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의도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는 것이였는데,
읽다보니 소설가가 추구하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 왔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상상하며 그려간다는 일, 얼마나 멋진가.
즉 소설에나 가능한 일을 소설가는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감동적인 일화는 에드거 월러스다.
서른 살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해 이십칠 년간 170권이 넘는 장편 소설을 남긴 소설가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잔디밭에 누워 당신의 하얀 미소처럼 저 하늘 위를 떠가는 흰 구름을 올려다보아도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너무나 할 일이 없어서 결국 나는 중앙도서관 정기강행물실에 앉아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해에 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을 썼다.
그때의 나에게 왜 그렇게 많은 글을 써야만 했나고 묻는다면, 어깨를 한번 들어 보이고는 "달리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하리라.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우리를 밀고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등장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이해없이 소설가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
소설 창작에서는 사건 중심인 추리 소설을 플롯이 읶는 소설이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 동기를 중요시 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있다.
소설을 쓸때, 가장 먼저 주인공을 결정해야 한다.
주인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야기에서 가장 사랑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주인공은 그가 누구든 매력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외부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무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를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지고 있을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옛날에는 저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걔들이 다 죽었거든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은 간단하다. 걔들보다 오래 살면 된다.
이 인생의 묘미를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성격의 형성이다.
굴복하지 않는 모든 시련은 우리를 원하는 사람으로 만드어준다는 것. 성격의 형성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캐릭터의 '표정, 몸짓, 행동, 말, 백문백답'.
소설가가 캐릭터와 관련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중에서 캐릭터의 '말'은 사회적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말은 그 속성상 관계 속에서 속내를 왜곡한다.
진짜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다면 '표정, 몸짓,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문학적 표현이란 진부한 말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걸 뜻한다.
결국 문학이란 남들과 다른,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걸 뜻하니까.
소설의 대사란 진부한 욕망의 말들을 어떻게 은폐하기 위해 참신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하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2차적인 목표가 있는 셈이다.
핍진성이란 소설 속의 세계가 긴밀하게 짜여 있어서 현실과 무관하게 나름대로 독립적인 세계를 이루는 성질을 뜻하니까.
그러므로 핍진한 소설이라면 캐릳터들은 진부한 날것의 말들을 자신들의 백스토리와 가치관과 욕망에 걸맞은, 참신한 표현으로 끊임없이 바꿀 것이다.
나 좋을대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독자기피증에 빠져서 독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보다 약속이 이뤄지기도 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쪽이 내 정신건강에 더 좋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기를.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런 육체적 형벌을 지연시키는 대신에 평생 마음의 감옥에서 갇혀 살라는 뜻인데,
싸이코패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그런 마음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이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나 아렌트가 놀란 것은 악행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치밀하게 준비해 근면하게 학살했다는 점에서)에 비하면 그 일을 행한 정신적 수준은
너무나 천박하다는 점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아이히만 역시 왜그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다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악행의 이유는 그렇게 짧거나 사실상 거의 없다...
이렇게 이유가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들도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좀 높아야 한다. 세 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행하려면 좀더 배워야만 한다....
끔직하면 끔찍할수록 천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캐빈은 왜 성인교도소로 이감된다는 사실에 동요하는가? 그건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 수준의 인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직후에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 담긴 뜻은 연민이 아니라 경멸이다.
나와 타인이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이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게 어려워진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처럼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래서 벌어진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없는 세상이란 아마도 이런 공포가 사라진 세상을 뜻하는 게 아닐까?
타인이 강요하는 어떤 두려움에도 현혹되지 않고, 각자가 양심과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 하지만 여전히 그런 세상은 꿈에서나 갈 수 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그 말.
'좋은 글들 > 책에 있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0) | 2016.01.09 |
---|---|
꼭 알고싶은 심리학의 모든것 (강현식 지음) (0) | 2015.12.27 |
화폐의 몰락(제임스 리카즈 지음) (0) | 2015.12.13 |
불씨 1,2 (도몬 후유지 지음) (0) | 2015.11.23 |
비굴의 시대(박노자 지음) (0) | 2015.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