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시작해서 나름 깊이를 더해간 책이다.

책을 쓰는 방식도 다독과 많은 사고를 한 흔적이 엿보인다.

세상 전체의 흐름을 한번 둘러본 느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분명히, 난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 없으며, 누가 뭐라하던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다 가고 싶을 뿐이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라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앞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공공의식이 부족한 엘리트는 사회에 오히려 더 큰 해악만 끼칠 수 있다는 것 역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구 민주주의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기본 전제로 하고, 권력자를 철저히 불신해 권력을 분리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사고방식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민법, 상법, 소송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정교하게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만든 부분들,

애초에 인간 세상에서 최선은 성취하기 힘들다고 보고 이해 당사자들의 투쟁을 통해 적정선에서 타협하도록 한 냉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답한다.


분명히 어떤 젊은이들은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사건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들 마음속 심연에는 지금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이웃들을 다량학살하고 그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악한 본성이다.

여성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성은 전자발찌를 채워야할 상습 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한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주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춰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누군가 나에게 한사코 권하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게 세상의 비정한 이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갈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오직 진심만이 그 신뢰를 얻는 열쇠일 것이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실시간 SNS로 연결되어 모든 것이 생중계되는 지금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의 현재에만 집중하는 현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라면서,

과거의 불의를 극복하고 미래의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식의 20세기적 서사 구조가 붕괴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거대 담론인 이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시대다.


내부고발자들은 그들이 어떤 동기를 가졌든 결과적으로 당신의 몫을 가로챈 권력자들의 치부를 폭로하여 당신에게 이득을 주는 사람이다..

제보자는 진실을 밝히는 계기일 뿐이다. 한 점 티끌 없이 고결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누가 당신에게 이익을 주고 누가 당신에게 손해를 끼쳤는지 정신차리고 보아야 한다.

내부고발자가 시민 이익의 대변자로 보호받고 보상받아야 권력자들이 긴장한다.

발각될 리스크를 고려에 넣도록 만들어야 대범한 도둑질을 못한다. 조심이라도 한다.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감시다. 눈먼 의리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늘 고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고객을 상대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답답하긴 하지만 메뉴얼에 충실하고 일하는 사람의 권한과 책임이 분명한 사회에도 분명히 장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건 문명과 야만의 문제다.

안와르 콩고를 비롯한 깡패들은 순진무구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냥 멋대로 충족시키는 존재. 그것이 그들 '프레만'들이다.

권력자가 돈을 주며 지시하면 아무 고민없이 이웃들을 때려죽이고 성욕이 발동하면 열네살 아이를 강간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인, '프레만'이란 그냥 동물적 본능대로 사는 수컷 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을 비하할 것도 없다.

한국사회에서 '의리' 운운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조폭영화를 보며 멋지다고 열광하는 이들이 감히 누굴 비하한단 말인가.

깡패란 어떻게 포장해도 프레만 같은 하이에나 수컷 무리일 뿐이다....

'공산당 섬멸을 위해서라면', 기존 윤리(문명) 따위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인이 떨어지자 평범한 동네 양아치들은 순식간에 학살자로 변신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문명의 작동을 정지하면 인간이란 쉽사리 동물에 가까운 원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 본성이 90퍼센트 침팬지에 가깝다고 본다. 침팬지는 영장류 중 가장 포악하다.

영역권을 침범한 다른 무리 침팬지를 발견하면 떼로 공격하여 찢어주여 먹어 치운다.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핑거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폭력을 감소시킨 결정적인 힘은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즉 근대국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개인들은 국가를 만드는 사회계약을 체결했고,

국가가 폭력 수단을 독점함으로써 무정부 상태의 폭력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게 된다.

상업의 발전 역시 중요한 요소다.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물건을 교환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

근대 이후 폭력적인 남성 문화에서 탈피하는 여성화,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세계주의의 흐름도 평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도주의를 향해 가치 체계를 진화시켜온 이성의 힘이다.

이를 모두 종합하면 인류 역사가 밟아 온 '문명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조국

스위치, 칩히스/댄히스

현재의 충격, 글러스 러시커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거

이스탄불, 오르한 파묵

미래는 핀란드에 있다, 리처드 D 루이스

특이점이 온다, 레이 커즈

제3의 길, 앤서니 기븐스

유러피언 드림, 한계비용 제로 사회, 제러미 리프킨

영화 <카트>, <액트 오브 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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