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제국의 영광이 옅어져가는 이스탄불,

비애로 상징되는 단어는 오르한 파묵의 인생 전반을 끌고가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모습은 많은 부를 가진 모습에서 점점 탕진하고 가난해져가는 그의 집안 모습과도 닮아 있다.


릴 때 모두 한번쯤은 했음직한 학교 안가기 위한 핑계대기,

그리고 도시 모든 것을 구경하며 보낸 시간들.

비애 절망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던 그림그리기,

그림과 뗄수 없는 존재이자, 모델이 되어 주었던 여인과의 첫사랑,

흔히들 그렇듯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지만 매번 도전하던 형과의 싸움,

할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막대한 부를 말아적은 아버지와 삼촌,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희망대신 절망에 익숙해진 어머니,

그는 이스탄불 자체와 같이 걸어가는 절망처럼 보인다.


이제 뭔가 반전이 필요하다.

주위에 이끌려 들어간 건축 공학과는 이제 결별의 대상이 되고, 글을 쓰기로 작정한다.

2006년 노벨문학사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자전에세이였다.


우리의 한과 연계되는 감정인 비애를 살려내는 것이 특이하다.

어느 시점엔가 한국의 상징이였던 한을 우리나라는 이제 극복했을까?

남북 분단,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을 남겨 놓았음이 맞다.

이런 감정의 큰 덩어리를 미래로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 전체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미래를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 슬픔에 있다. -아흐메트 라심-


행복이라는 것이 가족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신뢰감, 농담, 편안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자신이 나폴레옹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이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행복한 몽상가와 불행한 정신분열증 환자 사이의 차이이다.


그들은 세계속에 비밀스런 두 번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한때 보았겠지만, 경탄하거나 상상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둠이 깔리는 이른 저녁을, 삭풍에 떠는 잎사귀없는 나무들을, 가을을 겨울로 연결하는 날에 검은 외투와 재킷을 입고

반쯤 어두운 골목에서 종종걸음으로 귀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 사라져 버린 세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며,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작가가 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증오,

인간적인 허약함, 힘, 그리고 권력으로 만들어진, 악마적이며 사악한 것들을 못 본 척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을 좋아한다.


도둑맞았거나 사라졌음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자전거 혹은 학교에 오지 않는 같은 반 친구처럼,

철저히 그리고 슬프게 그의 부재를 깨달았을 때는 우리가 이미 이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반복은 행복의 원천이자 보증이자 죽음이다.


한 집에 대한 애착일까? 왜냐하면 나는 오십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집은 방이나 물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 머릿속에 있는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비애는 이스탄불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된다.


모든 문명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처럼 덧없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시대를 마감한 문명들도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부자라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이 했던 사업의 파산,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 네명으로 구성된 우리 가족과 할머니가 중심이 된 대가족 사이의 다툼은,

삶이 즐거운 사건들과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들과 무진장한 행복의 가능성만큼이나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타나 타오르고 커지는 크고 작은,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재앙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모든 지식의 출발점인 장소가 실은 얼마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면, 죽은 후 우리가 남겨두고 온 세계를 보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궁금하고 충격적이다.

내 인생의 모든 경험, 섬세하게 쌓아 놓은 모든 인간관계와 물건들 앞에서 느끼는 전율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스탄불이 비애의 도시라고 듣는 것이 왜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 걸까?

왜 나는 나의 모든 삶을 보냈던 나의 도시가 내게 준 감정이 비애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이라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을 믿기 위해, 자신이 평온하고 편하고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

모두가 한동안 마음속에 있는 정령들과 사탄들을 숨기고 입 다물게 하며 행복한 척하는 집단으로 보였다.


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그 외관뿐 아니라 도시에 있는 집 내부와 그 실내 풍경이라는 것을 외국인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어느 날 위대한 일을 할거라는 생생한 욕망과 현실이 나는 매료시켰다.

이 모든 폭력, 자존심과 상상에는 사악함이나 도덕같은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힘과 생동감이 있었다.

내게 깊은 행복과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두 번째 세계는 폭력으로부터 자양분을 받았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고 매력적이었다.


산과는 선하게, 악과는 악하게, 기이한 것과는 기이하게 되는 원인이었던 이런 편안함은 다른 친구들과는 반대로,

스무 살 이후에 냉소적이며 지나치게 조소적인 사람으로 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관심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가슴 한편으로 진심으로 믿고 몰입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나는 본능적으로 나의 습관과 살았던 곳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장소와 환경과 집과 동네를 바꾸는 데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광란적인 상상을 하면서 수백 년이고 질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좋다는 것,

한 때 우리를 떠나 파리에 있는 호텔방에 머물며 시를 썼던 것, 발레리의 시를 터키어로 번역했던 것,

세월이 흐른 후 미국 여행을 갔다가 시와 번역물로 가득 찬 가방을 도둑에게 뺏겼던 것을 내게 신나게 설명해 주곤 했다.


인생에 대한 현명한 충고들, 예를 들면 인간은 자신의 본능과 고민과 강박관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삶이 사실은 아주 빨리 지나가므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 아주 좋다는 것,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의 심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 장면들과 이런 말이 머릿속에서 합쳐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 물었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질문은 좋은 것이며,

삶의 목적과 행복은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싶지 않았던 곳에 있지만 이 모든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들로 고심하거나 삶에서 기쁨이나 심오함을 추구할 때 자동차나 집이나 배의 창문을 통해 보았던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악이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변화무쌍하게 끝이 날 테지만,

우리 눈앞에서 흐르는 도시의 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꿈속에 나오는 추억처럼 우리와 함께 남을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유아적인 상태이며 상상력이 버텨 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건전하거나 까칠하게, 명랑하거나 따듯하게, 편안하거나 자연스럽게 맺는 관계와 우정을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연기를 펼치듯이 한다는 기분에 휩싸였던 걸까?

남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별로 문제없이-어쩌면 전혀 문제없이-하는 일을 나는 왜 이를 악물고 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런 척했던'나를 혐오해야 했던걸까?...

이 사람들과 함께 있기 위해, 공동체와 단절되지 않기 위해 아둥바둥했던 나 자신을 가장 혐오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로 향했던 경멸어린 시선은 주위로, 이제는 가족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과 친척들에게로,

학교 친구들에게로, 다른 지인에게로 그리고 도시 전체로 향했다.


우리는 행복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도시에 대해서, 구향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과 경험속의 존재들에 대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고향이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지극한 헌신의 결정체이며,

그 때문에 완전히 폐허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순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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