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진화, 이것이 이책의 주제이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두루 살피고 현명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깨어 있는 에고를 발달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루를 지내면서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잡념이라고 말하며 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없애는 것을 수양과 정진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그 잡념 혹은 여러가지 자아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오랜 진화의 기간 동안,

학습해온 혹은 DNA로 축적해 온 생존의 단서들 혹은 고려해야 할 리스크들의 되세김이라고 해도 지나친 도약은 아닐 듯 싶다.

DNA를 좀 더 깊이 연구하면 인간 생존의 방어 기재로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생각의 실체를 들여다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그 정체가 잡념이든 여러 가지 자아든 모든 요소를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는 에고를 갖는 것이 중요하리라.

이 모든 행위도 결국 인간 진화의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깊은 사고 없이 판단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패턴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강력한 처방이 될 듯하다.


의식은 사람들이 획득하고자 분투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의식은 살아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진화적 과정이다...

의식은 서로 뚜렷이 다른 세 가지 수준으로 진화한다.

첫 번째 수준은 자각의식의 수준이다. 두 번째 수준은 다양한 자아들, 하부인격들, 혹은 에너지 패턴들의 '경험'이다.

세 번째 수준은 깨어 있는 에고의 발달이다.


자각의식은 목격하고 있는 에너지 패턴들을 평가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사건의 결과를 통제해야 할 필요 없이 삶을 모든 측면에서 지켜보는 능력이다...

자각의식은 개관적인 태도로 관찰하는, 말 없는 바라봄이다... 지켜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의식의 작용을 깨어서 자각하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거나 외면한 에너지 패턴들에 의해 조종된다.


하부인격들, 곧 내부의 목소리들은 모든 사람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삶을 경험하는 에너지 시스템들이다.

목소리와의 대화법은 우리들에게 이들을 객관화하고 인식하고 이름을 붙이고 이해하고, 이들과 함께 창조적인 일을 벌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깨어 있는 에고는 하부인격들과 명확히 구별된 자기만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이 자각과 경험들의 조합은 우리가 '깨어 있는 에고'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낸다.

깨어 있는 에고는 우리의 모든 자아들을 자각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는, 의식의 유일한 부분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깨어 있는 에고는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실질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키워간다.


만약 자신을 드러내는 목소리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는 에고가 없다면 그것은 병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에고, 즉 '이것은 하나의 목소리다"라고 할 수 있는 에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런 주된 자아들은 에고가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는지, 그리고 특정 시기에 무엇이 인격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인격이란 근본적으로 우리의 취약점을 보호하려는 에너지 패턴들의 시스템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이런 목소리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을까?

자신은 분명히 스스로 선택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삶의 대부분을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에너지 패턴을 자각하고 경험하면 그 에너지 패턴의 본성이 변한다.


우리는 저마다 무수히 다른 길을 통해 의식진화의 길에 발을 들여놓고, 그것을 심화시켜나간다.

각각의 길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르네상스형 인간을 탄생시킨다.

이 여정에 도전하고 헌신하는 우리는 각자가 이 새로운 존재를 추구하는 선구자들이며, 그 길에서 서로를 부추기고 도와야 한다.

 이 의식의 여정에 헌신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한 가지 에너지 패턴이나 유사한 에너지 패턴들의 모둠 속에 안주하는 데서 오는 안정감을 포기해야 한다.

보호자/통제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삶은 매우 단순해 보인다.

우리의 각자의식이 이런 패턴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반대극의 역설'을 깨닫는다.

자각의식은 우리에게 서로 반대되는 에너지 패턴들을 항상 인식하며 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안정감의 상실과 함께, 우리는 자신이 언제나 옳다는 느낌을 잃는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의 패턴, 혹은 유사한 에너지 패턴들이 모둠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이것은 투표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

만약 자각의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 사채발행에 대한 '반대'측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아 보인다.

애써 '찬성'측의 주장을 듣지 않고 그냥 '반대'측에 표를 던져도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나아가서 '찬성'측의 주장을 들어본다면 그 주장 또한 전적으로 옳아 보인다.

하지만 오직 한 측만이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에,

자각의식을 작동시키면 어느 쪽에 투표할지를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양쪽을 모두 존중하면서 저울질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에고로서 옳다고 판단되는 쪽에 표를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정감과 독단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나면 다른 장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과 감정과 신념체계와 자기정체성을 아무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것을 에너지 패턴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자각의식을 발달시키기만 하면 된다.

종교적, 문화적, 도덕적 신념체계를 버릴 필요가 없다.

그저 그것들이 단지 종교적, 문화적, 도덕적 신념체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만 자각하고 있으면 된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동 패턴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진화한다.

특정한 자아들에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습관 말고는 어떠한 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자각의식 속에서 우리는 이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우고 신성의 고요와 평화와 영원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자아들을 포용하고, 우리의 의식체를 구성하는 무수한 에너지 패턴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발현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에고를 발달시키면 우리는 점점 더 명쾌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행성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마법의 약인 '의식의 진화'의 알맹이다.

우리의 이식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집단적으로 표출된다고 믿는다.

의식이 더 깨ㅐ어난 인류는 자신들이나 자기네 행성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각의식을 통해 서로 하나가 되고, 우리의 다양한 자아들을 통해서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깨어 있는 에고를 통해서 국가와 종교와 인종과 그 밖의 온갖 울타리를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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