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은 그 사람이다"  - 페이터-

"스타일을 짓는 것은 작품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 -스땅달-

여러가지 책을 읽다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문체, 즉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주장, 표현을 하든지, 글을 쓰는 스타일은 글쓴이의 모든 것을 가장 간단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런 이유로 글을 쓰는 스타일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를 고민해 보고 있다.

활자화되어 책으로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원한 자국을 남기는 글쓰기.

가장 많이 고민하고 되돌아보아야 할 기본이라 생각해 본다.

 

문장이란 언어의 기록이다. 언어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흔연작춘주 적아 원중소(欣然酌春酒 摘我 園中蔬)'

이것은 전원시인 도연명의 명구로서 이익재의 평생 애송하던 바이다.

청복이 있으면 근교에 조그만 전원을 얻어서 감자와 일년감을 심고 또 양이나 한마리 쳐서 그 젖을 짜 먹으며 살아볼 것인데,

그러나 이것도 분외과망(分外過望)일는지 모른다.   -문일평의 [영하만필]에서-

 

소리를 주로하는 글은 '운문' 또는 율문이라 하고 뜻을 주로 하는 글은 '산문'이라 일컬어오는데...

운문이 노래하듯 쓰는 것이라면 산문은 말하듯 쓰는 편이다.

 

좋은 감상은 발견의 노력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肉眼 이상으로 靜觀, 凝視, 暝想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란 말도 있듯이 희, 노, 예, 락, 오, 욕의 칠정은 언제든지 우리 마음속에서 타오를 수 있는 불이다.

다양한 인간 사물과 변화무궁한 자연현상에 부딪칠 때마다 이 칠정 중의 어느 한 가지는 반드시 불이 붙는다.

대상에 따라 크게 붙고 작게 붙는 것만 다를 분, 칠정이 모조리 무감각한 대는 잠든 때나 죽기 전에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찬연한 페이지는 한 번도 실패없이 위험 없이 운 좋게 지났다는 것보다도 백 번 쓰러지되 굽히지 않고 일어서는 곳에 있을 것이다.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새들은 연못가 나무위에 잠들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당시대의 시인 가도의 서경시다.

이 시의 바깥짝 '승고월하문'이 처음에는 '승고'가 아니라 '승퇴월하문'이었다.

승퇴월하문이 아무리 읊어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퇴', 밀 '퇴'자 대신으로 생각해낸 것이 '고', 두드릴 '고'자였다.

그래 '승고월하문'이라 해보면 이번엔 다시 '퇴'자에 애착이 생긴다.

'퇴로 할까? 고로 할까?'정하지 못한 채, 하루는 노새를 타고 거리로 나갔다.

노새 위에서도 '퇴로 할까? 고로 할까?'에만 열중 하다가 그만 경윤 행차가 오는 것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쳐버렸다.

가도는 경윤 앞에 끌려 나가게 되었고, 또 '퇴로 할까? 고로 할까?' 생각하느라 미처 비켜서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경윤은 이내 크게 껄껄 웃고 다시 잠깐 생각한 뒤에 "그건 퇴보다 고가 나으리다."하였다.

경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침 당대 문호 한퇴지였다.

서로 이름을 알게 된 둘은 그 자리에서 글벗이 되었고, 가도가 '승퇴월하문'을 한퇴지의 말대로 '승고월하문'으로 정해버린 것은 물론,

이로부터 후인들이 글 고치는 것을 '퇴고'라 일컫게 된 것이다.

 

동파가 밖으로 나간 뒤에 자리 밑이 불쑥해서 들쳐보니 여러 날을 두고 고치고 고치고 한 초고가 한 무더기나 쌓였더란 말이 있다.

고칠수록 좋아지는 것은 글쓰기의 진리다.

이 진리를 버리거나 숨기는 것은 어리석다.

같은 중국 문호라도 구양수같은 이는 퇴고를 공공연하게 자랑삼아 하였다.

초고는 반드시 벽 위에 붙여놓고 방에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고쳤다.

 

글은 들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고, 이 세 가지를 한다.

들려주는 것은 운문의 일이요, 알려주고 보여주고 하는 것이 산문의 일인데, 알리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은 몇 배나 구체적인 전달이다.

누구에게나 시각처럼 빠르고 직접적인 감각은 없기 때문이다.

묘사란 그린다는 뜻의 회화용어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태를 그림 그리듯 그대로 그려냄을 가리킴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답구나!' 하는 것은 자기의 심리다.

자기의 심리인 '아름답구나!'만 써가지고는, 독자는 아무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한다.

독자에게도 그런 심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풍경이 아름다운 가닭을, 즉 하늘, 구름, 산, 내, 나무, 돌 등 풍경의 재료를 풍경대로 조합해서

문장으로 표현해주어야 독자도 비로소 작자와 동일한 경험을 그 문자에서 얻고 한가지로 '아름답구나!' 심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재의 현상을 문장으로 재현하는 것이 묘사다.

 

누구나 눈이 흰 줄을 안다. 눈이 희다는 것은 눈에 대한 개념이다.

눈이란 흰 것이라고 아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다.

우리가 개념을 따라서만, 즉 지식을 따라서만 눈이 온 벌판을 그린다면 그야말로 흰 종이를 그대로 놓고 보는 수밖에 없다.

글도 그렇다. 우리가 머릿속에 기억해 넣은 개념, 지식만으로는 '검은 옷은 검다' '눈 온 벌판은 희다'밖에 더 쓰지 못할 것이다....

개념이나 지식만으로 글을 써서는 안된다. 눈이 희다거나 불이 뜨겁다는 개념, 지식은 다 내버려도 좋다.

눈이 한 벌판 가득히 덮였으니 보기에 어떠한가. 흴 것은 물론이다.

눈이 희다 검다가 문제가 아니다. 흰눈이 그렇게 온 벌판을 덮어놓았으니 보기에 어떠하냐, 어떤 정서가 일어나느냐, 즉 눈 덮인 벌판에 대한 느낌이 어떠하냐.

그 느껴지는 바를 적을 것이다.

 

문체란 문장의 체재다. 문장을 구성한 단어들의 뜻만이 표현의 전부가 아니다.

구성, 문체도 훌륭히 표현의 한몫을 담당한다.

문자의 구성이 어떤지는 곧 문장의 체재가 어떤지에 달려 있고, 문장의 체재가 어떤지는 곧 문장의 표현이 어떤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국의 문학가 페이터가 "스타일은 그 사람이다"라고 한 말은 일찍부터 유행한 금언이요,

소설가 스땅달도 "스타일을 짓는 것은 작품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작품뿐만 아니라, 필자의 면모부터 가장 빠르게 드러내는 것은 내용보다는 문체 쪽이다.

 

과거엔 문체를 시대가 가졌고 현대엔 문체를 개개인이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문체론은 개인 문체를 문제삼는 것이다.

 

글에서는 문장미가 요구될 것은 당연하다.

말을 뽑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문장의 허무다.

말을 뽑아내어도 문장이기 때문에 맛있는 아름다운, 매력 있는 무슨 요소가 남아야 문장으로서의 본질, 문장으로서의 생명, 문장으로서의 발달이 아닐까?

현대, 또는 장래 문장의 이상은 이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술가의 문장은 일상의 생활기구는 아니다. 창조하는 도구다.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대상의 핵심을 집어내고야 말려는 항시 교교불군하는 야심자다.

어찌 언어의 부속물로, 생활의 기구로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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