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책이다.

다시 한번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보다 우리는 산만한 현재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산만한 현재 속에서 주변부를 향한 신경은 예민한데, 직접적으로 자신을 향한 신경엔 무디다.

언제든 우리를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많은 외적 압박에 그때그때 대응하려다 보니

계획을 세우는 인간의 능력은 퇴화하고 있으며 계획을 지키는 능력은 그에 못미치고 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혁신의 연속성보다 별 의미도 없는 일시성에 우리의 인지적 능력을 허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학자들은 현재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이해 사이의, 점점 벌어지는 불균형을 이용해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부채를 현재의 비용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며,금융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더 나은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오로지 즉흥적인 것에 쏟아붓는 반면,

신중한 것에는 관심을 줄이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인 파충류처럼 여겨지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세상이 미친듯 나아가 우리가 걷잡을 수 없을 때는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잠시 멈춤 버튼 누르기.


사람들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 모든 정보를 따라잡기에 급급한데, 정보 자체는 우리를 따라오지 못한다.

한편, 데이터의 흐름의 변화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비상한 노력은 결국 그 변화가 보내는 신호의 중요성을 실제보다 훨씬 과대평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양하게 퍼진 각 디지털 영역에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우리는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진정한 현재와 맺고 있는 끈을 놓치고 만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디지털상의 가자 현재와 살아 숨쉬는 인간이 몸담고 있는 참된 지금 사이엔 긴장이 형성되고, 이 긴장으로 인해

두 번째 종류의 현재 충격이 빚어진다. 이를 디지털 분열이라고 부른다.


컴퓨터는 현재 충격을 겪지 않는다.

사람만이 겪는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가상적 자아는 이런 자유를 만끽하지만

진짜 현실 속의 살과 피로 이뤄진 우리 인간은 그 네 시간 동안 노화가 진행되고 점심도 거른 상태고 화장실가는 것도 잊었으며 눈은 말라서 빨갛게 충혈됐다.

주인이 단 몇 초 동안 광속 여행을 하고 지구로 돌아와보니 90년 세월이 흐른 것처럼 우리의 디지털 자아는 우리의 신테적 시간과 분리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결국 이 두 현실이 충돌하면서 현재 충격을 낳는 것이다.


어느쪽 세상에서든 운전대를 잡은 사람만이 멀미를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탄 승객 그리고 디지털 세상의 유저는 앞에 요철이 있는지 혹은 커브를 돌아야 하는지 미리 파악할 수 없는 반면,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분열로 고생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운전자가 된다는 것은 곧 선택의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디지털적인 것은 쌓아놓을 수 있지만, 인간은 실시간을 살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창의적이고 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무언가를 배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이 멀티태스킹을 아주 잘한다고 믿는 상당히 영특한 대학생들조차 수행 능력에서 한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실제로 수행해낸 것은 얼마 되지도 않고 그나마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자신들이 많은 일을 해냈다고 믿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연구들을 보면, 멀티태스킹과 중간에 일의 리듬을 끊는 것은 우리 기억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현실 세계에선 의사소통의 94퍼센트가 비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

특정 순간에 지어내는 몸짓, 얼굴 표정, 그리고 홍채의 크기 등으로 우리는 말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활동들을 조직할 때, 컴퓨터 칩이 메모리 안쪽에 작업거리들을 밀어넣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관조와 유대를 그리 쉽게 폄훼하는 존재가 될 수도 없다.


이런 식이기에 긴 글을 읽을 때도 골자만 잡아내고자 빠르게 훓고 지나간다.

그러나 골자는 행간에 깊이 스며 있으므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서두르다보니 우리는 심오한 사고를 우리의 기억 체계 가운데 일시적인 것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몰아넣게 되고 결국 숙고라는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선형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과정을 흐름의 한순간으로 압축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과도하게 태엽감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AS센터 접수대에 놓여 있는 수리 전표처럼 말이다.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문제 하나하나는 똑딱거리는 시계처럼 우리 뇌리에 자리 잡는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와 아직 일정을 잡지 못한 과제들은 우리 뇌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분에 자리 잡고서 처리되기를 기다린다.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열린 상태로 계속 돌아가고 있는 루프를 최대한 많이 닫는 것이다.


누구나 사면서 어떤 특정 시기에 발을 깊숙이 담글 때가 있다.

그런 때가 되면 시간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고 한번 그것을 놓치면 우리는 원래 나이로 다시 튕겨 나가고 만다....

어른이 됐다는 자각은 불현듯 드는 것이며 그 자각은 고통스럽고 치명적이다.

이는 태엽을 빡빡하게 감아 놓았던 시계가 한참뒤에 갑자기 풀려버리는 것과 같다.


소비자라는 존재는 다른 이들의 압축된 시간 덕분에 가능해진 현재를 살고 있는 자들이다.

소비자는 다른 사람들이 운송하는 데 몇 달이 걸렸을 것을 단 몇 분만에 소비하는 자들이다.

그들도 시계가 정상적으로 똑딱거리는 일터에서 일했지만, 상점에만 들어서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했다.

그들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갔는지에 상관없이 쇼핑을 하는 동안은 멈춰버린 현재가 되는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소비가 점점 더 편리하고 빨라지다보니 실제로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지경에가지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마치 공유사회라도 딘 듯하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만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삶은 언제나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일련의 금전적 경험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풍요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일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실상 넘쳐나는 모든 것을 분배하는 데 대한 일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신과 동료 죄수들의 상황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죄수일수록 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죄수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많은 협력을 일궈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고립은 편집증을 낳았으며 규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부투명할 때의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인은 대상에 집중하고 그것을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인은 배경을 보고 더 큰 환경적 힘에 대해 생각한다.

서양에선 형식 논리를 사용해 사물을 파악하는 데 반해 동양에선 다양한 전략들을 사용한다.

니스벳의 설명에 따르면 "아시아인들은 전체론적으로 추론한다. 이는 그들이 대상에 주목하되 그것을 둘러사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스트레스가 일정한 압력으로 계속 내리누르는 것이다.

따지고 들 근원도 없으며 끝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시나리오들이 제시하는 단순성으로의 희귀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매혹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확실히 우리의 진짜 기억 혹은 경험과 가상의 그것들 사이의 구분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종국에는 비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우리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의식이란 것은 그때 가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겠지만,

마이크로칩과 나노봇 활동의 결합이 우리의 오래된 탄소덩어리(뇌)보다 더 잘 기능할 것이고, 우리가 현재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존재는 대가 끊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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