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문과 성서학문을 유도해내고 또 필연적으로 성서학문의 꼴을 형성시킨 정치적 맥락의 연결고리들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대개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보다는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필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할 것이며, 그들은 그러한 분석을 정치적인 동기를 가진 것으로, 또는 역사학에서의 해체나 수정주의같은 일시적인 유행현상 정도로,

또는 성성연구의 객관성에 대한 포력적인 공격으로 비난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예들은 과거를 구성하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라는 사실, 특히 이스라엘의 과거를 구성하는 일이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많은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근대학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치.종교.이데올로기.사회가 결정적인 모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모든 과거의 구성은 현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자주 인용되는 격언은 고대로부터 우리에게 전수되어 내려온 과거의 표상에 적용시킬 수 있듯이 오늘날의 역사가들의 저작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구약성서는 하나의 역사택이다"라는 폰 라트의 선언은 이 분야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탐구하거나 신학부.신학대학.신학교, 심지어는 종교학과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원초적인 본능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표상 속에서 고대사회와 근대사회의 차이가 표출되는 방식은 통상 '신화'로 보느냐 '역사'로 보느냐 하는 이분법에 의해 좌우된다.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역사가가 아무리 자기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편파적인 텍스트를 가지고 작업을 할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편파적인 텍스트를 생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지각이 중요하고, 과거에 대한 지각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우리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땅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땅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반트' '중동' '근동'같은 명칭들은 그 세계에 대한 유럽중심적 개념을 드러낸다.

앤더슨은 지도가 유럽의 식민지 영토를 개념화하고 통제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성서연구는 일종의 강탈행위에 연루된다. 그러한 행위는 시온주의자들이 그 당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을 몰아냄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동반자를 얻은 셈이다.

역사없는 민족, 또는 성서연구의 담론에 의해서 역사를 박탈당한 민족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아무 상관도 없게 되며, 결국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현재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 즉 이스라엘이라는 근대국가가 '비어 있는' '불모의' 땅을 일구어 꽃을 피웠다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이해와 복잡하게 엮여 있다.

 

언어의 선택, 즉 그땅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권력 조작의 한 부분이다. 그 조작 속에서, 당에 대한 관계가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이 모델은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은 강탈행위가 아니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비어 있는 땅, 또는 적어도 거주자가 없는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주장한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인이 난폭한 민족이었고, 존재하고자 하는 원시적인 에너지와 냉혹한 의지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일신교 신앙의 미래를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가나안인을 죽인 것은 두 민족의 완벽한 혼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했다면 필연적으로 야훼 신앙의 기준들은 회북이 불가능할 정도롤 저급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신제적 성격의 의례, 뱀과 육감적인 나신으로 상징되는 다산 숭배, 그리고 천박한 신화를 가진 가나안인은, 목축 생활의 소박함과 정결함, 고상한 일신교 신앙, 엄한 윤리규범을 가진 이스라엘인으로 대체되었다."(Albright 1957:280-1)

20세기 성서학의 위대한 우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팔레스타인 토착주민에 대한 살해를 이렇게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뻔번스러운 인종주의를 토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내가 아는 한 성서학자들이 올브라이트의 저작을 평가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을 뿐더러 본평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나안인이 비도덕적이고 육욕적이라는 올브라이트의 묘사는 '타자'를 합리적 지성을 갖춘 서양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적 표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 행전" 프롤로그에서 그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위해서 땅을 확보하게 된 가나안 정복은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해석되었다.

그 땅은 이스라엘의 다양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일종의 자연권처럼 귀속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가기서는 하느님과 관련하여 재산의 의미와 의무의 의미라는 특수한 이해가 생겨났다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땅은 미래에 없어질 수도 있다"(Wright 1960:8-9)

그 땅에 대한 토착 팔레스타인 주민의 권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권리, 그들의 못소리, 그들의 역사는 고대 이스라엘을 냉정하게 탐구하는 가운데 배제되고 있다. 정복은 없고 선물만 있으며, 그것은 강탈이 아니라 하느님이 양도한 재산이다.

 

성서연구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학자들의 비전을 형성시켰던 갖가지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요인들에 크게 영향을 받아 다양한 판본의 과거를 구성해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지리학을 발명해 왔다는 사실이 이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4대 강국은 시온주의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옳든 그르든 간에, 선하든 악하든 간에 시온주의는 고대의 그 땅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70만 아랍인의 욕망과 편견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오랜 전통에, 현재의 요구에, 미래의 희망에 뿌리박고 있다."(Khalidi 1971:208)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특히 한 국가의 창조를 다루는 역사에 관한 한 진실이다.

장소에 대한 집착, 즉 그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의 주장은 어떤 반대요구도 배제한다. 성서연구는 세계적 강국의 반영로 격상된 이스라엘 국가가 지배하는 과거를 상상하면서 그 과거에 대해 그 이외의 가능한 구성을 배제함으로써 '역사적 권리' 주장의 정당성을 힘들이지 않고 거들어 준다.

 

이스라엘의 왕정이라는 신기루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실체로서, 과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현재를 정당화하여,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규정하고 지배해 왔다.

 

이스라엘은 약간 문명화되었거나 알파벳을 익힌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형식을 갖춘' 역사저작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 덕분이라는 깜짝 놀랄 주장을 독자들은 만나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문명의 목표가 국가 만들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다른 고대 근동 문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문화이다.

우리는 이 다른 문명들 속에 거대한 기념비적 유물들, 시각예술 그리고 폭넓은 문학작품을 남긴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처럼 강을 끼고 발달한 대문명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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