은 야당초 장수감이 아니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방어사, 조방장 등이 모두 조정에서 직접 명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들 각자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저마다 군사들을 제멋대로 전진시키기도 하고 후퇴시키기도 하며 서로간에 전혀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활약한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관군과 무책임하게 피난길에 오른 선조와 권세가들에게 의병의 활약이 달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신 책봉을 할 때,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공신인 선무공신보다 피난길을 수행하고 호위한 호성공신의 규모를 몇 배 넘게 선정했다.

또한 선무공신 명단에 의병장의 이름은 없었으며, 일등 공신에 이순신, 원균, 권율 같은 관군의 장수들만 선정되었을 뿐이다...

선조는 전란 초기 호남지역의 전투에서 가장 뚜렷한 전공을 세운 의병장 김덕령을 1596년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켰다.

김덕령은 국문 중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등 고초를 당했고, 끝내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호남은 반역의 고장으로 인식되었고, 의병장 김덕령을 중심으로 역모를 일으키지는 않을지 의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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